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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정원
조병준 글.사진 / 샨티 / 2016년 6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261
‘바람이 달다’는 할아버지처럼 늙는 기쁨
― 기쁨의 정원
조병준 글·사진
샨티 펴냄, 2016.6.30. 17000원
아침부터 마당이 살짝 부산합니다. 마루문을 거쳐서 마당을 가만히 내다봅니다. 마당에 우람하게 선 후박나무가 흔들립니다. 이러면서 여러 가지 소리가 울립니다. 후박잎이 몇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이윽고 푸드득 소리가 나면서 날갯짓하는 새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후박나무에 후박꽃이 지고 후박알이 맺을 즈음 멧새는 우리 집 마당을 한결 자주 찾아듭니다. 아니, 아침저녁으로 거의 나무에서 산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이런 데에도 나비 애벌레는 새 부리에서 용케 벗어나서 깨어나곤 합니다. 새한테는 살점이 통통하게 오른 애벌레도 맛날 테지만, 후박나무 열매도 맛있으니, 후박알을 훑느라 애벌레를 놓칠 수 있어요.
후박알을 훑는 새는 저를 내가 나무 밑에 서서 빤히 쳐다보는 줄도 모르는 채 열매 훑기에 바쁩니다. 나뭇가지 맨 아래쪽까지 내려와서 열매를 훑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 저도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뒤늦게 놀랐는지 푸득푸득 더 바삐 날갯짓을 하면서 우듬지 쪽으로 올라갑니다.
엄마의 옥상 텃밭에 먹을거리 채소만 초대받았던 건 아니다. 초여름이 되면 빨간 나리꽃도 피었고, 여름이 깊어지면 연보랏빛 비비추도 꽃대를 올렸다. 그리고 엄마의 텃밭에선 쑥갓도 꽃을 피웠다. (25쪽)
이름 모를 잡초는 사진을 찍으면서, 그 오래된 인연의 얼굴을 한 번도 찍지 않았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익숙한 피사체의 함정.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50년 동안 익숙했던 그 얼굴을 처음으로 내 카메라에 담았다. 내 엄마의 얼굴이 들어 있는 규석이 아줌마의 얼굴을. (95쪽)
조병준 님이 빚은 이야기책 《기쁨의 정원》(샨티,2016)을 읽습니다. 이 책은 조병준 님이 쉰 줄 나이를 넘어서면서 털어놓는 이야기책입니다. 그동안 ‘멋모르’고 살았노라 하는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동안 ‘멋부리’며 살았구나 하는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옛말에 업은 아기를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했고, 파랑새는 마당에 있는데 엉뚱한 데에서 찾는다 했어요. 조병준 님은 조병준 님 스스로 찾던 기쁨은 언제나 조병준 님 삶자리에 있었는데, 이제껏 이를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고 《기쁨의 정원》이라는 책에서 털어놓습니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로 여행을 가서 그 먼 나라 이웃을 사진으로 찍을 줄 알았어도,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텃밭을 돌보면서 남새랑 들꽃을 사진으로 찍을 줄 알았어도, 막상 쉰 해 동안 이웃으로 지낸 이웃 아주머니를 사진으로 찍을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고 수수하게 털어놓습니다.
내 막내삼촌도 ‘아이스께끼’ 통 메고 다니며 팔았다. 내 막내여동생도 오빠가 군대 간 사이에 엄마와 함께 시장통 노점상에서 파 한 단을 팔았다. 50년 전에, 35년 전에,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았다. (254쪽)
왜 좋으세요? 할아버지의 답이 조금 길어졌다. 통역이 할아버지의 답을 전했다. “시미엔은 바람이 달아.” 통역자에게 되물었다. 정말 저 할아버지가 바람이 달다고 하셨어? 네, 바람이 달대요. (263쪽)
먼길을 달려야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다. 지구 끝까지 샅샅이 훑어야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다. 멋진 모습은 먼 데에도 있지만, 우리 곁에도 늘 있어요. 아름다운 모습은 지구 끝에도 있을 테지만, 우리 둘레에도 언제나 있어요.
남이 키운 꽃밭만 이쁘지 않아요. 내가 돌보는 텃밭도 이쁩니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들꽃만 곱지 않아요. 우리 텃밭에서 함께 자라는 크고작은 들꽃도 고와요.
여행길에서 마주하는 이웃만 사랑스럽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도 사랑스럽고, 우리 집에서 늘 한솥밥을 먹는 모든 살붙이도 사랑스럽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간추려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을 ‘즐거운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있으리라 봅니다. ‘기쁜 이야기’는 남들한테서 얻는다기보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길어올릴 만하다고 봅니다.
이 지구에 순수한 원시 종족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미디어는 광고를 팔아먹기 위해 순수니 원시니 하는 거짓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리고 나도 그런 거짓말에 동참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라는 핑계를 대면서. (271쪽)
조병준 님은 《기쁨의 정원》이라는 책에서 이녁이 지난날 저질렀던 잘잘못을 꾸밈없이 털어놓기도 합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핑계를 스스로 둘러치면서 스스로 복사기처럼 글장사를 했다고 털어놓아요. 이제 이렇게 이 책에서 이녁 발자국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새 길을 곰곰이 되새긴다고 합니다. 작은 텃밭에서 싱그러이 숨쉬는 꽃내음을 노래하자고, 작은 꽃밭에서 해맑게 춤추는 꽃물결을 어루만지자고, 작은 보금자리에서 퍼지는 숲빛을 사랑하자고 다짐합니다.
손수 밥을 짓고, 손수 살림을 지어요. 손수 흙을 짓고, 손수 이야기를 지어요. 손수 노래를 짓고, 손수 글이나 사진을 지어요. 손수 웃음을 짓고, 손수 눈물을 지어요. 기쁨도 슬픔도 늘 우리 마음속에서 흐릅니다. 남새도 들꽃도 늘 우리 밭자락에서 올망졸망 올라오면서 바람 따라 한들한들 춤사위를 베풉니다.
어느덧 쉰 줄을 넘는 조병준 님은 곧 예순 줄을 넘을 테고, 일흔 줄이나 여든 줄도 넘을 테지요. 머잖아 조병준 님도 이녁이 어느 고요한 나라를 여행할 적에 만난 할아버지가 들려준 “바람이 달아” 하는 말마디를 이녁 삶에서 녹아든 목소리로 넌지시 이웃한테 들려줄 테지요. 골목 한켠에서 조용히 골목밭을 일구어 골목꽃을 피우는 숨결로 천천히 늙는 ‘조병준 할아버지’ 모습을 그려 봅니다. 2016.7.20.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