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가 새라고? - 고선윤의 일본 이야기
고선윤 지음, 박태희 그림 / 안목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76



벚꽃은 일본에서 ‘나라꽃’ 아닌 ‘겨레꽃’

― 토끼가 새라고??

 고선윤 글

 박태희 사진

 안목 펴냄, 2016.9.5. 25000원



  일본은 한국하고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는데, 어느 모로는 멀면서 가까운 나라이기도 합니다. 두 나라가 놓인 땅이 그리 멀지 않으니 가깝다 할 수 있지만, 쓰는 말이 다르고 삶이나 살림이 퍽 달라요. 거꾸로 보면, 쓰는 말이 다르고 삶이나 살림이 퍽 다르지만 여러모로 맞물리거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어우러지는 대목이 있기도 해요.


  어떤 눈길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뭇 달라진다고 할 만해요. ‘가깝지만 멀다’고 바라볼 수 있고, ‘멀지만 가깝다’고 바라볼 수 있어요. 가까운 역사에서 쓰라린 생채기를 우리한테 주었다고 바라볼 수 있고, 조금 먼 역사에서 한국이 일본을 곧잘 ‘정벌’했다거나 문화를 일본에 ‘퍼뜨렸다’고 바라볼 수 있어요. 이 대목도 거꾸로 보면 오늘날에는 ‘일본에서 만든 물건’이 없이는 사진을 못 찍는다고 할 만하거나, 사회 구석구석 일본 것이 안 깃든 데가 없다고 할 만하지요.



어릴 적 대구 외갓집 안방 아랫목에는 항상 이불이 깔려 있었다. 차가운 손발을 쏙 집어넣고 몸을 녹이다 잠이 들기도 했다. 이모들이 교복을 입은 채 이불 속에서 속닥속닥 나누는 이야기는 마냥 부러운 숙녀들의 세계였다. 늦게 퇴근하시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묻어둔 밥을 잘못해서 차기라도 하면, 몰래 이불 속을 빠져나와 딴청을 부렸다. (12쪽)



  고선윤 님이 글을 쓰고 박태희 님이 사진을 넣은 《토끼가 새라고??》(안목,2016)를 읽으면서 두 나라 문화나 삶이나 살림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요즈막에는 한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젊은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는 고선윤 님입니다. 어린 날은 일본에서 보냈고, 대학교는 한국에서 다녔고, 이래저래 한국하고 일본 사이를 넘나드는 동안 찬찬히 자라면서 어른이 되었고, 아이를 낳았고 살림을 꾸렸고 책을 옮긴다고 해요. 이제는 한국에 뿌리를 내렸다고 합니다.



일본인의 벚꽃 사랑이 메이지 이후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긴 역사를 가진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할 무렵 꽃을 피우니 곡물의 신이 머무는 나무라고 신성화했으며 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하는 지표로 삼기도 했다. (18쪽)


일본에는 전국에 약 30만 종류의 성씨가 있다. 우리나라에 약 250종류, 중국에 약 3500종류의 성씨가 있는 것이 비해 엄청난 숫자다. 학교 다닐 때 한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는 있어도 같은 성을 가진 친구는 없었다. (123쪽)



  일본에서는 벚나무를 우러르고 벚꽃잔치를 흐드러지도록 즐깁니다. 벚꽃은 일본에서 나라꽃으로 삼지 않았습니다만, 일본 겨레한테는 ‘겨레꽃’이라고 할 만큼 무척 가까우며 살가운 꽃입니다.


  그런데 벚꽃은 일본에서뿐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무척 흐드러지고 고우며 사랑스럽습니다. 일본이 벚나무를 섬기거나 좋아하기에 한국이나 중국에서 벚나무를 싫어하거나 미워해야 할 까닭은 없어요. 나무는 그저 나무일 뿐이요, 더욱이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벚꽃은 매화꽃과 나란히 ‘새봄에 흙을 일굴 때’를 가만히 고운 꽃내음으로 밝혀 주는 몫을 해요.


  진달래나 찔레는 한국에서도 고운 꽃을 피우고, 일본에서도 곱게 꽃을 피웁니다. 제비나 두루미나 꾀꼬리는 한국이나 일본이라는 나라를 가리지 않으며, 남북녘이라고 하는 가시울타리를 살피지 않아요. 그저 따스한 바람을 타고 온누리를 두루 누비면서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헤아리기만 해요.



우리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일이다. 일본친구 C는 결혼 전이라 아이가 없었지만 우리 아이를 위해서 실내 놀이터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만나서 같이 움직이면서 지하철 표를 살 때 친구 C의 것도 같이 사려고 했더니 “우린 오래 친구이고 싶으니 각자 지불하자”는 말을 했다. 나는 오래오래 친구이고 싶어서 인색하게 각자내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32쪽)



  오랜 동무로 지내고 싶기에 한국사람은 ‘내가 다 낼게’ 하고 말한다면, 오랜 동무로 지내고 싶으니 일본사람은 ‘저마다 따로 내자’ 하고 말한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한국에서도 ‘우리는 오랜 동무로 지낼 사이인 만큼 저마다 따로 내자’는 살림새가 퍼질 만해요. ‘한턱’이라고 하는 문화는 일본에도 있지만, 한국도 차츰 ‘따로내기’ 문화가 자리를 잡아요.


