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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
라오 핑루 글.그림, 남혜선 옮김 / 윌북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72
눈물 한 방울 남기고 떠난 예순 해 사랑지기
― 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
라오 핑루 글·그림
남혜선 옮김
윌북 펴냄, 2016.9.30. 14800원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하루를 함께 있거나 한 달을 같이 있어도 즐거우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샘솟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하루도 괴로울 테고 한 달이나 한 해쯤이라면 그야말로 고달프리라 생각해요.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예순 해를 함께 산다면? 예순 해라는 나날을 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따사로운 숨결로 지낼 수 있다면?
소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내가 부모님 밥을 퍼 드렸다. 가족들이 가르쳐 준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종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식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릇에 밥을 남겨서도 안 되고 밥알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26쪽)
교실에서 수업을 듣다 보면, 창밖으로 학교에서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며 노는 계집종 아이가 보였는데, 그렇게 즐거워 보이더라나. 부러워 죽겠는데 그렇다고 어쩔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업이 끝나면 둘이 같이 집에 갔다고 한다. (67쪽)
라오 핑루라는 할아버지는 《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윌북,2016)라는 책을 쓰고 그립니다. 이녁하고 예순 해를 하루처럼 한마음으로 살아온 곁님 ‘메이탕’하고 얽힌 삶과 살림과 사랑을 글하고 그림으로 함께 엮어서 책으로 남겨요.
이 책을 보면, 먼저 라오 핑루 할아버지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떤 어린 나날을 보냈는가 하는 대목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이야기를 붙입니다. 다음으로 이녁하고 예순 해를 함께 살아온 메이탕 할머니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떤 나날을 보내다가 서로 만났는가 하는 대목을 그림하고 글로 엮습니다.
라오 핑루 할아버지는 ‘사진을 안 찍었’어도 사진처럼 또렷하게 지난날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기에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고 해요. 사진으로 찍기는 했으나 모두 불태워야 했거나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사진에 앞서 마음에 깊이 남은 삶’이었기에 알뜰살뜰 그림으로 빚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내 오른쪽 아래로 열 걸음 근처에 엎드려 있던 4반 반장 리아수이가 포탄에 맞아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은 맑고 구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다시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푸른 산으로 가득했다. 난 포성 속에서 갑자기 곰곰이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여기가 내 무덤 자리가 될까? 파란 하늘에, 흰 구름, 무성하게 우거진 푸른 숲속에서 죽으니 그래도 의미는 있겠구나.’ (93쪽)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얼마나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난 화가가 아니라서 못 그리겠어!’ 하며 한발을 빼지는 않을까요. ‘사진으로 안 찍어 놨는데 어떻게 그림으로 그리니?’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지는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화가나 작가가 아니기에 그림이나 글을 못 그리거나 못 쓴다고 여길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화가가 아니어도, 또 사진으로 안 찍어 놓았어도, 누구나 우리 지난날을 그림으로 새롭게 그릴 만하지 싶어요. 바로 라오 핑루 할아버지가 《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라는 책으로 잘 보여주거든요.
그림을 배워야 그리는 그림이 아니요, 글을 익혀야 쓰는 글이 아니라고 해요. 예순 해를 한결같이 서로 사랑하던 마음을 차곡차곡 떠올리고 되짚기에 참말로 또렷하게 떠올라서 그릴 수 있고 쓸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해요.
내가 노동 개조를 받으러 떠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출판사 인삭과에서 아내를 찾아와서는 나와 ‘확실히 선을 그으라’고 권했다고 한다. 메이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메이탕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바람을 피웠으면 일찌감치 이혼했겠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도 아니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뭘 훔치고 마음대로 가져가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이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이혼을 해요?!” (236쪽)
어릴 적 어머니하고 아버지한테서 배운 살림을 오래도록 가슴에 담으면서 이녁 아이들한테 물려주었고, 이 살림을 고스란히 그림하고 글로 새로 엮는 라오 핑루 할아버지입니다. 일본군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살아난 이야기, 한 중국이 두 중국으로 갈리면서 ‘노동개조’를 받아야 하던 이야기, 스무 해가 넘는 노동개조가 드디어 끝나서 아이들하고 곁님 품으로 돌아가서 오붓하게 하루를 보내던 이야기, 그리고 곁님 메이탕이 마지막으로 눈물 한 방울 똑 흘리면서 조용히 숨을 거둔 이야기, 이렇게 숱한 이야기가 라오 핑루 할아버지 마음을 고이 적시면서 《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라는 책에 흐릅니다.
메이탕이 떠났다. 평온한 모습이었다. 아들, 딸들은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을 서성거렸다. 유일하게 줄곧 옆에 있었던 순쩡이 알려주었다. 메이탕이 정확히 오후 4시 23분에 떠나갔노라고. 젊어 연애할 적에 둘 다 먹고살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때 메이탕이 내게 말했었다. 둘이서 조용한 시골로 들어가 땅뙈기 하나 마련해 무명옷 입고 푸성귀 먹으며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286쪽)
작은 땅뙈기를 일구면서 무명옷을 손수 지어 입고, 푸성귀를 손수 길러 먹으며, 그야말로 수수하게 짓는 살림이란 참으로 조용하리라 생각합니다. 서울(중국이라면 베이징)에 굳이 가서 살아야 하지 않고, 드높은 이름을 날려야 하지 않으며, 어마어마한 돈을 모아야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라오 핑루 할아버지하고 메이탕 할머니 마음자리에는 서로 아낄 줄 알고 서로 헤아릴 줄 알며 서로 어루만질 줄 아는 사랑이면 넉넉하다고 해요. 하루를 살든 예순 해를 살든 언제나 따사롭고 넉넉한 사랑으로 살림을 지을 수 있으면 된다지요.
웃음 한 번 지으며 하루가 즐겁습니다. 눈물 한 방울 남기며 긴 삶을 고이 내려놓습니다. 웃음 한 번 짓기에 사랑스러운 살림을 짓는 기운이 납니다. 눈물 한 방울과 함께 기쁜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남기며 새로운 길을 나섭니다. 라오 핑루·메이탕 두 분이 예순 해를 사랑으로 지으며 살아온 나날은 이녁 아이들을 비롯해서 이 책을 읽는 우리들한테 아주 수수하면서 예쁜 이야기 씨앗을 심어 주리라 봅니다. 2016.11.13.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 그림(본문그림)은 윌북 출판사에서 보내 주었기에 이 글에 고맙게 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