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 - 황명걸 시선집
황명걸 지음, 구중서.신경림 엮음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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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2



철없던 젊은 날 되새기는 여든 할아버지 시인

―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

 황명걸 글

 구중서·신경림 엮음

 창비 펴냄, 2016.12.26. 12000원



  1935년 평양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 뒤에 서울로 와서 살아온 황명걸 님은 여든 고개를 넘습니다. 1970년대에 자유언론운동을 하다가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었다는 이녁 발자취를 더듬으니, 여든 고개가 참 아득하면서도 빠르게 흘렀구나 싶습니다.


  이제 눈처럼 센 머리를 인 할아버지 시인입니다. 하루하루 그야말로 새로운 기쁨으로 맞이하는 삶이라고 할 만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하루를 더 살 수 있다는 고마움을 누립니다. 저녁에 잠이 들면서 앞으로 떠나갈 이 땅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 함께한다는 것 / 끝까지 간다는 것 / 목숨 다하도록 더불어 산다는 것 (우리는)


작고 비열한 사내 / 나를 두고 이름이나 / 그를 사랑할 계집이 없지만 / 침만 뱉기엔 불쌍한 구석도 없지 않아 / 그 사람, 나 아니면 누가 돌보랴 (자기애)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창비,2016)는 황명걸 님이 그동안 써낸 시집에서 대표작을 추린 뒤, 마지막 시집을 내고 나서 새로 쓴 시를 끝에 덧붙입니다. 여든 고개를 걸어가는 터라 이렇게 ‘옛 노래’를 하나하나 더듬으면서 애틋하게 돌아보시는구나 싶습니다. 이러면서도 아직 새롭게 일굴 노래가 있다는 마음을 그려내는구나 싶습니다.


  스물도 서른도 마흔도 쉰도 아닌, 여든 언저리에 써 내는 노래에는 그동안 황명걸 님 스스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되새김질이 흐릅니다. 되새김질마다 아쉬움과 뉘우침이 묻어납니다. 되새김질에는 부끄러움과 멋쩍음이 감돌아요. 그리고 도시를 떠나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지내는 하루가 여든 언저리 노래마다 조곤조곤 돋아납니다.



진달래, 애기똥풀, 붓꽃 / 엉겅퀴, 까치수염, 부처꽃 / 쑥부쟁이, 여뀌, 감국 / 이렇게 철 따라 벗하며 / 봄 여름 가을을 보냈다 (길)


뒷골목의 / 쓰레기통을 뒤지는 / 길고양이 / 배가 불렀다, 그래서 / 아름답다 (나의 미학―길고양이)



  황명걸 님은 ‘철들기’ 앞서 뭇 가시내를 놀려대는 말을 일삼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황명걸 님 스스로 “작고 비열한 사내”였다고 털어놓습니다. 늘그막에 시골자락에서 뭇꽃을 길마다 가득 만나면서 마음이 바뀐다고 합니다.


  젊을 적에는 이 뭇꽃을 미처 못 알아보았을 수 있어요. 젊을 적에는 다른 것을 보느라 바빠서 황명걸 님 둘레에 이렇게 작고 수수하면서 아름다운 꽃이 철 따라 피고 지는 줄 제대로 못 알아챘을 수 있어요.


  할아버지가 되고서 꽃을 비로소 봅니다. 허연 할아버지 한 분은 길고양이가 배가 부른 모습을 알아봅니다. 배가 부른 길고양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름답다” 하고 말하는 모습이 됩니다.



젊은 시절 철들기 전 나는 / 다리가 굵은 처자에 대고 무다리라고 놀려댔다 / 허리가 없는 아낙을 보고는 도라무통이라고 이죽거렸다 / 아랫배가 나온 과수더러는 똥배라고 하대했다 / 젖통이 큰 아주머니 등 뒤에서는 미련퉁이라고 빈정댔다 (허튼소리)



  흰머리 할아버지 시인은 함께 늙는 다른 할아버지 시인하고 술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하루가 고맙습니다. 후배가 주머니에 슬쩍 찔러 준 돈으로 오랜 술동무한테 술 한 잔 사 주면서 웃음꽃을 짓습니다. 수다를 한보따리 풀어놓고, 사회가 아름답게 거듭나기를 빌며, 바야흐로 이 땅을 조용히 떠날 마지막 날을 다소곳이 그립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 오면 / 나 떠나리, 이 산하 어드메에 / 쇠잔한 몸 추슬러 외양 단정히 매만지고 / 명아주 단장에 의지해 / 희고 가는 머리카락 날리며 (새날)



  명아주 지팡이를 짚는 할아버지 시인은 흰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고요히 마지막 숨을 쉬고 싶다고 밝힙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에 가만히 잠들고 싶다는 마지막 꿈을 이야기합니다. 남들을 미련퉁이라고 빈정대던 철없던 젊은 시인은 이제 스스로 미련퉁이였다는 대목을 깨닫고는 제철에 제자리를 찾아 깃들려는 차분한 마음이 됩니다.


  황명걸 님한테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는 마지막 시집이 될까요? 앞으로 조금 더 기운을 내어 시골노래 삶노래 사랑노래를 몇 가락 더 읊조리면서 이 겨울을 날 수 있을까요? 봄을 한 철 더 누리면서 새롭게 깨어날 나라를 지켜볼 수 있을까요?


  흰눈 같은 마음을 시에서 읽습니다. 흰꽃 같은 노래를 시로 만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을 이웃하고 나누는 손길이 따사롭구나 하는 이야기를 시로 마주합니다. 2017.1.16.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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