  수많은 성씨가 있다는 일본이라는데, 곰곰이 따지면 한국에는 처음부터 딱히 성씨가 없어요. 정치권력자가 ‘중국한테서 받은’ 성씨가 드문드문 있다가 조선을 거치고 개화기 즈음 되면서 갑작스레 모든 사람한테 성씨가 생겼어요. 조선 무렵에도 성씨가 없는 사람이 아주 많았고, 고려 무렵에는 훨씬 많았을 뿐 아니라 정치권력자조차 성씨가 없기 일쑤였다고 해요.


  어느 모로 보면 한국은 성씨에 홀가분한 살림이었다가 그만 성씨에 갇힌 살림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성씨는 ‘누구나 스스로 새롭게 지을’ 수 있거든요. 일본이나 서양에서는 스스로 새로운 성씨를 짓곤 해요. 요즈음은 새로운 성씨를 짓는 사람이 드물다고 할 텐데, 예전에는 아주 쉽게 새로운 성씨를 지었어요. ‘어제와 다른 삶’을 바라고 ‘아이한테 새로운 삶’을 물려주려는 뜻으로 새 성씨를 지었다고 합니다.



서울의 모대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놀랍게도 기모노를 입은 학생이 있었다. 일본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재일교포라고 했다. 졸업식에 입기 위해서 일본에서 가지고 온 모양이다. 모두가 예쁘다고 한마디씩 건네고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한다 … 안타깝게도 나는 이날 한복을 입은 졸업생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나 역시 한복을 입고 갈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263쪽)



  오늘날 한국에서는 한복을 거의 안 입습니다. 명절에조차 안 입고, 대통령이나 공무원도 안 입습니다. 다들 양복을 입어요. ‘양복’은 말 그대로 ‘서양옷’이에요. 외국 손님을 맞이할 적에도 그냥 양복이고, 공무원뿐 아니라 회사원도 으레 양복이에요. 한복 아닌 양복을 입어야 ‘예의를 갖춘 옷차림’이라고 여기기까지 해요. 회사에 면접을 보려면 ‘양복을 한 벌 갖춰’야 한다고 여길 뿐, ‘한복을 새로 갖춰’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예 없다시피 하지요. 더욱이 한국에서는 한복을 갖춰 입으면 ‘아리송한 눈’으로 쳐다보기까지 합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 옷’을 입는데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한국말도 비슷한 대접이에요. 영어나 한자말을 잔뜩 집어넣은 말을 하면 똑똑해 보인다고 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요. 이와 달리 영어나 한자말을 한 마디도 안 쓰는 사람이 있으면 이때에도 ‘아리송한 눈’으로 바라보곤 해요. 피자나 햄버거를 안 먹는다고 할 적에도 ‘아리송한 눈’으로 바라볼 테지요? 한국은 틀림없이 한국이기는 하되 ‘한식·한복·한옥’ 모두 사라진, 이른바 한국 문화가 가뭇없이 사라진 나라일 수 있어요. 한국하고 이웃한 일본도 한국 못지않게 영어를 마구 씁니다만, 일본사람은 일본 옷을 즐겨입고 일본 밥도 즐겁게 먹어요. 또 일본에는 여느 일본 집이 곳곳에 많습니다. 한국은 오래된 한국 집(한옥)을 얼른 허물어 아파트나 빌라로 올리려고 애쓰지요.



(천황과 황실을 위한 황실비로) 약 180억 엔, 우리 돈으로 약 2000억 원에 가까운 돈이 필요하다. 천황을 비롯한 20명의 황실 사람들을 존재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엄청난 액수다. (176쪽)



  《토끼가 새라고??》라는 책은 한국·일본 두 나라 사이에 감도는 여느 살림과 삶을 수수하게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문화 비교’를 굳이 하지 않으면서 두 나라 사이에 흐르는 다르면서 비슷한 살림을 보여주고, 비슷한 듯하다가도 퍽 다른 살림을 보여줍니다. 두 갈래 말을 어릴 적부터 써야 했고, 두 갈래 살림을 어릴 적부터 받아들여야 했으며, 두 갈래 생각을 어릴 적부터 품어야 하던 사람으로서, 두 나라가 수수한 자리에서 평화로운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요.


  삶이나 살림이라는 문화는 나라와 나라 사이뿐 아니라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도 서로 다르면서 닮거나 맞물리면서 어우러지지 싶습니다. 고장과 고장 사이에서도, 서울과 도시 사이에서도 삶이나 살림은 서로 다르면서 비슷하게 얽히는 대목이 있어요. 두 나라나 두 마을이나 두 고장은 서로 가까우면서 먼 사이가 될 수 있고, 먼 듯하지만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어요. 정치나 사회나 역사로도 두 나라를 엿볼 수 있지만, 삶과 살림이라는 자리에서 수수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저 높은 자리가 아닌 바로 우리 곁에서 서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이야기랑 너희 이야기는 알뜰히 오가면서 살뜰히 만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2016.12.2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 이 글에 붙인 사진은 안목출판사에서 고맙게 보내 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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