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최종규 글.사진, 사름벼리 그림 / 스토리닷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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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누리신문 오마이뉴스에 올리려고 씁니다.

시민기자 가 손수 쓴 책을

다른 사람 소개 아닌 스스로 소개하는 꼭지가 있어요.

아마 어쩌면 아무래도

글쓴이가 글쓴이 책을 가장 잘 말할 수 있을까요?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하고 짝꿍책입니다.

이 글을 너그러이 읽어 주시면서

두 가지 책을 넉넉히 사랑해 주시면 좋겠어요.

모두 고맙습니다.

모두 사랑해요! 


+ + +


살림하는 아버지가 사랑을 아이한테 가르쳐요

[책이 나왔습니다] 아이랑 살며 배운 사랑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참말로 쓰고 싶은 책을 드디어 썼습니다. 2017년 한 해에만 다섯 권에 이르는 책을 썼는데, 이 가운데 12월 첫무렵에 태어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스토리닷, 2017)은 지난 열 해를 통틀어 가장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새로 짓는 길을 걷기에, 언뜻 보기로는 저한테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2016)이나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2017)이나 《읽는 우리말 사전 1·2》(2017) 같은 책이 더없이 뜻있는 책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아이들하고 살림을 함께 지으며 살아온 지난 열 해를 통틀면서 다른 어느 책보다 ‘아이들을 만나서 삶을 새롭게 바라보고 살림을 새롭게 가꾸는 길을 걸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여느 ‘육아일기’를 쓸 마음은 없어요. 제가 쓰고픈 이야기는 ‘살림노래’입니다. 고된 육아나 힘겨운 집안일 이야기가 아닌, 아이를 낳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보듬고 돌보는 동안 새롭게 배운 이야기란 늘 노래처럼 제 삶을 곱게 북돋아 주는구나 하고 느껴서, 이 이야기를 살림노래를 쓰고 싶었어요.



이 땅 모든 사내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보세요, 우리 사내들, 이녁은 김치를 먹나요 안 먹나요? 김치를 먹는다면, 그대는 김치를 담그나요 안 담그나요? 김치를 먹는 그대들은 김치를 담글 줄 아나요 모르나요? 김치를 좋아하는 그대는 소매 걷어붙이고 즐겁게 김치를 담그는가요 안 담그는가요? (31쪽)


집 바깥자리에서 큰 이름을 드날린다고 하더라도 집 안자리에서 살림을 거느리지 못할 적에는 반토막이 된다고 느끼며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밥하기도 배우시고 김치 담그기도 배우시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으나, 그보다 저 스스로 이런 안살림을 차근차근 잘 익혀서 해 보고 나서 말씀을 여쭙자는 마음입니다. (39쪽)



  저는 김치를 담근 지 몇 해 안 됩니다. 아마 큰아이가 일곱 살 무렵까지 김치를 안 담그고 살았지 싶습니다. 이제는 틈틈이 김치를 담가요. 지난날에는 제가 매운김치를 못 먹기 때문에 안 담갔다면, 이제는 ‘안 매운김치’를 담그면 되는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아 김치를 담급니다.


  참 더디게 깨닫지요? 매운김치를 못 먹으면 안 매운김치를 담그면 되었을 텐데요. 그리고 제가 김치를 못 먹더라도, 찬국수를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곁님이나 아이들을 더 헤아리는 살림이라면 훨씬 진작부터 김치 담그기나 살림짓기를 더 씩씩하게 했으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러면서 배운 대목이 있어요. 왜 사내라는 사람은 이렇게 핑곗거리가 많아서 뭐를 못 하거나 뭐를 안 하는가를 가만히 되새겼습니다. 저를 낳은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지은 살림을 되새기면서, 학문으로는 훌륭할는지라도 집안일은 한 가지조차 못하던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았어요.


  우리 아버지한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저는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곧잘 적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아버지는 ‘남이 해 주는 밥’만 먹고 사신 터라, 스스로 밥을 지을 줄 모르십니다. 이뿐 아니라 혼자서 라면을 끓여서 드실 줄도 모르셨어요.



