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문예중앙시선 46
박지웅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시를 노래하는 말 263



‘빈 손가락’ 가득 사랑을 주고받아요

―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박지웅 글

 문예중앙 펴냄, 2016.10.1. 9000원



  시를 쓰는 박지웅 님은 세 권째 시집인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문예중앙,2016)를 선보이면서 이녁 마음자리에 오랫동안 꾹꾹 눌러 두던 이야기를 하나 드러냅니다. 책이름에 나오기도 한데, “빈 손가락” 이야기를 시로 써요.


  “빈 손가락”이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예요. “빈 손가락”이란 빈 손가락입니다. 빈 손가락이라면 주먹에 손가락이 비었다는 뜻일까요? 네, 시를 쓰는 박지웅 님은 어릴 적부터 한손은 손가락이 비었다고 해요.



눈밭에 찍힌 손바닥이 늑대 발자국이다 / 나는 발 빠르게 손을 감춘다 // 손가락이 없으면 주먹도 없다 주먹이 없으니 팔을 뻗을 이유가 없다 한 팔로 싸우고 한 팔로 울었다 한 팔로 사랑을 붙들었다 (늑대의 발을 가졌다)


엄마는 쥐구멍이었다 / 나 살다가 궁지에 몰리면 / 언제나 줄달음치는 곳 (우리 엄마)



  손가락이 빈 손으로 눈밭에 찍은 자국을 보고 누가 “늑대 발자국”이라 말했을까요? “늑대 발자국”이라는 소리를 들은 박지웅 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런 말을 읊은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빈 손가락으로 찍든 “찬 손가락”으로 찍든 모두 “사람 자국”입니다. 한 손가락이든 다섯 손가락이든 모두 “사람 손가락”이에요.


  손가락이 비어서 “주먹도 없다”고 하는 박지웅 님은 “주먹이 없으니 팔을 뻗을” 까닭이 없었다고 해요. 싸울 까닭도 싸울 수도 없는 셈입니다. 주먹을 쥐는 힘이 없으니 싸울 힘이 없고, 싸울 힘이 없으니 저절로 평화입니다. 빈 주먹은 남을 때리지도 않고, 나를 때리지도 않습니다. 빈 주먹은 아귀힘이 아닌 너른 팔로 이웃이나 동무를 따스히 껴안는 손길이 됩니다.



어디선가 벌써 망가져 온 청년이 잔을 깨뜨리지만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는다 / 우리 모두 매번 놓치지 않았는가, 사랑을 / 한때 내 눈동자의 상속녀가 되고 싶다던 여자 / 여자가 떠난 뒤, 나는 꺾인 신발처럼 누구의 발에도 쉽게 허락되었다 (꿈에 단골집 하나 있다)



  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에 실린 〈꿈에 단골집 하나 있다〉를 읽다가 문득 내 어린 날을 떠올립니다.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는다”는 말마디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면서 내 어린 날을 조용히 되새깁니다.


  나는 혀가 짧은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혀가 짧은 몸으로 태어났기에 어릴 적부터 뭔 말만 했다 하면 말소리가 새거나 겹쳤어요. 마치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말마디끼리 감기기 일쑤였어요. 때로는 어버버 하고 말을 더듬기도 했어요.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 말’을 하려 하지만, 막상 내 입에서는 ‘저런 말’이 튀어나오거나 혀가 꼬여서 말을 더듬습니다.


  어린 날, 동무들하고 즐겁게 노는 자리에서 동무들이 조잘조잘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나도 한마디를 보태고 싶어서 입을 열어 혀를 놀립니다. 그러나, 아차차! 나는 혀짤배기 소리를 내면서 말을 더듬었고, 문득 둘레가 조용합니다. 동무들은 내가 혀짤배기인 줄 뻔히 압니다. 아마 텔레비전 같은 곳에서 익살꾼이 나와서 일부러 말더듬이 흉내를 내어 웃기려 했으면 다들 웃었을 텐데, 저희하고 함께 노는 동무가 즐겁게 읊은 말이 그만 ‘텔레비전 익살꾼이 일부러 웃기려고 할 적에 나오는 듯한 말씨’가 되었어요. 웃길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닌데 말이에요.


