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쉬르의 마지막 강의 - 제3차 일반언어학 강의(1910~1911)-에밀 콩스탕탱의 노트 현대사상의 모험 32
페르디낭 드 소쉬르 지음, 김성도 옮김 / 민음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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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안 적힌 ‘말·이름’을 배우고 가르친다

―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

 페르디낭 드 소쉬르 글

 에밀 콩스탕탱 노트

 김성도 옮김

 민음사 펴냄, 2017.2.17. 35000원



  소쉬르라는 분이 있습니다. 1857년에 태어나 1913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분이 쓴 책과 남긴 말은 오늘날 ‘말이라는 학문(언어학)’에 크게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학교에서 말을 가르치거나 배울 적에 이분 책을 으레 다루거나 읽는다고 합니다.


  소쉬르 님이 손수 남긴 글이 아닌, 소쉬르 님이 강의로 들려준 말을 에밀 콩스탕탱이라는 분이 낱낱이 받아적은 공책을 바탕으로 나온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민음사,2017)가 한국말로 나왔습니다. 오늘날이라면 녹음기로 쉽게 목소리를 담아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말로 풀어낼 테지요. 그렇지만 1910년대 언저리에는 손으로 아주 빠르게 받아적어야 비로소 ‘강의’를 책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정의하고, 자신의 영역 속에 존재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언어학의 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78쪽)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변이는 관찰자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다채로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 그 종족에게 언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 정신을 열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니라 다른 언어들과의 접촉인 것이다. (93, 94쪽)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는 여느 사람한테는 쉽게 다가서기 어려울 만한 책이라고 느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말로 가득합니다. 다만 이 ‘학문말’이란 ‘일본을 거쳐서 한국으로 들어온 일본 한자말’입니다. 아직 한국은 한국말로 제대로 학문을 하는 틀이 서지 못해요. 한자말도 한국말이 아니냐고 묻는 분이 있습니다만, 한국말은 오직 한국말일 뿐입니다. 한자권에서 받아들이는 말도 있고, 영어권에서 받아들이는 말도 있으나, 사람들이 ‘말밑을 안 따지고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말’일 적에 비로소 한국말이에요.


  이를테면 ‘버스’라고 할 적에 ‘bus’를 떠올리면서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 ‘버스’는 영어가 아닌 한국말입니다. 영어는 ‘bus’예요. 한글로 적는 ‘동해’를 보면 어떤 것을 떠올릴 만할까요? 아마 거의 모두 ‘동쪽 바다’를 떠올리겠지요. 그래서 ‘동쪽 바다’를 뜻하는 ‘동해’는 그냥 한국말입니다. 그러면 ‘凍害’나 ‘童孩’나 ‘銅海’는? 이 세 가지 한자말은 한글로 적으면 도무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한자를 밝혀도 못 알아들을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凍害’나 ‘童孩’나 ‘銅海’는 한국말사전에 실렸어도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국말인 척하는 한자말, 곧 ‘외국말’입니다.



예컨대 mejo/medzo는 지리적 차이이다. 사람들은 결코 mejo에서 medzo로 이동했던 것이 아니며, 또는 그 반대로 medzo에서 mejo로 이동한 것도 아니다. (108쪽)


공식 사전들은 이 같은 문어를 위해 만들어진다. 학교에서는 책에 근거하여, 그리고 책의 세계 속에서 교육을 한다. 문자로 적힌 단어라는 관념에는 정확한 단어라는 관념이 결속된다. (137쪽)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를 읽으면, 소쉬르 님은 서양말을 바탕으로 ‘이 지구에서 말이 흘러온 자취’를 살핍니다. 아시아 쪽 말을 다룰 적에 아쉽게도 한국말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까지 건드리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빼어난 학자라 하더라도 아시아 세 나라 말을 모두 다루기는 벅찰 수 있겠지요.


  서양말을 바탕으로 ‘말이 흘러온 자취’를 다루는 이 책을 살피다 보면, 소쉬르 같은 분조차 ‘말이 흘러온 자취’는 ‘종이로 남은 글’이나 ‘책으로 남은 글’을 좇을 수밖에 없다는 대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에서건 ‘책’에 적힌 낱말일 적에 “단어라는 관념에는 정확한 단어”로 여긴다고 하는 대목을 엿볼 만해요.