아이들한테 하나하나 맡겨 봅니다. “자, 작은 도마를 꺼내고 작은 칼을 꺼내 보세요. 한 사람씩 오이를 썰어 봐요.” “누나가 오이를 썰면 동생은 토마토를 썰어 봐.” “스스로 먹을 만큼 주걱으로 밥을 푸세요.” “어머니 수저를 누가 챙겨 줄까?” “밥상을 펴면 행주로 잘 닦아 주세요.” (43쪽)


저희가 아이들한테 물려주려고 하는 땅은 그냥 땅이 아닌 ‘숲 보금자리’나 ‘보금자리 숲’입니다. 숲이 될 보금자리, 또는 보금자리가 될 숲을 아이들이 물려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차근차근 가꾸지요. (52쪽)



  흔히들 말하기를, 밥은 못 할 수 있더라도 어떻게 라면도 못 끓이느냐고 물을 만해요. 이때에 저희는 아이들을 보며 새삼스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많이 어릴 적에는 밥은커녕 라면도 못 끓여요. 아이들은 밥상에 버젓이 밥하고 국하고 반찬이 있어도 손수 수저를 챙겨서 밥을 먹으면 배가 안 고프다는 대목을 모르기 일쑤입니다.


  아직 아이들은 매우 어리고 철이 덜 들었기에 코앞에 있는 먹을거리를 못 알아봐요. 게다가 노느라 바쁘고, 놀이가 좋은 나머지, 배고픈 줄을 늘 잊기까지 합니다. 이는 어른도 매한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내로라하는 숱한 ‘남성 지식인·남성 정치인·남성 고위 공무원’ 가운데 밥할 줄 알거나 김치 담글 줄 아는 사내는 몇이나 될까요? 아기가 울 적에 어떻게 안아서 달래며 자장노래를 불러야 하는가를 아는 사내는 몇이나 될까요? 천기저귀를 어떻게 접어서 아기 샅에 대어야 아기가 좋아하는가를 몇 사내쯤 알까요? 천기저귀나 행주나 걸레는 어떻게 삶고 말려야 하는가를 몇 사내쯤 알려나요?



제가 열한 해째 곁님 핏기저귀를 삶고 헹구면서 살아온 바탕에는 이런 뜻이 있어요. 비록 저 한 사람 몸짓이라 하더라도, 작은 한 사람 몸짓으로 살림을 조금씩 가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 집 두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손으로 가꾸거나 지어서 흙을 보듬는 살림을 물려받을 수 있을 테고요. 시골에서도 서울에서도 기저귀 빨래가 따사로운 볕을 받고 싱그러운 바람을 쐬면서 눈부시게 춤추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집집마다 빨랫줄을 걸고서 즐겁고 아름답게 옷살림을 다스리는 새로운 모습을 그려 봅니다. (77쪽)



  그렇다고 제가 이 모두를 처음부터 잘 알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저한테 아이들이 찾아오기 앞서까지 ‘머릿속 성평등주의자’로 살았어요. 아이들이 찾아오고 나서는 ‘머릿속 성평등주의자’를 몽땅 내려놓았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온몸으로 사랑님’이 되어야 한다고 깨달았어요.


  곁님 어머니한테서 천기저귀 접기를 배웠습니다. 마을 할머니한테서 천기저귀를 얻었습니다. 곁님한테서 핏기저귀를 삶아서 말리고 건사하는 길을 배웠습니다. 바깥에서 밥을 사다 먹거나, 이웃집에 마실하여 밥을 함께 먹을 적에는 으레 어깨너머로 반찬하기를 살피거나 이모저모 여쭈면서 집에서 스스로 해 보곤 했어요.


  제가 못 먹는 밥이 있더라도 아이들이 맛을 볼 수 있도록 지어서 차려야 하는구나 하고 배웠어요. 저는 참말 못 먹지만 아이들은 맛나게 잘 먹는 반찬이 있네 하고 깨달으면서,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치거나 물려줄 적에 서로 즐겁고 슬기로운가를 비로소 헤아렸습니다.



