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멀지 않게 모악시인선 8
권오표 지음 / 모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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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20


미처 못 걷은 빨래가 밤새 울더라
― 너무 멀지 않게
 권오표
 모악, 2017.11.6.


저물도록 미나리꽝에서 놀다 나온 어린 거위 떼가 양 날개를 풍선껌처럼 한껏 부풀려보더니
밥 짓는 저녁연기 오르는 고샅을 향해 노란 주둥이를 벌리고 일제히 꽥꽥 우네 (목련 질 무렵/13쪽)


  2011년 여름에 전남 고흥에 깃들며 처음 들은 아랫녘말은 ‘싸목싸목’입니다. 어떤 일이든 ‘싸게싸게’ 하지 말고 ‘싸목싸목’ 하자는 말을 들었어요. ‘싸목싸목·싸게싸게’는 서울말 ‘천천히·빨리빨리’하고는 사뭇 결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아랫녘에는 ‘천천히’라는 말도 쓰지만 ‘싸목싸목’도 따르고 쓰거든요. 더 헤아려 보면 ‘찬찬히’라는 말도 있어요.


아랫녘에서는
낙숫물을
집시랑물이라 한다 (집시랑물/14쪽)

무밭에서 한소쿠리 무를 이고 온 어머니가 저녁쌀을 씻으러 우물로 간다 (다시 11월/28쪽)


  말마다 결이 다르기에 말결이 상냥합니다. 다 다른 말은 다 다른 자리에 알맞게 흐르니 즐겁습니다. 사람도 말하고 같아서, 저마다 다른 마음결인 사람이 저마다 상냥하고, 저마다 즐거워요. 하루가 즐겁다면 어제하고 퍽 다르게 찾아오고 맞이하고 누리면서 살림을 지었다는 뜻이라고 느껴요. 오늘 하루 즐거이 살았다면, 밤에 깊이 꿈나라로 잠기면서 느긋이 쉬면서 새로운 날을 기다릴 수 있을 테고요.

  권오표 님 시집 《너무 멀지 않게》(모악, 2017)를 읽으면서 아랫녘 집살림하고 말살림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겨울 한복판인데 어제는 이불을 빨아서 널었고, 저녁에 다 말라서 아이들이 폭신폭신 덮습니다. 겨울 한복판이지만 어제 이불빨래를 마치고서 마을 빨래터에 가서 반소매에 바짓자락을 걷고서 물이끼를 치웠어요. 이동안 아이들은 저희 신을 빨래했고요.

  마을 어귀 빨래터에 손을 담근 아이들은 “물이 안 차네?” 하면서 물놀이를 살짝 하기까지 했습니다. 한겨울에도 폭한 볕을 누릴 수 있는 아랫녘이란 고장은 더없이 고운 선물을 받는 터전이지 싶습니다. 이 고운 선물을 너나없이 누리면서 싸목싸목 하루를 가꾸면서 말매무새를 가다듬지 싶어요.


너무 멀지 않게

봉숭이 씨앗이 터지는 거리만큼만

풀여치 날갯짓 소리만큼만

노루오줌꽃 연둣빛 그날만큼밤

시누댓잎에 쌓인 봄눈만큼만 (너무 멀지 않게/27쪽)


  서울말로 ‘조릿대’라 해도 되고, 표준말로 ‘신우대’라 해도 됩니다. 그리고 ‘시누대’ 같은 아랫녘말을 써도 되어요. 굳이 모든 사람이 서울 표준말로만 말을 하거나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웃녘사람은 웃녘말을 쓰면 되고, 가운뎃녘사람은 가운뎃녘말을 쓰면 되어요. 저마다 다른 터전에서 길어올린 저마다 다른 살림이 깃든 말을 쓰면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서울에 얽매이면서, 또 지나치게 표준말에 스스로 가두면서, 고장마다 다르고 마을마다 다르며 집집마다 다른 우리 모습을 잊거나 잃는지 몰라요. 더 이쁘거나 더 잘생겨야 하지 않는데, 남하고 비슷하거나 닮은 길로 자꾸 휩쓸리는지 몰라요.


누가 자꾸 문을 두드리는 듯싶어 창을 열어보니

지난밤 빨랫줄에 걸어 놓은 셔츠가 밤새 비를 맞고 있다

천둥 번개도 다녀갔는지 흐느끼며 울고 있다 (곡비哭婢/66쪽)


  아침 낮 저녁 밤, 참말로 하루 내내 자동차 지나갈 일이 드문 아랫녘 깊은 시골자락에서 지내다 보면, 귀로 스미는 소리가 언제나 새삼스럽습니다. 마루문을 누가 자꾸 두들기는 듯해서 슬그머니 내다보면 사람은 없이 바람이 스윽슥 지나가는 소리입니다.

  누가 왔나 싶어 마루문 쪽을 내다보면 들고양이 몇 마리가 섬돌이며 평상에 옹크리고 겨울볕바라기를 합니다. 들고양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섬돌이며 평상을 디딘 소리가 가만히 스며요.

  자그마한 가랑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가볍습니다. 도톰한 동백잎이 문득 떨어지는 소리가 묵직합니다. 고즈넉한 보금자리에서는 딱새나 참새가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앉을 적에 나무가 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겨울눈을 들여다보면 잎망울이며 꽃망울이 차츰 굵는 소리까지 들을 만해요.

  미처 못 걷은 빨래가 내는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스민 《너무 멀지 않게》를 덮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왔을까요? 우리는 어떤 소리하고 가깝거나 멀까요? 우리는 어떤 그림이나 숨결하고 가깝거나 멀까요? 우리가 가는 길은 우리 꿈이나 사랑하고 얼마나 가깝거나 멀까요? 2018.1.20.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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