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8. 봄내음 피어나는 말을 해 보기



  저는 ‘날조(捏造)’라는 낱말을 안 씁니다. 한자말이기 때문에 안 쓰지 않습니다. 이 낱말을 들으면 못 알아듣는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낱말 ‘날조’를 쓰면 아이들이 못 알아들어요. 저는 제 둘레에서 못 알아들을 만한 낱말을 구태여 쓰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쓰는 낱말은 ‘꾸미다’나 ‘거짓’입니다. “날조한 이야기”보다는 “꾸민 이야기”나 “거짓 이야기”라고 해야 둘레에서 쉽게 알아들을 만하다고 느껴요. 때로는 “속인 이야기”나 ‘속임·속임수’라고 해 볼 만할 테고요.


  저는 ‘선명(鮮明)’이라는 낱말도 안 써요. 이 낱말도 한자말이라 안 쓰지 않아요. 이 낱말을 못 알아듣는 어린이 이웃이 많아요. 제가 쓰는 낱말은 ‘또렷하다’나 ‘뚜렷하다’예요. 때로는 ‘환하다’를 쓰고, 어느 때에는 “잘 보이다”라고 말해요. 어느 때에는 ‘산뜻하다’나 ‘맑다’ 같은 말을 씁니다.


  찬찬히 헤아리면 이모저모 재미나게 쓸 만한 낱말이 아주 많습니다. 많다고 할 적에는 ‘아주’라는 낱말뿐 아니라 ‘매우’라든지 ‘무척’이라든지 ‘몹시’가 있어요. ‘퍽’이나 ‘꽤’가 있어요. ‘참’이나 ‘참말’이나 ‘참으로’나 ‘참말로’도 있지요. ‘엄청나다’나 ‘어마어마하다’라든지 ‘대단히’도 있고요.


  때로는 “끝없이 많다”나 “수없이 많다”고 할 만해요. “그지없이 많다”라든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라고 해도 재미있어요. “셀 수 없이 많다”나 “까마득히 많다”고 해 볼 수도 있고요. ‘되게’ 같은 말을 쓸 만하고, 전라말로 ‘허벌나게’를 쓸 수 있지요.


  우리가 쓸 말이란 우리 생각을 우리가 스스로 북돋울 만한 말이라고 느낍니다. 이냥저냥 뜻만 알아듣도록 하는 말이 아니에요. 마음을 싣고 생각을 실으면서 말 한 마디마다 이야기를 얹어서 하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이런 이야기 가운데 ‘전설’이 있어요. 흔히 “옛날부터 내려온 전설”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전설’이란 무엇일까요? 어른들 사이에서는 이 낱말이 그리 안 어려울 만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전설’조차 뜻밖에 퍽 어렵거나 낯선 낱말이곤 합니다.


전설(傳說) : 1. 옛날부터 민간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옛날부터 이어서 내려오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전설’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옛날이야기 = 전설’이라고도 할 만해요.


옛날이야기 :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자, 한번 생각해 봐요. 한국말사전에서 살핀 뜻풀이는 ‘전설·옛날이야기’ 모두 거의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낱말을 잘 고르거나 살피면서 쓰면 좋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옛날 옛적부터 ‘옛날이야기’나 ‘옛이야기’라는 낱말을 고이 물려받으면서 썼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를 한자로 씌워서 ‘전설’을 함께 쓴 셈이지 않을까요? 시골에서 흙을 가꾸며 살던 수수한 사람들은 누구나 ‘옛날이야기·옛이야기’라는 낱말을 썼으나, 한문책을 읽거나 쓰던 이들은 이 수수한 한국말을 구태여 ‘傳說’이라는 한자 옷을 입힌 셈이지 싶어요. ‘傳說 = 내려온(傳) + 이야기(說)’인 얼거리예요.


  ‘천성적(天性的)’은 “타고난 성품의 성격을 지닌”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천성적’하고 ‘타고난’ 사이에서 어떤 말을 즐겁게 쓰면서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할까요? 이 땅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어떤 말을 물려받을 적에 즐거울까요?


  ‘혈혈단신(孑孑單身)’은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홀몸”을 뜻한대요. 그러면 우리는 ‘혈혈단신’하고 ‘홀몸’ 가운데 어느 낱말을 골라서 쓰면 즐거울까요? 그냥 둘 다 쓰면 될까요? 아니면 ‘홀몸’을 쓰면서 ‘혼잣몸’이나 ‘외톨이’나 ‘외돌토리’나 ‘외톨박이’ 같은 여러 가지 한국말을 두루 살필 수 있을까요?