대학 교육 네 해에 들일 돈으로 책을 사서 읽는다면, 거의 사오천만 원에 이르는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어요. 엄청나답니다. 사오천만 원에 이르는 돈을 스스로 책방에 가서 책을 골라서 읽고, 이렇게 읽어서 모은 책으로는 저마다 마을도서관을 열 수 있지요. 네 해에 걸쳐 사오천만 원에 이르는 돈으로 책을 읽어서 모아 두었으면, 앞으로 이 책으로 헌책방이나 마을책방을 열 수 있기도 해요. 마을도서관도 열 수 있지만, 스물네 살 젊은이 나름대로 새롭고 재미나게 멋진 책방을 열 만해요. (83쪽)



  아이들을 낳아서 돌보는 어버이로, 아버지로, 어른으로 살기 앞서, 저한테는 늘 한 가지만 있었어요. 혼자서 오랫동안 살면서 책만 사고 책만 읽고 책만 건사했습니다. 곁님이나 아이들이 저한테 오기 앞서인 2007년 봄에 인천에서 ‘사진책 도서관’을 열었는데요, 이 사진책 도서관은 이제 ‘사전 짓는 책숲집 + 숲놀이터’로 거듭난 모습으로 전남 고흥에서 잇습니다만, 예전에는 그저 책만 아는 어리보기였습니다.


  그래도 책 한 가지에 사로잡힌 채 살면서 배우거나 얻은 깨달음도 있어요. 이를테면 대학교 졸업장을 거머쥐지 않고도 책으로 얼마든지 삶이나 사회를 배울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장만으로도 스물여섯 살에 ‘국어사전 집필을 도맡는 편집장’ 일을 했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을 뿐 아니라 사회나 단체에 아무런 줄이나 끈조차 없었지만, 2003년 여름에 이오덕 어른이 돌아가신 뒤에는, 이오덕 어른을 기리면서 쓴 원고종이 1000장에 이르는 글 하나를 쓴 터라, 이 글이 징검돌이 되어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하고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았지요. 스물아홉 살 적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아닌, 오직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갈고닦은 앎 하나로 국립국어원에서 강사 노릇도 해 보았고, 한글학회나 문화체육관광부나 한글문화연대나 경기도청에서 맡기는 ‘공공언어 순화’ 같은 일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터라, 어떠한 졸업장이나 자격증도 부질없는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 새롭게 길을 닦으면서 살아가면 되더군요. 스스로 깊고 넓게 파헤치면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슬기로운 몸짓이 되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고요.



저는 갓 스물이 넘을 무렵 ‘스무 살까지 학교를 다니며 배운 모든 것은 아무 쓸모가 없네’ 하고 느꼈어요. ‘스무 살까지는 학교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을 쓸모없이 가르쳤구나 하고 몸으로 아로새긴 나날이었네’ 하고도 느꼈어요. 저로서는 스무 살 적부터 0살이라고 생각했어요. 스무 살 나이를 모두 버리고, 그때부터 스스로 0살이니 처음부터 모조리 새로 하자고 다짐했어요. (105쪽)



  곁님을 만나서 함께 살림을 짓는 동안 날이면 날마다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은 주제에 어쩜 이 쉬운 살림은 이다지도 모르느냐는 꾸지람에 지청구에 나무람에 …… 참으로 할 말이 없더군요. 그래서 스무 살부터 마흔 살까지는 책으로 배운 살림이었다면, 마흔 살부터는 스스로 0살이라 여기면서 살림으로 살림을 배우자는, 온몸으로 손수 짓는 살림길을 걸으면서 새롭게 살림을 배우자는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합니다.


