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로 간 책들 - 진중문고의 탄생
몰리 굽틸 매닝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58



군대에서 책보다 값어치 있는 것은 없었다

― 전쟁터로 간 책들

 몰리 굽틸 매닝 글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6.6.25. 15000원



  미국이 독일하고 일본과 전쟁을 치르던 1940년대에 책 한 권이 전쟁터 군인한테 어떤 구실을 했는가를 살핀 《전쟁터로 간 책들》(책과함께,2016)을 읽습니다. 이 책을 쓴 몰리 굽틸 매닝 님은 그무렵 벌어진 전쟁과 얽힌 자료를 꼼꼼이 다루면서 ‘진중문고’ 이야기를 씁니다.


  1940년대 미국 군부대에서는 처음에 ‘승리도서’를 모았다고 합니다. 전쟁터에 있는 군인이 마음을 쉬거나 달래도록 도울 만한 책을 ‘민간 기부’라는 틀로 그러모아서 보내 주었다고 해요. 수만 권도 수십만 권도 아닌 수백만 권을 모아서 전쟁터로 책을 보냈다는데, 한국 역사를 헤아린다면 꿈만 같은 숫자이자 이야기로구나 싶습니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는 1940년대 첫무렵에 ‘사람들한테 책을 읽히자’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아직 어렵기도 하지요. 그때에는 식민지살이를 하며 ‘말’마저 빼앗겼으니까요.



동유럽에서 로젠베르크 부대는 무려 375개의 문서 보관소, 402개의 박물관, 531개의 연구소, 957개의 도서관을 불태워버렸다. 나치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서는 모든 책의 절반, 러시아에서는 5500만 권의 책을 불태운 것으로 추정된다. (33쪽)


책은 치료 효과를 발휘하여 병사들이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과 비극을 더 잘 견디게 해 주었다. 육군의 정신과 의사들은 책이 병사들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불안과 긴장으로부터 위로를 준다고 동의했다. (77쪽)



  독일은 1930∼40년대에 이웃 여러 나라로 쳐들어가면서 그 나라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그야말로 아작을 내었다고 합니다. 독일이 내세우는 제국주의하고 어긋나는 생각을 다룬 책은 샅샅이 캐내어 불살랐다지요. 책을 불사르면 사람들을 ‘독일주의’로 이끌 수 있다고 여겼구나 싶어요. 책을 없애고 학교에서 제국주의를 가르치면 사람들을 모두 바보로 길들일 수 있다고 여긴 몸짓이라고 느낍니다.


  미국은 독일하고 맞서는 전쟁을 치르면서 거꾸로 ‘새로운 책을 엄청나게 찍으려’ 했답니다. 다만, 전쟁을 치르면서 자원을 모조리 전쟁에 쏟아붓느라 나라마다 ‘책을 찍을 종이나 천’가 모자랐다고 해요. 이때에 ‘새로운 페이퍼백’을 생각해 냈고, 아주 적은 돈과 종이를 써서 아주 많은 책을 찍는 길을 새롭게 열었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주머니에 담배를 가득 챙기고 초코바를 한 움큼씩 집어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물건은 뭐니 뭐니 해도 진중문고였다 … 마침내 상륙함에 타게 되었을 때 자신의 배낭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깨달은 군인들은 부두 근처에 불필요한 물건들을 내버리고 휴대물품을 가볍게 했다. 이렇게 버려진 물건들이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쌓였지만, 그 지역을 청소한 군인들은 그 물건들의 무더기들 사이에서 “진중문고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147쪽)



  《전쟁터로 간 책들》 끝자락을 보면, 전쟁 끝무렵 연합군한테 포로가 된 독일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독일군 포로는 수용소에서 ‘미국에서 찍은 영어로 된 진중문고’를 읽으면서 시름을 달래기도 했답니다. 전쟁터에 나간 미국 군인한테 둘도 없는 벗이 된 책일 뿐 아니라, 연합군한테도, 또 독일군한테마저 ‘책’은 더없이 살가운 벗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전쟁터 군인들이 얼마나 이 책(진중문고)을 아꼈는가 하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벌일 적에도 다른 물품은 버리더라도 책은 거의 안 버리더라고 합니다. 가까스로 바닷가에 닿아 포격을 겨우 벗어나기는 했으나 몸이 다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군인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그 자리에서 책을 읽었다고 해요. 병원으로 실려가서 수술을 받을 적에도, 수술을 받고 아픈 몸을 달랠 적에도, 책은 늘 군인 곁에서 가장 가까운 벗으로 있어 주었다고 합니다.



