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어서, 그리운 것들 오롯하여라
박미경 지음 / 봄날의책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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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80



“바람이 세서 갯꽃 갯무 다 작고 파리도 작은데 이뻐”

― 섬, 멀어서 그리운 것들 오롯하여라

 박미경 글

 김영준·안홍범·이진우·이한구 사진

 봄날의책 펴냄, 2016.12.20. 13000원



  설을 맞이해서 시골로 찾아온 아이를 마을 어귀에서 만납니다. 우리 집 아이들하고 바깥마실을 가는 길에 스치듯이 만납니다. 아이들은 서로 어디에 사느냐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묻는데, ‘서울에서 고흥에 왔다’고 하는 아이가 문득 “서울에서는 자동차 매연 때문에 숨막혀서 못 살아.” 하고 말합니다. ‘고흥에 사는 아이’는 서울 아이가 말하는 ‘자동차 매연’을 잘 모릅니다. 서울에 거의 간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요.


  설이 지나가면 서울 아이는 서울로 돌아갑니다. 그 아이 어버이는 고흥에서 나고 자랐어도 아이를 서울에서 낳았으니 아이는 ‘서울 아이’입니다. 어머니랑 아버지를 따라서 고흥이라는 시골에 오기는 했으나 아이가 늘 지내는 터전은 서울이에요. 설이나 한가위에 고흥이라는 고장에 오면서 서울 아이는 ‘자동차 매연이 없는 데가 한국에 있구나!’ 하고 느꼈구나 싶어요. 이밖에 또 무엇을 더 느끼거나 생각했는지 궁금하지만, 아이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할머니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갑니다.



“다 어릴 적부터 봐온 분들이라 모두가 아짐이고 아재지요. 제가 맘씨가 좋아서가 아니라, 섬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누구라도 그렇게 한다니까요.” (41쪽)


“먼저 피난 내려온 손위 시누가 살기 좋다고 해서 비금도 섬엘 들어갔는데, 여자들이 낭구하고 디딜방아 찧고 밥하고, 남자들은 ‘그냥’이야 그냥. 우리 영감이 일이라도 할라치면, ‘저기 피난민에 남자가 낭구하네.’ 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거야. 그래 살 수가 있어야지.” (93쪽)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을 이끄는 박미경 님이 글을 쓰고, 김영준·안홍범·이진우·이한구 님이 사진을 찍은 《섬, 멀어서 그리운 것들 오롯하여라》(봄날의책,2016)에 흐르는 섬 이야기를 읽습니다. 《섬》이라는 책은 “멀어서 그리운 것들 오롯하여라”라는 이름으로 섬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엮습니다. 섬은 뭍에서 멀고, 뭍은 섬에서 멀다고 합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채 그리워하는 사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꽃게를 잡으면 한 틀에서 30가마가 잡혀 올라오기도 했어요. 뗏마가 무게를 못 이겨 침몰된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물 서른 틀을 놓아도 3가마다 잡힐까 말까 해요. 꽃게만 바라보고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요.” (122쪽)



  섬이든 뭍이든 모두 사람이 사는 땅입니다. 가만히 보면 뭍이라고 해도 지구에서 뭍은 30퍼센트 즈음이고 바다는 70퍼센트 즈음입니다. 너른 땅덩이라고 하더라도 바다에 넓게 둘러싸여요. 어느 모로 보면 ‘뭍’이라고 하는 땅덩이는 ‘커다란 섬’일 수 있어요. 뭍이나 섬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지만 우리는 어디에서나 물(바다)에 둘러싸운 터전에서 삶을 짓는다고 할 만해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어디에 터를 내리면서 살림을 일군다고 하더라도 ‘물(바다)하고 함께 있는’ 살림이라 할 수 있어요. 밥을 하거나 국을 끓일 적에 물이 꼭 있어야 하고, 빨래를 할 적에 물이 꼭 있어야 합니다. 씻을 적에도 물이 꼭 있어야 해요.


  사람 곁을 둘러싼 풀하고 나무한테도 물이 꼭 있어야 해요. 물이 있기에 삶자리를 가꿀 수 있어요. 물이 있으니 숲을 이룰 수 있어요. 물이 있어 집을 짓고 마을을 닦으면서 이곳에 곱고 푸른 숲이 펼쳐져요. 뭍에서든 섬에서든 물을 찾고, 숲을 살피며, 보금자리를 보듬어요.



