통역하는 글쓰기
어째 나는 늘 ‘통역하며’ 사는구나 싶다. 가만히 보면 우리 어버이도 늘 나한테 ‘통역해’ 주며 살아오셨지 싶다. 병원에서 의사가 아이한테, 또는 아이 어버이한테 “고객님의 통증은 별고 없으신지요?”라든지 “귀댁 자제 분께서는 무탈하신지요?” 하고 묻는다면 어떨까? 이런 말을 아이가 알아들을까? 그런데 이런 말을 아이가 못 알아들어도 어른들은 곧잘 쓴다. 병원에서뿐 아니라 학교나 마을이나 학원이나 가게나 방송이나 …… 어디에서나 꽤 흔히 쓴다. 그리고 이런 말을 쓰는 어른들은 스스로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못 느낀다. 이때에 나뿐 아니라 모든 어버이는 아이한테 ‘통역해’ 주어야겠지. “네가 아프냐고 물었어”라든지 “아픈 데가 어떠냐고 물었어”라고. 글 잘 쓰는 길은 쉽다. 열 살 어린이가 알아듣도록 글을 쓰면 된다. 글을 더 쉽게 잘 쓰고 싶다면, 여덟 살 어린이가 알아듣도록 글을 쓰면 된다. 또는 어버이 자리에 서서 아이한테 말을 들려주는 삶을 헤아리면서 글을 써 보라. 아이한테 들려줄 말에 겉멋이나 겉치레를 부릴 수 있는가? 2018.1.26.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