외롭다 : 홀로 되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하다

쓸쓸하다 : 외롭고 적막하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외롭다’하고 ‘쓸쓸하다’를 엉터리로 풀이해 놓아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엉터리 말풀이는 수십 해가 흘러도 안 바뀌어요. 한국말을 살피는 학자를 비롯해서, 한국말사전을 엮는 사람에다가, 대학 교수나 전문가조차 ‘외롭다·쓸쓸하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는지 생각조차 안 하지 싶어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이렇게 흔하거나 수수하거나 쉬운 한국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안 찾아보곤 합니다. 그냥 말을 하고 그냥 글을 써요. 우리 스스로 말뜻을 제대로 안 짚는 셈이에요. 이러다 보니 우리 스스로 한국말사전이 엉터리인 줄 알아채지 못하고, 나무라지 못해요. 한국말과 한국말사전을 슬기롭게 갈고닦거나 바로세우도록 이끌거나 북돋우지 못하고 맙니다.


세분화(細分化) : 사물이 여러 갈래로 자세히 갈라짐. 또는 그렇게 갈라지게 함

세분하다(細分-) : 사물을 여러 갈래로 자세히 나누거나 잘게 가르다

나누다 : 1. 하나를 둘 이상으로 가르다 2.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을 구분하여 분류하다

가르다 : 1. 쪼개거나 나누어 따로따로 되게 하다


  봄날에 봄내음이 퍼지는 말을 써 볼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말을 쓰고, 어른하고 아이가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빙그레 웃음꽃을 지필 만한 말을 쓰기를 비는 마음이에요.


  어른들은 ‘세분화·세분하다’ 같은 말을 곧잘 쓰는데요, 이런 말을 아이들한테 들려주거나 가르쳐야 할는지, 또는 어린이책이나 교과서에 이런 말을 넣어야 할는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나누다’라는 낱말이 있고, ‘가르다’라는 낱말이 있어요. 생각을 살찌우는 바탕말을 쓸 노릇이요, 이러면서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다스려야지 싶어요.


  그런데 ‘나누다·가르다’도 한국말사전 말풀이는 엉터리예요. 돌림풀이가 되거든요. 아이들이 ‘나누다·가르다’가 어떤 뜻인지 제대로 알아보려고 한국말사전을 들추다가 이런 돌림풀이를 보면 어떤 마음이 될까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남기거나 보여주는 말살림일까요?


  가장 쉬운 말이 외려 가장 어렵게 풀이되고 마는 한국말사전이에요. 가장 수수한 말을 되레 가장 엉터리로 다루고 마는 한국말사전이고요. 이런 얼거리라면 어른이나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말을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물려주기란 참 팍팍하거나 메마르거나 고단하거나 어지러운 노릇입니다.


  가장 쉬운 말부터 참말 가장 쉽게 다루면서 슬기롭게 쓰도록 이끌 노릇입니다. 가장 수수한 말부터 참으로 가장 수수하면서 사랑스레 갈고닦아서 빛내도록 북돋울 노릇이에요.


  봄은 봄입니다. 예부터 시골 흙지기는 ‘봄맞이꽃’을 살폈고 ‘봄나물’을 했습니다. 한자를 쓰던 이들은 ‘立春大吉’ 같은 글씨를 붓으로 척척 써서 붙였습니다. 자, 이 ‘봄맞이글’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해요. 봄이 되어 기쁜 기운이 찾아들기를 바란다면 “기쁜 봄” 같은 글씨를 쓸 수 있어요. “고운 봄”이나 “사랑 봄” 같은 글씨를 써도 돼요. “새봄 기쁨”이나 “기쁜 새봄” 같은 글씨도 재미있고 뜻있어요. “새로운 봄”이나 “해맑은 봄”이나 “따스한 봄” 같은 글씨도 재미나고 뜻깊고요.


  다 다른 고장에서 다 다른 사랑을 지펴서 다 다르면서 아름답게 ‘봄맞이글’을 써 볼 수 있기를 빕니다. 또는 ‘봄글’을 써 보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봄노래’를 지어서 불러 볼 만합니다. “고운 봄빛”이랑 “너른 봄내”랑 “향긋한 봄”이랑 ‘봄이야기’랑 ‘봄바람’이랑 ‘봄꽃잔치’랑 ‘봄나물밥’을 두루 헤아리는 하루입니다. 2017.3.18.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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