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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위니의 새 컴퓨터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128
코키 폴 그림, 밸러리 토머스 글, 노은정 옮김 / 비룡소 / 2004년 8월
평점 :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23
‘셈틀’을 곁에 두며 우리 삶은 나아졌나?
― 마녀 위니의 새 컴퓨터
코키 폴 그림·밸러리 토머스 글/노은정 옮김
비룡소, 2004.8.10.
저는 국민학교 4학년 무렵이던 1985년이었지 싶은데 ‘셈틀’을 처음 보았습니다. 요새는 잘 모르겠으나 1980년대 국민학교는 툭하면 학교끼리 뭔가를 겨루어야 했고, 이런 학교대표나 저런 학교대표를 뽑곤 했어요. 저는 그무렵 얼결에 ‘○○국민학교 컴퓨터대회 출전대표’가 된 일이 있어요.
왜 저를 학교대표로 뽑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더욱이 저희 집에는 셈틀이 없었답니다. 학교에서는 산수 시험이나 여러 가지로 따졌을 텐데, 아무튼 하루아침에 난데없이 컴퓨터학원이라는 데에 다녀야 했고, 국민학생한테는 영어를 안 가르치던 그때에 온통 알파벳으로 된 풀그림을 배워서 짜야 했습니다.
컴퓨터학원이라는 데를 몇 달 다니기는 했으나, 무슨 대회에 나가고 보니 그곳에 온 아이들은 꼭 별나라 아이들 같았어요. 우리 학교만 학원 셈틀을 한 주에 두 번, 게다가 한 시간 수업에서 몇 분만 겨우 만진 채 대회에 나갔으나 다른 아이들은 다 집에 셈틀이 있는 듯했거든요.
어릴 적에는 셈틀은 꿈조차 못 꿀 값비싼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참말로 예전에는 셈틀 하나 값이 대단했지요.
쫓겨난 윌버는 하는 수 없이 비를 쫄딱 다 맞았어요. 윌버가 집 안을 들여다보니 위니는 신이 나 있었어요. 위니는 새 요술 지팡이를 주문하고 나서 www.웃기는마녀.com으로 들어갔어요. 거기에는 배꼽 잡게 웃기는 이야기들이 많았죠. (6쪽)
‘마녀 위니’ 그림책 꾸러미 가운데 《마녀 위니와 새 컴퓨터》(비룡소, 2004)가 있습니다. 이 그림책은 2004년에 나왔는데 이즈음은 아마 한국뿐 아니라 온누리 숱한 나라에 셈틀이 널리 퍼진 무렵이라 하겠지요. 셈틀이 없이는 살기 어렵다는 말이 나올 만한 즈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학교도 마을도 사회도 공공기관도 모두 셈틀로 일하는 즈음이라고 할 수 있고요.
마녀 위니는 이녁 집에 셈틀을 들이기 앞서까지 늘 종이책을 보면서 마법 주문을 찾고 외웠대요. 이러던 어느 날 셈틀이라는 멋진 기계를 알았고, 집에 셈틀을 들인 뒤에는 더는 종이책을 힘들게 뒤적이지 않고도 마법 주문을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셈틀은 한 번만 마법 주문을 집어넣어도 똑같이 외워 주니 매우 좋았다고 해요.
그런데 있지요, 마녀 위니는 셈틀을 들이고부터는 고양이 윌버하고 놀지 않았답니다. 셈틀을 켜서 너른 인터넷 바다를 헤엄치면서 재미난 읽을거리나 이야깃거리를 찾아다녔대요.
지붕이 새서 빗물이 방 안으로 떨어지고 있던 거예요. “어머머! 비 때문에 새 컴퓨터가 망가지겠네! 지붕 고치기 주문을 외워야겠어!” (8쪽)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도 이와 같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너른 인터넷 바다에서 헤엄을 치느라 정작 우리 곁을 헤아릴 틈이 없을 수 있어요. 먼먼 나라 이야기는 손바닥만큼 환하게 읽으면서도, 우리하고 가까운 사람들하고는 오히려 멀어진다고 할까요.
또는 나라밖 이야기는 환하게 꿰뚫어도 서울하고 먼 시골 이야기는 하나도 모를 수 있어요. 더욱이 온누리 여러 나라 이야기를 살피러 쉽게 마실을 할 수 있고, 이렇게 다녀오는 기자나 작가가 많은데, 이와 맞물려 정작 이 나라 골골샅샅 누비거나 살피면서 시골자락 작은 이야기를 눈여겨보는 일은 줄어들지 싶습니다.
위니는 마법 주문 책을 보려고 선반으로 손을 뻗었어요. 요술 지팡이를 꺼내려고 주머니도 뒤졌지요. 그러다 곧 기억이 났어요. “아차! 둘 다 쓰레기통에 버렸지!” (19쪽)
저는 ‘셈틀’이라는 기계가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이 셈틀이라는 이름을 곰곰이 짚고 싶어요. ‘셈틀’은 ‘베틀’ 같은 얼거리로 지은 낱말입니다. 베를 짜는 기계이기에 베틀이듯이, 셈을 다루는 기계이기에 셈틀입니다.
셈이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숫자를 셉니다. 셈틀이라는 기계는 2진법으로 움직여요. 이런 모습을 셈이라는 낱말이 잘 나타내지요. 다음으로 셈은 ‘헤다’에서 비롯한 낱말이기에 ‘헤아리다’ 곧 ‘생각하다’를 뜻합니다. 우리는 셈틀을 부리면서 우리가 생각하거나 꿈꾸던 일을 실컷 펼 수 있습니다.
널리 퍼진 ‘컴퓨터’라는 이름을 그냥 쓸 수도 있으나, 1980년대 끝무렵에 이 나라 젊은 일꾼이 슬기롭게 지은 ‘셈틀’이라는 이름에 깃든 뜻이 무척 좋고 알맞구나 싶어서 이 이름을 가만히 쓰다듬곤 합니다.
《마녀 위니와 새 컴퓨터》에 나오는 마녀 위니가 인터넷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는, 집살림이나 집고양이를 살뜰히 아끼면서 셈틀을 다루어 본다면, 또 우리도 셈틀이라는 ‘생각을 펴는 기계’를 잘 살려서 쓸 수 있다면, 온누리는 한결 아름다울 만하리라 느껴요. 즐겁게 다루고 알맞게 펼치면서 사랑스레 나누는 길을 찾을 적에 아름다울 수 있다고 할까요.
숫자·성적·성장율이라는 한쪽 셈에만 얽매이기보다는, 생각·꿈·슬기 같은 다른 셈을 나란히 살필 줄 아는 곱고 사랑스러운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2017.12.30.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그림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