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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알고 있다 - 물속에 사는 우리 사촌들의 사생활
조너선 밸컴 지음, 양병찬 옮김 / 에이도스 / 2017년 2월
평점 :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87
물고기를 좋아해서 안 먹는 사람이 있어요
― 물고기는 알고 있다
조너선 밸컴 글
양병찬 옮김
에이도스 펴냄, 2017.2.27. 2만 원
물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고기를 안 좋아하기 때문에 안 먹는 사람이 있고, 물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안 먹는다’고 한다면 얼핏 ‘머리가 돈 사람’이 아닌가 하고 여길는지 모르겠네요. 물고기는 그냥 ‘고기’일 뿐인데 왜 고기를 안 먹느냐고들 하거든요.
우리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여러 목숨한테 ‘고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를테면 닭고기라든지 돼지고기라든지 소고기라는 이름을 붙여요. 개한테도 개고기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말고기라든지 토끼고기라든지 고래고기 같은 말도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는 살짝 아리송하다고 할 만해요. 닭이나 돼지나 소는 고기이기 앞서 ‘닭·돼지·소’ 같은 이름이 먼저 있습니다. 이와 달리 물고기한테는 그냥 ‘물+고기’라는 이름이에요.
물고기는 모래알과는 달리 살아 있는 존재인데, 이것은 결코 사소한 차이가 아니다. 물고기들을 ‘의식을 가진 개체’로 이해할 때, 우리는 물고기와의 관계를 새로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10쪽)
물고기들도 손가락을 만들 수 있는 준비가 갖춰져 있지만, 그 대신 지느러미를 진화시켰다. 왜냐고? 물속에서 수영하는 데는 지느러미가 손가락보다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32쪽)
조너선 밸컴 님이 쓴 《물고기는 알고 있다》(에이도스,2017)를 읽으면서 ‘물고기’를 새삼스레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서는 민물이나 바닷물에 깃든 목숨을 가리키며 으레 ‘물고기(민물고기·바닷물고기)’라고 뭉뚱그립니다. 틀림없이 펄떡펄떡 뛰는 목숨이고, 사람처럼 피가 흐르는 목숨입니다만, 그냥 ‘고기’로 바라봅니다.
가만히 살피면 꼭 ‘고기’라는 이름만 쓰지 않습니다. 개구리를 놓고 ‘물뭍짐승’이라고도 해요. 물과 뭍에서 살 수 있대서 ‘물뭍짐승’입니다. 곧 뭍에서 산다면 뭍짐승이요 물에서 산다면 물짐승이라 할 만합니다. 바다에서 사는 수많은 목숨을 이러한 결로 수수하게 마주하자면 ‘고기’가 아닌 ‘물짐승’이나 ‘물목숨’처럼 이름을 바꾸어서 헤아릴 수 있어야 하지 싶어요. 바다나 냇물에 사는 목숨은 그저 ‘사람 먹이’일 뿐은 아닐 테니까요.
물고기들은 다양한 음향기구를 갖고서 진정한 교향곡을 만들어내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타악기 부문이 압권이다 … 청각이 민감한 물고기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수중 소음에 취약하다. 예컨대, 해양 석유탐사에 사용되는 에어건에서 나오는 고강도 저주파 소리는 물고기의 내부 청각기관 내벽을 둘러싼 미세한 유모세포를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 있다. (58, 61쪽)
물고기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은 최근까지도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논의들은 이른바 보상시스템의 생리학에 국한되어 왔다. (129쪽)
《물고기는 알고 있다》라는 책은 물목숨도 사람하고 똑같이 아픔을 느끼고, 기쁨이나 슬픔을 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목숨한테는 사람 같은 손이나 손가락은 없지만, 손이나 손가락이 있다면 물에서 헤엄을 치기에 대단히 나쁘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밖에서는 손이나 손가락이 있어서 좋겠지만, 물속에서는 지느러미가 있어서 좋다지요.
물목숨은 눈이 매우 밝을 뿐 아니라 뛰어나다고 합니다. 물목숨은 스스로 온갖 소리를 내거나 노래를 부른다고 해요. 물목숨은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 맞추어 매우 뛰어난 머리가 있고, 무리를 짓는 삶(사회생활)이라든지 뒷목숨한테 남기는 이야기(문화유산)가 있다고 해요.
