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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들다 ㅣ 애지시선 22
박두규 지음 / 애지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259
도시에서 살더라도 시골내음을 먹는다
― 숲에 들다
박두규 글
애지 펴냄, 2008.9.19. 8000원
시를 쓴다고 할 적에는 노래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듣거나 부를 노래를 쓴다기보다는, 마음으로 우러나서 사랑해 줄 노래를 쓰는 일이라고 할까요. 오늘 하루를 살아내면서 이 삶에서 기쁨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이끄는 노래를 쓰는 일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시를 읽는다고 할 적에는 노래를 읽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거나 모르거나 대수롭지 않은 노래를 읽는구나 싶어요. 오직 내 마음을 헤아리면서, 나 스스로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마음을 달래고 보듬고 사랑할 수 있는 기쁨을 되새기도록 북돋우는 노래를 읽는 일이지 싶습니다.
비로소 어머니가 입혀주신 배냇저고리를 벗고 싶었다 / 그대는 이렇게 늘 일상으로 건너오건만 / 나도 그렇게 그대의 일상으로 건너가고 있는지 / 매일 아침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놓치지는 않는지 / 내가 놓친 물고기 한 마리는 / 푸른 하늘을 헤엄쳐 그대에게 이를 수 있는지 (어디에서 왔나, 이 향기)
박두규 님이 빚은 시집 《숲에 들다》(애지,2008)를 읽습니다. 시집 이름처럼 숲에 드는 이야기가 잔잔하게 흐르는 시집입니다. 오늘 이곳에서는 시골이나 숲에서 살지 않으나, 늘 숲을 그리면서 숲마실을 다니거나 멧길을 오르면서 이녁 마음으로 젖어드는 숲 이야기를 차분하게 담는 시집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며 먹을거리를 돈을 치러서 사다 먹습니다. 곡식이나 열매도, 고기도 양념도, 국수나 빵도 무척 손쉽게 널리 온갖 것을 사다 먹을 수 있습니다. 도시를 보면 수많은 가게가 줄을 짓는데, 막상 그 가게에서 손수 키우거나 심어서 얻은 곡식이나 열매나 고기나 양념이나 국수나 빵을 팔지는 못합니다. 모든 먹을거리는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나요. 한국 시골이든 다른 나라 시골이든, 시골에서 땅을 갈고 흙을 만지며 숲바람을 쐬는 곳에서 태어나는 먹을거리예요.
그렇게 허물을 벗고 / 단 한 번의 해가 오로지 나에게로 올 것을 믿는다 / 나는 달이 뜨는 그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에 들다)
어느 바람 부는 날, 때죽나무 하얀 꽃그늘에 앉아 / 내 안에 가두었던 사람들도 훨훨 날려 보내고 / 그렇게 그리움의 허물도 벗고 / 숲의 적막을 나는 흰점나비 한 마리 따라가며 / 두려움도 없이 길을 잃어야 한다 (늘 숲을 걷고 있어야 한다)
시인 박두규 님은 숲이나 시골에서 살지 않으나 으레 숲이나 시골을 거니는 마음이 되어 시를 씁니다. 왜 굳이 도시에서 살며 숲을 노래하는 시를 쓰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봅니다. 이러다가 문득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시에서 산다 하더라도, 높직한 아파트에서 산다 하더라도,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 밥은 숲이나 시골에서 태어나요. 도시에 살더라도 누구나 ‘숲을 먹’고 ‘시골을 먹’어요.
게다가 물 한 모금도 숲이나 시골에서 비롯하지요. 상수도를 놓고 수돗물을 튼다고 하더라도 숲이나 시골에서 흐르는 물을 댐에 가두어서 마셔요. 페트병에 담긴 샘물은 깊은 두메나 바다에서 길어올린 맑은 물이에요. 도시 한복판에 돼지우리나 소우리가 있지 않아요. 모두 시골에 있는 돼지우리나 소우리예요.
이러다 보니, 우리는 시골에서 살아도 시골내음을 먹고 도시에서 살아도 시골내음을 먹어요. 저절로 숲이나 시골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고, 저절로 숲이나 시골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겠구나 싶어요.
가을을 맞이하는 이파리들 / 그 마음들은 어떨까 / 어떤 색으로든 / 자신의 색깔을 결정지어야 하고 / 이제는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을 (이 가을에)
하지만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 우리도 이젠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가 되어 / 새벽안개에 젖은 시인의 취한 목소리도 /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잠자리에 들어와 눕는다 (시인의 전화)
가을에 나락이 노랗게 익습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누렇게 물듭니다. 가을 열매가 빨갛게 익습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빨갛게 물듭니다. 노랗게도 빨갛게도 익는 숨결이고, 노랗게도 빨갛게도 물드는 숲입니다. 봄이랑 여름에 받은 햇볕은 풀잎과 나뭇잎을 짙푸르게 물들이더니, 가을에 이르면 햇볕은 풀잎과 나뭇잎이 노랗거나 붉게 물들도록 바꾸어 주어요.
사람도 가을에는 노란 마음이나 붉은 마음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사람도 가을에는 노란 열매나 붉은 열매처럼 마음 가득 넉넉하거나 사랑스러운 꿈을 채울 수 있을까요?
《숲에 들다》를 빚은 박두규 님은 ‘이제 이 가을에 저마다 내 빛깔을 골라서 선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이제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가 된 이녁 모습을 되새기면서 이녁 스스로뿐 아니라 이웃도 한결 따사롭고 너그러이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 만하다고 노래해요.
그동안 10원이라도 더 싼 주유소 찾아다니느라 고생했다 / 대여섯 장의 카드에 포인트 적립하느라 수고했다 / 여기저기 눈치 보며 발맞추어 사느라 애썼다 / 하지만 사월도 비 개인 눈부신 날에 / 더는 견딜 수 없어 그대를 떠난다 (도시 하야식)
비바람에 풀이 눕습니다. 삽차가 밟아 풀이 죽습니다. 그러나 풀씨는 이 땅에 고요히 깃들어 새롭게 깨어날 때를 기다립니다. 어느 한때 비바람은 풀을 눕혀서 풀잎은 땅바닥을 기듯이 겨우 목숨을 잇다가 숨을 거두기도 하지만, 또 삽차가 밟고 뒤엎어서 풀은 뿌리가 뽑혀 죽기도 하지만, 풀포기가 내놓은 아주 자그마한 풀씨는 땅속에 깃든 채 오래도록 잠을 자요. 다시 깨어나서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고 햇볕을 먹을 나날을 꿈꾸어요.
도시에서 살더라도 시골내음을 먹기에 언제나 시골내음 같은 마음을 일으킬 수 있지 싶습니다. 도시에서 살더라도 숲에서 비롯한 물과 바람을 마시기에 늘 숲내음 같은 넋으로 기운을 낼 만하지 싶습니다.
몸이 비록 숲에 들지 않더라도 마음은 늘 숲에 들 수 있습니다. 몸은 비록 갇힌 자리에 있더라도 마음은 늘 홀가분한 숨결로 춤출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스스로 즐겁게 지으려는 마음으로 시 한 줄을 쓰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스스로 기쁘게 가꾸려는 마음으로 시 한 줄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가을에 가을내음을 머금으면서 맺은 씨앗은 겨울을 나고 다시 봄이 찾아오면 기지개를 활짝 켜고 일어날 수 있겠지요. 잘 여문 씨앗 하나를 가슴에 품으며 시집 한 권 읽습니다. 2016.10.8.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