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시선 4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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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17


똥 누는 아이 얼굴을 찍듯이 시를 그리는
―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장석남, 창비, 2017.12.8.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입춘 부근/12쪽)


  아침이면, 아니 새벽이면 쌀을 씻습니다. 조용히 부엌으로 가서 고요히 하루를 헤아리면서 찬찬히 쌀을 씻어 불립니다. 아이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면 넌지시 말합니다. “우리 이쁜 아이들아, 누가 우리 아침에 맛있게 먹을 밥이 될 쌀을 씻어 볼까?”

  스스로 씻든 아이들한테 맡기든 곰곰이 돌아봅니다. 아침 아닌 새벽마다 쌀씻기가 번거롭거나 귀찮다면, 이런 마음으로 씻어서 불린 쌀로 지은 밥이 맛날 수 있을까 하고. 아이들한테 쌀씻기를 맡길 적에 낯을 찌푸리거나 성가시다는 말씨로 아이들을 부르면 아이들이 반길까 하고.


나는 꽃이 되어서 꽃집으로 들어가 꽃들 속에 섞여서 오가는 사람들을 맞고 오가는 사람들로 시들어, 시들어 (꽃집에서/23쪽)


  장석남 님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 2017)를 읽습니다. 시집을 손에 쥐고서 살며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니, 어째서?

  봄이 와서 뒤꼍이며 마당이며 들이며 숲에 들꽃이 가득하면, 아이들 걸음걸이가 더디곤 합니다. 들꽃을 밟을까 자꾸 근심하지요. 이때 아이들한테 이야기합니다. “우리 꽃순아 꽃돌아, 들꽃은 한두 번 밟힌들 꺾이거나 눌리지 않아. 너희들이 근심하면서 그렇게 하면 외려 들꽃은 더 아프단다. 사뿐사뿐 걸으면 들꽃은 모두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어. 가만히 앞을 보며 걸으렴.”


현관에 벚꽃 잎들 날려오니 자주 와서 꽃을 쓰는 노파여
꽃을 쓸어 깨끗이 하려는가?
하늘을 쓰는 노파여
옛날을 쓰는 노파여
꽃 쓸어 감추는 노파여
얼결에 마침 노을도 쓸어내는 노파여
꽃을 쓸어 밤을 맞는 노파여
꽃에게 이기지 못할 노파여 (꽃을 쓰는 노파여/26쪽)


  한겨울에 꽃을 자꾸 이야기하는 시집을 읽으며 봄꽃을 새삼스레 헤아려 봅니다. 봄에는 여름이 멀지 않았다고 여기고, 겨울에는 봄이 멀지 않았다고 여길 수 있어요. 12월을 지나 1월 한복판에 선다면, 우리 집이나 마을에서는 언제쯤 동백꽃이 터질까 하고 손을 꼽아 봅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 차츰 맺는 동백꽃망울을 지켜보고 살살 만지면서 어쩜 이렇게 나날이 굵고 단단히 여무나 하고 설렙니다.

  추운 철이기에 따뜻한 꽃을 그립니다. 따뜻한 철이기에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그립니다. 열매가 익는 철이기에 온통 하얗게 덮는 눈을 그립니다. 돌고 돌면서 새로운 살림과 길을 그리는 하루입니다.

  골목에서 꽃이며 잎을 쓰는 할머니는 예부터 익힌 몸짓대로 정갈하게 보금자리를 가꾸는 모습이지 싶어요. 꽃을 한 군데에 모으면서 꽃이 더 도드라지게 한달 수 있고, 꽃을 가만히 쓸면서 꽃내를 한몸에 맞아들인달 수 있고요.


각색 양말을 빨아 방바닥에 널어놓고
나도 모르게 짝을 맞춰 그리해놓고
나는 그리해놓았다
전에는 없는 일이라 핸드폰으로 찍어놓고
나는 흐뭇하다 (다섯켤레의 양말/44쪽)


  시인은 모처럼 양말을 빨아서 짝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아마 예전에는 이런 집안일을 곁님(가시내)한테만 도맡겼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집안일을 살짝 거들면서 스스로 대견하구나 싶을 만합니다.

  참말 그래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도 이 대목을 느껴요. 아이들은 심부름이 때로는 벅차다고 여기면서도 끝까지 해내면 얼마나 해맑게 웃으면서 두 손을 번쩍 치켜올리면서 춤추는지 몰라요.

  스스로 한다는 보람이란 놀라운 기쁨이라고 봅니다. 스스로 해내면서 온몸에 흐르는 짜릿한 기운이란 우리를 새롭게 살리는 웃음이지 싶어요. 스스로 잔빨래나 잔심부름을 하는 데에서 그치지 말고, 더 손을 뻗어 이 일 저 살림 건사해 본다면, 우리가 쓰는 시 한 줄은 한결 싱그러이 피어날 만합니다.


놀던 카메라를 팔고
눈이 멀었네
내 푸른 피의 사치였던 물건

첫아이의 똥 누는 표정을, 그 동생의 부러진 앞니의 웃음을,
그 에미의 아직 밝던 고단을 찍던 (카메라를 팔고, leica m6/82쪽)


  꽃이 고와 꽃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아이들이 고와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삶이 고와 삶을 시 한 줄로 여밉니다. 하늘이 고와 하늘을 고요히 노래 한 마디로 부릅니다.

  사진을 찍는 마음이란, 시를 쓰는 마음이란, 밥을 짓고 살림을 하는 마음이란, 빨래를 하고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는 마음이란, 모두 한동아리가 되리라 느낍니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이 오니, 겨우내 아무리 추워도 봄꽃은 찬바람을 머금으며 피어나니, 오늘 하루를 더욱 씩씩하게 열자고 다짐합니다. 마음 한켠에 시 한 줄을 살며시 놓으면서. 2018.1.5.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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