  요즈막에는 곁님이 저를 나무라면 빙그레 웃으면서 한 마디 해요. “자, 자, 너무 성을 내지 말고, 가만히 돌아봐요. 내가 좀 어리보기라서 느즈막하게 달라지지만, 지난 열 해를 돌아보면 나는 한 걸음씩 스스로 고치면서 나아가는 삶이에요. 오늘은 아직 어리숙하게 하느라 못 바꾸거나 못 고쳤지만, 틀림없이 모레에는, 모레에 안 되면 다시 더 지내고서, 그때에도 또 못 바꾸거나 못 고치면 그다음에는 바꾸거나 고치려고 늘 마음하고 몸을 써요. 느긋하고 너그러이 기다려 봐요. 우리, 서두르지 말고 하나하나 즐겁게 바꾸거나 고쳐요.”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집에서 ‘밥짓는 사내’로 삽니다. 밥을 손수 지어서 아이들한테 열 해째 먹이는 살림을 꾸리는데, 이러는 동안 늘 ‘밥말’을 들려줍니다. ‘밥말’이란 밥하고 얽힌 말이나 이름입니다. 부침개를 할 적에 ‘부침개’가 뭔지 알려주고, ‘부침(부치다)’하고 비슷하지만 다른 ‘지짐(지지다)’을 알려줍니다. 또 ‘볶음(볶다)’을 알려주며, ‘무침(무치다)’이나 ‘데침(데치다)’이나 ‘버무림(버무리다)’을 알려주지요. (113쪽)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라는 책은 ‘우리 집안 책’이 되기를 바라면서 썼습니다. 저 스스로 제 삶과 살림과 사랑을 다시 새기면서 첫마음이 되려는 뜻으로 썼어요.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삶이나 살림이나 사랑이 궁금하다고 물어보면 언제나 선뜻 기쁘게 내어줄 책으로 썼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한테 보여줄 책으로, 곁님 어머니하고 아버지한테 보여줄 책으로, 그리고 온 이웃님한테 보여줄 책으로 썼어요.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새롭게 배우면서 기쁨으로 살림을 짓는 길을 걸으려 한다는 뜻을 담아서 썼어요.


  비록 아직 어설프거나 어정쩡하거나 어수룩한 대목이 많으나, 지난 열 해를 이렇게 배우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열 해 동안 더욱 씩씩하고 신나게 한 걸음씩 내딛으면서 배우려는 마음이라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일하고 놀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배우고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자리에서 으레 쓰는 말마디를 귀기울여 듣고 하나하나 따라하며 배웁니다. 아이들은 여느 때 여느 사랑을 나누는 어버이와 둘레 어른 삶을 받아먹으며 저희 꿈과 이야기를 빚습니다. (125쪽)


어떤 분이 묻더군요. “어떻게 같은 영화를 서른 번이나 백 번을 볼 수 있어요?” 저는 그분한테 되물어요. “어떻게 백 번이나 이백 번쯤 볼 만한 영화를 즐겁게 안 보고, 딱 한 번 보고 그칠 영화만 자꾸자꾸 보시나요?” (131쪽)



  곁님한테서 듣는 꾸지람 가운데 하나는 ‘왜 자꾸 책을 더 사요?’입니다. 곁님은 늘 말합니다. ‘한 번 보고서 덮을 책은 그만 사자’고요. ‘한 번 아닌 백 번을, 아니 천 번을, 아니 날마다 새로 읽으면서 날마다 새로 배울 수 있는 책 하나만 있으면 넉넉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고개 숙여 대꾸하지요. “그대 말이 참말 맞아. 그대 말대로야. 그래서 나도 생각해 보았어요. 앞으로 내가 지으려는 새로운 사전을 다 짓고 나면, 이제는 책을 이렇게 끝도 없이 사들이는 몸짓은 그치려고요. 꼭 열 해까지만 이렇게 할게요. 열 해 뒤에는 사뭇 달라지리라 생각해요.”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든 제 어릴 적을 돌아보든, 새로운 만화책이나 만화영화가 더 재미있지 않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를 참말로 끝도 없이 다시 보고 또 봅니다. 볼 때마다 재미있고 새로우니 자꾸 보고 다시 볼 수 있어요. 볼 때마다 배울 수 있기에 언제나 즐겁게 볼 수 있어요. 볼 때마다 나를 깨우치고 북돋우기에 활짝 웃으면서 새삼스레 볼 수 있어요.



제가 살아가며 얻는 목숨(밥)은 흙에서 얻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흙으로 집을 지어서 살아야 제 목숨을 옳게 건사할 만합니다. 그러면 저는 제가 밥을 삼을 터를 이루는 흙하고 같은 흙으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쓰레기를 파묻는 흙땅이 아니라, 목숨이 살아숨쉴 흙땅이어야 합니다. 내 하루하루 살림에서 쓰레기를 내는 삶이 아니라, 꿈을 낳고 사랑을 피우는 삶이어야 합니다. 덜 쓰고 아끼는 삶이 아닙니다. 아름다이 누리며 착하게 꾸리는 삶입니다. (223쪽)



  아이들이 아침에 상냥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봅니다.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그래, 우리 이쁜 아이들도 잘 자고 일어났을까? 밤새 즐거운 꿈을 꾸면서 하늘을 날았을까? 지난밤에는 어떤 꿈을 꾸었니?” 서로 묻고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따스히 안습니다.


