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 굴러가는 날 창비시선 119
이재금 지음 / 창비 / 1994년 3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300



늦가을 서리 와도 조뱅이꽃 핀다
― 말똥 굴러가는 날
 이재금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4.3.30.


  늦가을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씽 부니 날이 매우 찹니다. 바야흐로 겨울이 코앞이라는 뜻으로 비바람이 찾아오는구나 싶습니다. 더 미루면 안 되겠다고 여겨, 늦가을비가 그친 이튿날 아침에 큰아이하고 뒤꼍에 올라 유자를 땁니다. 비는 그쳤으나 바람은 제법 붑니다. 바람이 부는 날 유자를 딴다니 얼핏 바보스럽지만, 유자는 이 찬바람을 머금으면서 더욱 노랗고 향긋하며 보들보들하지 싶어요. 올해로 일곱 해째 고흥에서 유자를 따는데 해마다 결이며 맛이 새삼스러워요. 해마다 깊어지는구나 싶고, 해마다 한결 수월하게 땁니다.


학교 들고부터 일번을 못 면한 아이.
땟국 줄줄 흐르던 아이.
얼굴에 오랑캐꽃 핀 아이.
수박 먹고 싶다던 그 아이.
몽당연필 침 찍어 글쓰던 아이. (슬픈 소원)


  새벽이나 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낮에는 볕이 따사로운 고흥입니다. 인천 언저리에서 살 적에는 십일월 막바지도 볕이 따사로울 수 있는 줄 미처 못 느꼈습니다. 다만 바람이 자고 구름이 없이 볕이 내리쬐면 한겨울에도 퍽 포근하구나 하고 느꼈어요.

  멧자락이 아닌 들녘인 밀양도 늦가을이나 한겨울에도 제법 포근할까요. 어쩌면 남녘 시골마을은 어디나 늦가을에도 볕바라기를 누릴 만하지 싶습니다. 마루에 앉아서, 마당에 서서, 빈들을 거닐며, 숲을 오르내리면서 고마운 가을볕을 받으면서 예부터 왜 ‘해님’ 같은 말을 썼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만하지 싶습니다. 아이들이기에 ‘해님 별님 달님 꽃님’이라 하지 않고, 시골에서 늘 해랑 별이랑 달이랑 꽃이 고맙고 거룩한 줄 알기에 ‘님’이라는 이름을 붙였지 싶어요.


아, 저놈 말순이
분명 말순인데 고개 얼른 돌리고 간다
밀양 장날 단장 서는 골목길
청바지에 아기 달랑 업고
겨울 속으로 가는구나
장거리 올망종말 돈사러 가는구나 (말순이)


  시집 《말똥 굴러가는 날》(창비, 1994)을 읽습니다. 책이름이 “말똥 굴러가는 날”이라니, 시를 쓴 분은 말똥을 보면서 어린 나날을 살았기에 이런 말을 쓸 수 있을까요. 이 시집을 낼 무렵에도 시골자락에서 말똥을 지켜볼 수 있어서 이러한 싯말을 적을 만할까요.


눈 오는 날
남도에 드문 함박눈 오는 날
공부시간에 첫눈 오는 날
눈송이로 피어나는 가시내들이
눈님 오시네
눈님 오시네
아 한결같이 피어오르는데
뭘 보고 있어 공부해야지
선생의 지엄한 목소리
오던 눈 그쳐
하늘 시들해진다 (어떤 수업)


  《말똥 굴러가는 날》을 쓴 이재금 님은 1997년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동안 써 놓고 선보이지 않던 시를 갈무리해서 1999년에 《나는 어디 있는가》가 나온 적 있어요. 밀양에서 나고 자라면서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바로 이 밀양에서 가만히 흙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싯말마다 밀양하고 얽힌 삶이며 살림이며 사람이 흐릅니다. 아마 밀양 이웃님이라면 이 시집에 흐르는 삶이나 살림이나 사람을 눈앞에서 보듯이 그릴 만하지 싶습니다. 밀양 분이 아니어도 어느 작은 마을이나 고장에 흐르는 따사로운 가을볕 같은 기운을, 바람을, 숨결을, 이야기를, 노래를 느낄 만할 테고요.


떡볶이집
학교 가는 골목 모서리집
삼십 오가는 고운 여주인

꼬마손님 뜸하면 책 읽는다
염상섭의 《삼대》 읽고
소설 《화엄경》 읽는다
한눈 팔지 않고 책장 넘긴다 (떡볶이집)


  겨울에도 폭한 시골에서 사는 아이들이 웬만해서는 보기 드문 함박눈을 교실에서 창밖으로 내다보다가 ‘눈님’이라고 노래했다지요. 참말 그래요. 폭한 남녘 고을에서는 겨울에 눈을 보기 어렵고, 이 드문 손님인 눈을 맞이하며 ‘눈님’이라 할 만합니다.

  생각해 봐요. 겨울 지나고 봄이 오면 피어나는 꽃은 그냥 꽃일 수 없어요. 한겨울에도 씩씩하게 꽃대를 올리는 겨울꽃은 그냥 꽃일 수 없습니다. 새봄에 흐드러지고 여름 내내 눈부신 꽃도 그냥 꽃일 수 없지요. 모두 꽃님입니다.

  풀은 풀님이고 나무는 나무님입니다. 모든 목숨은 저마다 님이고, 모든 아이하고 어른도 서로서로 님이에요.

  일부러 내 눈길을 낮추지 않고, 부러 네 눈길을 높이지 않습니다. 찬찬히 거닐며 함께 살아가는 이곳에서 가만히 손을 맞잡는 마음이 됩니다. 저잣거리를 보고, 떡볶이집을 보고, 길을 보고, 창밖을 보고, 하늘을 보고, 또 해랑 별을 보고, 나긋나긋 연필하고 글종이를 봅니다.


산골 동네
먼동 늦게 트고
어둠 먼저 온다.

짧은 해 아까워라
양지머리 고추 나앉고
그 옆자리 아이들 놀고
늦가을 서리 와도 조뱅이꽃 핀다. (산골)


  엊그제 큰아이하고 뒤꼍에서 함께 유자를 따는데, “어라, 여기 봄까지꽃이 폈네? 이쁘다.” 하고 외칩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면서 볕이 포근하니 새봄꽃이 이 늦가을에도 펴요.

  그러고 보면 우리 집 마당에서는 장미꽃이 늦봄 아닌 이달 첫머리에 갑작스레 피고 졌습니다. 철을 잘못 알았던 셈이지요. 더구나 뒤꼍 유자나무 곁에서 흰민들레가 어느새 잎을 내어 흙바닥에 잎을 납작 퍼뜨립니다. 이 겨울에 이렇게 나려는 셈일는지, 이 민들레도 그만 철을 잘못 알고 벌써 일어나려 하는지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 곳곳에서 가을민들레가 돋아 ‘아이 추워. 그런데 어떡해. 꽃대를 올렸는걸.’ 하면서 봄하고 대면 대단히 빠르게 꽃을 피우고 떨구어 씨앗을 맺더군요.

  겨울을 앞두고 해는 나날이 짧아집니다. 이 짧은 해에도 따순 기운을 온몸으로 맞아들여서 피어나려는 가을꽃이 있습니다. 늦가을꽃입니다. 씩씩한 늦가을꽃을 고이 쓰다듬으면서 겨울맞이를 합니다. 2017.11.19.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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