“여기가 고향이니까, 밤에 누워 있으면 이맘때 산 속 어디어디에 뭐가 있고 뭐가 나는지 훤히 보여. 어느 돌 밑에 뱀이 있는가 없는가, 무슨 나물이 지금은 얼마큼 자랐는가 하고 말여.” (134쪽)


“가을에 와요, 고구마 캐고 그럴 때. 그때 와야 푸지지. 아직은 섬이 줄 것이 없어.” (180쪽)



  《섬》에 나오는 섬사람은 뭍손을 바라보면서 살가이 말을 겁니다. 뭍에서 섬을 찾아든 뭍사람은 섬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아로새깁니다. 섬사람은 뭍사람한테 뭔가 건네고 싶은데 섬살림이 아직 푸지지 않은 철에 찾아온 뭍손한테 안타깝다는 마음을 내비칩니다. 뭍손은 섬지기한테서 아무것도 안 받아도 푸진 마음인데, 빈손으로 내비치는 살가운 숨결을 헤아리면서 다시금 이야기 한 자락을 아로새깁니다.


  푸진 가을에 섬에 찾아들면 줄 것이 많다는 섬입니다. 그런데 섬뿐 아니라 여느 뭍에서도 푸진 가을에는 길손이나 이웃한테 내어줄 것이 많을 테지요. 바람이 센 겨울에는 섬도 뭍도 춥습니다. 따스한 봄에는 섬도 뭍도 따스합니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섬도 물도 하얗습니다. 잎이 지는 철에는 섬에도 뭍에도 나무마다 잎을 떨구어요.



해녀였던 어머니의 유품인 낡은 구덕 밑바닥에 나일론 줄을 덧대면서 “이거 다 되면, 나도 다 될끼다.” 한다. 얼기설기 엉킨 줄과 손등이 서로 닮아 애달프다. (187쪽)


“섬에서는 놀고는 못 살아요. 갑갑해서. 뭐라도 일을 해야지요.” “그렇게 움직이고 부지런히 일하면 뭐든 얻어요.” “생각해 보면, 굴업도는 하늘이 주신 선물 같은 섬이에요.” (203쪽)



  뭍하고 섬 사이에 다리가 놓이며 섬이 더는 섬 같지 않은 곳이 늘어납니다. 섬에서 뭍까지 다리가 놓이면서 조용한 섬마을을 찾아드는 도시내기 뭍손이 늘어납니다. 이러면서 섬에서 나고 자라 그예 섬에 뿌리를 내릴 만하던 이들이 빠르게 뭍으로 빠져나갑니다.


  섬에서 뭍으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많되, 뭍에서 섬으로 깃드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시골에서 도시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많되, 도시에서 시골로 깃드는 사람은 무척 적어요.


  오늘날 한국에서 섬이나 시골에는 어린이하고 젊은이 모습이 자취를 감춥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섬이나 시골에는 늙은 할머니하고 할아버지가 부쩍 늘어납니다. 섬에서 고기를 낚거나 갯것을 캐거나 따는 손길은 차츰 나이를 먹습니다. 어리거나 젊은 도시는 차츰 부피를 키웁니다. 섬에서 내려온 이야기는 앞으로 하나둘 스러지리라 봅니다. 시골에서 흘러온 살림은 앞으로 천천히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섬은 바람이 세서, 갯꽃, 갯무 다 작고, 심지어 파리도 작아요. 그런데 이뻐, 생생하게 살아 있어.” (213쪽)



  바람이 센 탓에 꽃도 무도 파리도 작다는 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두 생생하게 이쁘다는 섬이라고 합니다. 집도 길도 자동차도 학교도 가게도 모두모두 커다란 도시에서는 어떤 모습일까요? 모두 커다란 도시에서는 무엇이 이쁘고 무엇이 생생한 숨결일까요?


  섬에 한 발짝 내민 뭍손은 섬을 그리면서 섬 이야기를 갈무리합니다. 섬에 사는 섬사람은 따로 글이나 사진이나 책으로 섬 이야기를 갈무리하지 않곤 합니다. 시골에 사는 시골할매 시골할배도 굳이 글이나 사진이나 책으로 시골 이야기를 갈무리하지는 않는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 땅에 아로새기면서 남길 씨앗은 무엇이 될까요. 우리가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이 땅과 이야기는 무엇이 될 적에 아름답거나 싱그럽거나 사랑스러울까요. 경제성장율을 물려주면 아이들이 좋아할까요? 전쟁무기를 물려주면 아이들이 기뻐할까요? 더 큰 자동차하고 고속도로를 물려주면 아이들이 반길까요? 핵발전소와 시멘트 문명을 남기면 아이들이 좋아할까요?


  투박한 섬지기 할매 손에서 흐르는 이야기가 《섬》에 가만히 깃듭니다. 수수한 섬지기 할배 눈에서 흐르는 이야기가 《섬》에 고즈넉하게 내려앉습니다. 2017.1.30.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 이 글에 붙이는 사진은 봄날의책 출판사에서 고맙게 보내 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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