모든 문법 교과서들은 문자 표기에서 출발하며, 발화자의 발음에서 존재하는 실제적 가치를 우리에게 제시하기에는 매우 불충분하다. 사람들은 g가 특정 방식으로 발음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151쪽)


통속적인 방언들을 알고 싶기는 하나 현실적으로 중세 시기의 문헌들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없는데, 사람들이 민간 방언을 문자로 옮기지 않갔기 때문이다. (248쪽)



  고장말이나 시골말(통속적인 방언이나 민간 방언)은 책으로 배우거나 알 수 없다고 해요. 한국에서도 이와 같지요. 한국에서 ‘남은 옛책’은 거의 조선이나 고려 적 책인데, 거의 한자로 적힙니다. 한국말이 아닌 중국말로 적혀요. 아주 드물게 ‘훈민정음이 적힌 책’이 나옵니다만, 이 훈민정음으로 적힌 책조차 ‘여느 시골사람이 주고받던 말’이 아닌, 임금이나 신하나 사대부나 지식인지 주고받던 말일 뿐입니다.


  이러다 보니 한국이든 서양이든 ‘말이 흘러온 자취’를 넓거나 깊게 살필 수 없다고 해요. 이런 좁은 틀이지만, 이 좁은 틀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으려고 하는 학문이 언어학이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곱씹어 봅니다. 서울 표준말로 ‘부추’라고 일컫는 남새를 전라도에서는 ‘솔’이라 하고, 경상도에서는 ‘정국지’라고 해요. 세 낱말 ‘부추·솔·정구지’는 생김새도 소리도 달라요. 글잣수마저 다릅니다. 그렇지만 세 고장에서 이 말이 한꺼번에 태어났어요.


  한국에서 세 고장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보면서 그야말로 다 다르게 ‘생각을 길어올려’서 참으로 다른 낱말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부추가 먼저인지, 솔이 먼저인지, 정구지가 먼저인지 알 수 없어요. 또 알아야 할 까닭이 없을 수 있어요. 세 낱말은 그저 한꺼번에 다 다른 고장에서 나란히 태어나면서 한국말을 이루는 너른 바탕이라고 하는 대목을 엿볼 뿐입니다.



언어(랑그) 속에서 우리는 구체적 본질의 사실 즉, 대상을 갖는다. 이러한 기호들은 정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추상화 과정은 아니다. 언어(랑그)를 성립하는 사회적으로 비준된 연합들과 결합들의 총합은 두뇌 속에 자리하고 있다. (267쪽)


우리는 상태가 결코 의미들을 표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구성 항들의 계약에 따라서 스며 있거나 그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우연적 상태가 주어진 것이며 그 상태를 낚아챈 것이다. (327쪽)



  여느 삶자리에서 여느 사람들은 책에 안 적힌 ‘말·이름’을 배우고 가르칩니다. 학문이라는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책에 적힌 말이나 이름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여느 어머니가 여느 아이한테 물려주거나 가르치는 말하고 이름은 ‘책에 적힐 수도 있지만, 책에 적혔는지 안 적혔는지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문득문득 터뜨리는 말이나 이름도 ‘책에 적혔든 안 적혔든’ 그리고 ‘사전에 나오든 안 나오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스스로 저마다 생각을 말이라는 그릇(기호)에 담아내어 서로 주고받을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이 봄에 시골에서 ‘냉이’를 캡니다. 아니 냉이철은 이제 지나갔다고 해야겠지요. 냉이꽃이 하얗게 흐드러지는 삼월 끝자락이거든요. 그런데 이 냉이를 놓고 여러 말이 있어요. ‘냉이’라는 서울 표준말이 있습니다만, ‘나싱개·나숭개·나생이’가 있어요. 이밖에도 온갖 고장말이 있어요.


  저는 우리 아이들하고 냉이꽃을 보다가 문득 이렇게 말해 봅니다. “어머나 여기 ‘나싱개꽃’이 피었구나” 하고요. 이때 아이는 ‘오잉?’ 하는 아리송한 얼굴로 저를 쳐다봅니다. 저는 다시 “어머나 여기 ‘나숭개꽃’이 잔뜩 있네” 하고 말해요. 이때 아이는 ‘아잉?’ 하는 더욱 알쏭하다는 낯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말로 생각을 나누다 보면, 우리가 보거나 느끼는 것마다 이름을 새롭게 붙이다 보면, 또 이러한 말을 아이들한테 들려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생각을 북돋우다 보면 참으로 재미있고 즐거운 말살림이 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2017.3.24.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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