  머릿속에서 굴리던 말하고 다른 말이 혀끝에서 터져나왔구나 하고 느끼면 언제나 얼굴이 붉어집니다. 더 말을 잇지 못합니다. 나 스스로 참 바보 같네 하고 생각하는데, 동무들은 아무도 웃지 않아요. 이러다가 누군가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하고 받아 주어요. 혀짤배기가 말을 더듬어도 따스히 품어 주었어요.



과자를 빼앗긴 아이가 울고 있다 그 옆에 술을 빼앗긴 어른이 울고 있다 그 옆에 장난감을 빼앗긴 막내가 울고 있다 그 옆에 한 달 만에 들어온 여자가 울고 있다 그 옆에 살이 숭숭 빠진 생선이 울고 있다 그 옆에 어떤 최후가 울고 있다 그 옆에 모든 옆이 와서 울고 있다 그 옆에 생글생글 눈 내리는 창가 그 옆에 밑 빠진 독처럼 앉은 하느님이 멀뚱멀뚱 하늘만 본다 (옆이 없다)



  “빈 손가락”으로 살아온 시인은 어떤 동무하고 이웃을 만났을까 하고 그려 봅니다. 손가락은 비록 ‘비었다’ 할지라도, 마음은 늘 넉넉하고 푸진 동무하고 이웃을 만나면서 오늘까지 살림을 지었으리라 하고 헤아려 봅니다. 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에 흐르는 마음은 빈 손가락으로 꿈을 꾸고 사랑을 노래하며 삶을 어루만지고 싶은 숨결이지 싶어요. 눈밭에 사람 자국을 찍고, 마음밭에 사랑 자국을 찍으며, 온누리에 자그마한 이야기 자국을 찍고 싶은 몸짓이지 싶어요.



나는 갈대밭에 애인을 세우고 / 카메라에 흑백필름을 장전하고 있었다 // 찰칵, / 실패를 누를 때마다 애인의 입술은 뻣뻣하게 굳었다 / 미소를 지적하자 애인은 피곤한 듯 일어서고 / 돌탑에 올린 불안한 돌처럼 입술이 떨어졌다 / 급히 주워 올렸으나 이미 삐뚤어져 있었다 (물금역 필름)


오래도록 첫 줄을 쓰지 못했다 / 첫 줄을 쓰지 못해 날려버린 시들이 / 말하자면, 사월 철쭉만큼 흔하다 (습작)



  갈대밭에 선 사랑님은 사진기를 바라봅니다. “빈 손가락” 시인은 빈 손가락으로도 즐겁게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그런데 자꾸 ‘실패’를 합니다. 갈대밭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아무래도 추운 바람이 부는 철이었을 테지요. 찬바람을 흠씬 맞으면서 ‘예쁘게 찍어 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하는 사랑님은 입술이 뻣뻣하게 굳었대요. 힘들기도 하고 춥기도 하겠지요.


  “빈 손가락” 시인으로서는 그야말로 멋진 사진을 찍어서 두고두고 건사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텐데, 시인하고 갈대밭 마실을 나온 사랑님은 다른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해요. 굳이 사진으로 안 찍어도 마음에 남는 삶이자 오늘이에요. 따로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오래오래 마음에 사랑이 흐를 수 있는 살림이자 오늘이에요.


  그날 그 갈대밭을 함께 거닐었던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남아요. 그날 그 갈대밭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이야기는 오래오래 이어져요.



땅은 어둠이란 걸 몰랐다 / 원래 땅에는 오로지 땅뿐이었다 // 속을 파내자 땅에 눈이 생겼다 / 땅이 비로소 어둠을 본 것이다 (터널)



  빈 손가락 가득 사랑을 받습니다. 빈 손가락 가득 사랑을 줍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내려앉습니다. 빈 손가락에 바람이 내려앉습니다. 빈 손가락에 햇볕이 내려앉고, 달빛이 내려앉으며, 별빛도 꽃빛도 웃음빛도 노래빛도 내려앉아요. 모든 고운 숨결이 빈 손가락에 내려앉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랑이 빈 손가락을 거쳐 흐릅니다. 마음으로 보고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는 사랑이 빈 손가락에 사뿐히 내려앉다가 훨훨 하늘을 날아 온누리로 퍼집니다.


  눈을 감으면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모습은 손가락 갯수가 아닌 마음밭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 따사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시 한 줄로 마음을 열고, 시 한 줄로 마음을 노래해요. 2016.11.3.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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