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 나무라는 글쓰기
‘조·중·동’이라는 신문을 나무라는 글쓰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겨레 같은 신문이 곧잘 ㅊ걸음을 할 적에 얼마든지 나무라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무라는 글쓰기”는 어쩐지 부질없지 싶다. 재미없기까지 하다. 그들이 ㅊ걸음을 하는 어정쩡한 몸짓을 바라보면서 ‘저런 ㅊ걸음이 얼마나 바보스러운가’를 깨달아 ‘우리 스스로 ㅊ걸음(오락가락하는 걸음)이 아닌 ㅅ걸음(사람답게 사랑스럽고 슬기로운 걸음)이 되자’는 마음이 된다면 나쁘지 않다. 다만 누군가 나무라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삶을 새로 짓고 살림을 새로 가꾸며 사랑을 새로 북돋우는 데에는 마음을 적게 쓰고 만다. 어느 모로 보면, 얄궂은 이를 나무랄 적에는 자꾸 얄궂은 이를 쳐다보면서 그 얄궂은 모습에 젖어들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글을 쓸 적에 즐거운가? 말 그대로 즐거운 삶을 즐겁게 바라보며 즐겁게 껴안으며 글을 쓸 적에 즐겁다. 어떤 글을 쓸 적에 아름다운가? 참말로 아름다운 살림을 아름다이 바라보며 아름다이 손을 맞잡듯이 글을 쓸 적에 아름답다. 얄궂은 걸음을 하는 신문이 즐겁거나 아름다워 보이는가? 아마 아니리라. 그들이 얄궂은 걸음이 아니라 즐겁거나 아름다운 걸음으로 우리 삶이나 살림을 가꾸는 모습이라면, 이때에 우리는 얼마든지 “즐거운 글쓰기”나 “아름다운 글쓰기”를 할 만하지 싶다. 바보스럽거나 얄궂은 이를 쳐다보고 파헤치고 따지고 나무라다 보면, 그쪽에 품을 자꾸 팔면서 우리 삶자리를 돌보는 품을 놓친다. 나무라지 말자. 쳐다보지 말자. 즐겁게 노래할 삶을 보자. 아름다이 보듬을 살림을 이야기하자. 2018.1.8.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