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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지은 집 ㅣ 애지시선 33
권정우 지음 / 애지 / 2010년 10월
평점 :
시를 노래하는 말 250
아이하고 별을 볼 수 있는 살림
― 허공에 지은 집
권정우 글
애지 펴냄, 2010.10.29. 9000원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면서 시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라 한다면, 시는 누구나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 아니라 한다면,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으나 우리 스스로 시를 안 쓰기 때문입니다.
문학 강의를 들어야 시를 쓸 수 있지 않습니다.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와야 시를 쓸 수 있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만 마쳐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문예지에 시를 실어야 시인이 되지 않습니다. 문학상을 받아야 시인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참으로 누구나 시인입니다.
열매가 익으면서 / 꽃향기를 그대로 기억해 내듯이 / 딸아이도 점점 / 내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 (푸른 기억)
목련 꽃잎 만지던 손으로 //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 아이에게서 향기가 난다 (지는 봄에)
권정우 님이 쓴 시집 《허공에 지은 집》(애지,2010)을 읽습니다. 책 안쪽에는 권정우 님이 이녁 딸아이하고 함께 찍은 사진이 실립니다. 이 시집에는 곳곳에 딸아이하고 맺은 살림 이야기가 흐릅니다. 딸아이한테서 배우는 삶을 시로 쓰기도 하고, 딸아이한테서 엿보는 어머니 모습을 시로 쓰기도 하며, 딸아이한테 가르치거나 물려주고 싶은 살림 이야기를 시로 쓰기도 해요.
벚꽃이 피기만을 / 손꼽아 기다리는 동안 // 개나리가 / 언제 피었는지도 모른 채 / 지고 있다 (개나리)
봄은 // 두엄에게도 // 풀잎 더미로 // 새 옷을 지어 입히는구나 (가르치기 8)
나는 우리 집에서 우리 아이들하고 별을 함께 바라봅니다. 밤에는 별을 함께 바라보고, 낮에는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함께 바라봅니다. 우리 집 나무하고 풀을 함께 바라보고, 우리 집 옥수수를 함께 따서 함께 먹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면서 우리는 누구나 교사이기도 합니다. 시인이라는 이름이 있어야 쓰는 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있을 적에 시인이듯이, 교사 자격증이 있어야 교사가 아니라, 아이하고 함께 살림을 짓는 슬기로운 넋으로 삶을 가르칠 수 있다면 교사이지 싶어요.
먼 옛날부터 모든 어버이가 교사였어요. 어버이요 교사였지요. 또 먼 옛날부터 수수한 모든 어버이가 시인이었어요. 모든 수수한 어버이는 아이한테 말을 물려주고 가르쳤거든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가르치는 말은 ‘학습 도구’나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에요. 어버이 스스로 살림을 지으면서 쓰는 말입니다. 살림을 짓는 동안 삶으로 익힌 말이에요.
우물을 들여다보면 / 땅 밑에도 하늘이 있어 / 구름이 흐러가고 / 별들이 반짝였다 (대보름 달을 보며)
시집 《허공에 지은 집》을 쓴 권정우 님은 어버이요 교사이면서 시인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일까요? 아이한테 물려주거나 가르치고 싶은 이야기를 시로 쓰는 사람은 ‘어버이’와 ‘교사’와 ‘시인’이라는 이름에다가 또 어떤 이름을 얻을 만할까요? 아마 ‘꿈님(꿈꾸는 사람)’하고 ‘사랑님(사랑을 나누는 사람)’ 같은 이름을 얻을 만하겠지요? 언제나 꿈을 가르치고, 늘 사랑으로 한솥밥을 먹을 테니까요. 언제나 꿈을 노래하고, 늘 사랑으로 말을 물려줄 테니까요.
밤마다 흐드러지는 별을 바라봅니다. 여름이 저물면서 가을로 접어드는 새롭고 높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구름결이 다르고 바람맛이 다릅니다. 가을철에는 개구리 노랫소리가 없이 풀벌레 노랫소리만 있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가슴으로 느끼는 살림이 철 따라 고요히 달라지면서 흐릅니다. 나는 이 새로운 철을 기쁘게 마주하면서 시 한 줄을 쓰려 합니다. 기쁘게 쓰는 시 한 줄을 아이들하고 나누려 합니다. 어버이요 교사요 시인인 우리들 누구나 오늘 살림을 시 한 줄로 지어서 아이하고 나눌 수 있겠지요. 수수하면서 즐거운 노래를, 투박하면서 재미난 노래를, 조촐하면서 사랑스러운 노래를, 글 한 줄과 말 한 마디로 부를 수 있겠지요. 2016.8.3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