이 책이 다루는 ‘물목숨 사회생활과 문화유산’ 이야기를 읽다가 ‘도시에서 갈 곳을 잃은 비둘기’가 떠오릅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비둘기가 그만 닭둘기라는 슬픈 이름을 얻고 맙니다. 지난날 한때 무슨 행사를 벌일 적마다 비둘기를 한꺼번에 풀어서 날리는 일을 곧잘 했는데요, 사람이 주는 모이만 받아먹던 비둘기는 갑작스레 풀려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는지 하나도 모른다지요. 사람이 주는 모이에 길든 비둘기로서는 처음부터 닭둘기가 될밖에 없는 셈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숲이나 들에서 살지 못한 채 태어난 비둘기로서는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요? 이처럼 바다가 망가지거나 갯벌이 사라지는 바다에서 물목숨은 어떻게 살아남을 만할까요? 수많은 배가 바다를 가르고, 수많은 고기잡이배가 그물로 바다를 훑으며, 잠수함이라든지 핵실험(바다에서 하는 핵실험)이나 석유캐기 따위로 바다 터전이 송두리째 망가질 적에 물목숨은 어떻게 무엇을 할 만할까요?
물고기들은 유연하고 호기심이 많은데, 그 이유는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새로운 사고를 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160쪽)
인간에 의해 붕괴된 문화는 복구될 수 없다. 문화란 유전자에 코딩되는 게 아니어서, 일단 상실하고 나면 문화정보를 다시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개체수를 다시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집단기억을 이미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227쪽)
사람은 다른 목숨 아닌 바로 사람을 보아도 여러모로 알 수 있습니다. 커다란 댐을 짓는다면서 집이며 마을을 통째로 하루아침에 빼앗기는 사람은 ‘살아갈 기운’을 잃기 일쑤입니다. 돌아갈 집이나 마을이 없는 사람한테 ‘살아갈 기쁨’은 되찾기 어려워요.
도시에서도 이른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오래된 마을을 하루아침에 밀어 없애는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나고 자란 마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나고 자란 마을에서 아이를 낳고 살다가 이 마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야 한다면, 이 마을에 이야기를 묻고 사랑을 묻으며 살림을 묻은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삶을 어떻게’ 지을 만할까요.
한국에서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하는 사내’도 이 같은 어리둥절을 겪습니다. 이태 안팎 군대에 갇힌 채 사회와 동떨어져 지내고 나면,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뒤에 꽤 오랫동안 ‘사회에 몸을 맞추느라(적응하느라)’ 힘겹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리둥절을 물목숨은 늘 겪는다고 해요. 사람은 아주 가볍게 바다를 개발합니다. 바다에 쓰레기를 매우 쉽게 버리고, 바닷가에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가 숱하게 있어요. 공장도 바닷가에 많습니다. 수백만 수천만 수억만 해를 고이 잇던 바다 삶터가 하루아침에 바뀔 적에 이 바다에 깃들던 물목숨은 그야말로 얼마나 어리둥절할까요. 4대강 막삽질 때문에 냇물이 끔찍하도록 뒤틀렸는데, 이 냇물에서 살던 물목숨은 또 얼마나 그악스레 어리둥절할까요.
인간의 입맛에 맞는 물고기는 육식어류이므로 물고기 양식업자들은 육식어류를 키우며, 육식어류의 먹이로는 그보다 작은 야생 물고기가 사용된다. (294쪽)
바닷새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주낙에 주렁주렁 매달린 낚싯바늘과 트롤어선의 끝줄은 매년 10만 마리에 달하는 알바트로스와 바다제비의 목숨을 앗아간다. (304쪽)
물고기를 좋아해서 안 먹는다고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 하고 헤아려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다를 가없이 사랑한다는 ‘실비아 얼’이라는 과학자는 바다를 살피고 아끼는 길을 온삶을 바쳐서 걷는 동안 ‘이 사랑스러운 물목숨을 그저 고기로 삼아서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합니다.
누구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저 똑같은 고기로 여길 수 있습니다. 누구는 개도 소도 돼지도 그저 똑같이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누구는 물목숨을 저마다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여길 수 있고, 풀포기와 꽃송이와 나무도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여길 수 있어요.
바람이 부는 소리가 노래로구나 하고 들을 수 있으면 바람을 이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물목숨이 바다나 냇물을 가르는 힘찬 몸짓에서 기쁨과 웃음을 읽을 수 있으면 물목숨을 이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하고 따사로이 어깨동무할 수 있는 바탕을 ‘그저 옆집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이 어떤 마음인가’ 하고 곰곰이 되새기거나 헤아리기 때문이지 싶어요.
바다에 이웃이 있습니다. 들에 이웃이 있고, 숲에 이웃이 있습니다. 우리 보금자리 둘레에 숱한 이웃이 있습니다. 사람도 이웃이며, 개구리하고 제비도 이웃입니다. 새도 물목숨도 모두 이웃입니다. 사랑스레 평화를 누리며 기쁨을 노래할 이웃입니다. 2017.4.10.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