  이제 두 아이(2017년으로 큰아이는 열 살, 작은아이는 일곱 살입니다)는 모두 스스로 밥을 지을 줄 압니다. 갑작스레 두 아이가 밥을 잘 짓더군요. 아홉 살 여섯 살이던 때에는 두 아이가 밥을 안 짓거나 못 지었어요. 열 살 일곱 살로 접어든 2017년에 참말로 갑작스레 밥을 지어내요. 큰아이는 손수 반죽을 하고 부풀려서 빵도 굽지요. 작은아이는 누나한테 질세라 달걀삶기를 해 보았고, 이제 제법 잘 삶아냅니다. 설거지도 걸레질도 비질도 제법 야무집니다. 아직 아이들 아귀힘이나 팔힘으로는 빨래가 만만하지 않으나, 빨래를 마친 옷가지를 잘 널고 잘 걷어서 잘 갭니다.


  요새는 일부러 아이들한테 감 깎기를 시키곤 해요. “오늘은 누가 감을 이쁘게 깎아 보려나?” 하고 묻습니다. 두 아이는 저마다 감 한두 알을 깎느라 십 분 이십 분 넉넉히 씁니다. 반듯한 칼질하고는 아직 멀지만, 손수 칼을 쥐고서 깎고 썰고 접시에 곱게 놓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나도 잠자리에 누우려다가 물 한 모금 마시려고 부엌으로 가는데 부엌 바닥에 뭔가 하얗게 있는 듯해요. 허리를 숙여서 부엌 바닥을 짚는데 어라 아무것도 안 집힙니다. 아니, 별빛이 집히네요. 달빛하고. (270쪽)



  저는 온누리 이웃 어버이나 어른한테 살며시 말을 건네고 싶어요. 이웃 푸름이하고 어린이한테도 가만히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라는 책 하나를 슬며시 건네면서 말을 걸고 싶어요. 손수 지은 밥이 가장 맛있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어요. 손수 지은 살림을 손수 고쳐서 쓰면 늘 웃음꽃이 피어난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습니다.


  밤에 쉬 마렵다고 아버지를 깨우는 아이를 이끌고 쉬를 누이고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누우려다가 부엌에서 달빛을 주워 보셨나요? 마실길에 다리가 힘들다는 아이를 품에 안으니 어느새 새근새근 곯아떨어져요. 어버이 품에 제 온몸을 맡긴 채 꿈나라로 빠져드는 아이 가슴에서 내 가슴으로 스미는 따스함을 느껴 보셨나요? 갓난쟁이일 무렵 하루에 마흔 장 남짓 오줌기저귀에 똥기저귀를 내놓던 아이가 어느새 씩씩하게 커서 밥도 짓고 국 끓이기를 배우는 대견한 모습을 보셨나요?


  살림짓기는 사랑짓기라고 생각해요. 살림하기는 사랑하기라고 생각해요. 아직 살림에 등을 돌린 이웃 사내한테 여쭈고 싶어요. 바깥일을 줄이면서 집안일을 함께 배우면서 해 봐요. 온 집안에 사랑이며 평화가 흐른답니다. 어설프거나 어리숙한 사내하고 사느라 고단한 이웃 가시내한테 여쭈고 싶어요. 조금 더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차근차근 알려주고 가르치면서 어깨동무를 해 봐요.


  어릴 적부터 살림짓기를 배운 적도 어깨너머로 구경한 적도 없는 철없쟁이 사내가 슬기로운 어버이로 거듭나려면 적어도 열 해는 지내야지 싶습니다. 열 해가 흘러야 멧골도 들도 냇물도 바뀌어요. 살림하는 아버지는, 또 살림하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가르칩니다. 아이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을 똑똑히 깨닫고는 마음으로 사랑씨앗을 심으면서 새롭게 배우고 가르쳐요. 2017.12.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넋/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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