일부 군인들은 영어로 된 책이나 낯익은 잡지를 보고 큰 위로를 받았으며 그리하여 이후 평생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167∼168쪽)


“도서관에 진중문고 한 상자가 들어오자 수병들은 초콜릿 상자를 받은 아이들처럼 좋아하며 책을 집어들기 시작하더군요. 진중문고는 바다를 항해하던 많은 나날 동안 수병들을 행복하고 즐겁게 했습니다.” 또 다른 수병은 이런 글을 남겼다. “입대한 이후 저는 진중문고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177쪽)



  오늘날 한국 군대는 어떠한지 잘 모릅니다. 나는 내가 군대에 있을 무렵을 떠올려 보기로 합니다. 나는 1990년대에 군대에 있을 적에 한 달에 한 번씩 ‘책 태우기’를 했습니다. 군대에서는 흔히 ‘관물 검사’를 하는데, 이때에 웬만한 책은 거의 ‘불온도서’ 딱지를 받습니다. 이런 책을 쓰레기하고 함께 태우도록 시켜요.


  책은 그냥 태우면 잘 타지 않으니 북북 찢어서 태워야 합니다. 옆에서 중대장은 책을 제대로 찢어서 제대로 태우는가를 지켜봅니다. 등에 따가운 눈길을 받으면서 책을 찢어서 태우다가도 중대장이 자리를 비우면 잿더미에 몇 가지 책이나마 슬쩍 숨겨서 다 태운 척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잿더미에 묻은 뒤 밤에 몰래 내무반에 돌릴라 해도 중대장은 불쏘시개로 잿더미를 구석구석 뒤지기 일쑤라, 책을 제대로 안 태웠다고 한소리를 듣고 얼차려를 받곤 했습니다.


  책이란 읽지 말고, 책하고는 담을 쌓으며, 그저 위에서 시키는 짓만 하라는 한국 군대나 사회였다고 느낍니다.



이등병이 말했다. 고작 8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포탄이 “머리 위로 떨어질 수도 있지만, 상황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신 그는 “운명에 자신을 맡기고” 책장을 넘기면서 주변 환경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책에 빠진 그는 차분하게 그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190쪽)


“영국 친구들은 미국 군인들이 받는 대우에 놀라면서 자기 나라에 불만을 토로하더군요.” 많은 영국 군인은 왜 정부가 페이퍼백을 제공함으로써 영국군의 사기를 북돋우지 않는지를 의아해했다. (226쪽)



  전쟁터로 간 책들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꿈꾸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쟁터로 간 책들은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던 젊은이들한테 꿈을 꾸는 마음을 심어 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눈앞에서 삶과 죽음이 엇갈리더라도 책 한 권을 뒷주머니에 꽂으면서 다시금 기운을 차려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되새겼구나 하고 느껴요.


  참으로 큰 몫을 맡은 책이로구나 싶은데, 책이 이런 큰 몫을 맡는다면 전쟁터 아닌 여느 삶터에서도 똑같이 큰 몫을 맡을 만하리라 봅니다. 시름을 달래어 주고, 꿈을 지피도록 북돋우고, 사랑을 그리도록 이끌고, 생각을 새롭게 가꾸도록 돕는 책이니까 말이지요.


  어리석은 전쟁을 멈추고, 어리석은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으면서, 삶자리와 마을에 아름다운 꿈이 흐를 수 있기를 빕니다. 총을 들지 않고 책 한 권을 들 수 있기를, 철조망이나 탱크가 아니라 도서관을 세울 수 있기를, 군부대가 아니라 평화로우면서 사랑스러운 마을을 가꾸는 데에 힘을 쏟을 수 있기를 꿈꾸어 봅니다. 2016.7.8.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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