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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신기루 - 한자를 둘러싼 오해와 그 진실
이건범 지음 / 피어나 / 2016년 1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235
‘편지’를 가리키는 한자말이 221가지?
― 한자 신기루, 한자를 둘러싼 오해와 그 진실
이건범 글
피어나 펴냄, 2016.1.11. 15000원
한글문화연대 대표를 맡는 이건범 님은 《한자 신기루, 한자를 둘러싼 오해와 그 진실》(피어나,2016)이라는 책을 쓰면서 ‘한자 사교육’과 얽힌 ‘한자혼용 주장’을 하나하나 따지거나 짚으려고 합니다. 이 책은 ‘한자를 쓰지 말자’고 외치지 않습니다. 이 책은 ‘한자가 사라져야 한다’고도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를 둘러싼 엉뚱하거나 쓸모없는 한자말이 너무 많다는 대목을 차근차근 밝힙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에도 우리 학문과 지식과 사회제도의 거의 모든 용어가 일본이 만든 한자 용어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는 일인 데다가 일부 국어학자와 뜻 있는 지식인들 말고는 정부조차 일본식 한자어를 토박이말이나 우리 한자어로 바꿀 엄두를 내지 못했다. (29쪽)
우리말 ‘편지’에 대응하여 정재도 선생께서 국어사전에서 찾아낸 한자어는 합성어까지 포함하면 무려 221개나 된다. (39쪽)
‘편지’라는 낱말은 한자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便紙’로 적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한자 ‘便紙’를 모른다고 해서 ‘편지’라고 하는 “한글로 적은 말”을 못 알아듣거나 잘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에 ‘편지’를 가리키는 다른 한자말이 221 가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는 ‘간독·간찰·서간·서독·서소·서신·서장·서찰·서척·서한·서함·성문·신·신서·이소·찰한·척한·편저……’ 같은 한자말을 꼭 알아야 할까요? 이런 한자말은 한국말사전에서 다루어야 할까요? 한자말 ‘편지’가 있으면 한국말로 ‘글월’이 있어요. 한자말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우리가 쓸 만한 말을 알맞게 쓰고, 지난날 지식인이 한자 지식으로 지어서 쓴 수많은 한자말은 이제 찬찬히 털어낼 때에 아름답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자를 모르면 우리말 가운데 한자어 낱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한자 맹신자들의 논리는 오류다. 만일 이 주장이 참이라면, 문맹이 많은 중국에서는 어떻게 의사소통할 수 있겠는가? … ‘인문(人文)’이라는 한자어는 매우 쉬운 한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뜻을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드물다. 둘 다 한자 지식 이전에 그 낱말을 알고 있느냐 아니냐로 봐야 할 일이다. (102쪽)
‘애국’이라는 낱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 음이나 ‘愛國’이라는 글자 모양이 아니라 ‘사랑 + 나라’라는 한자의 뜻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건 내 주장이 아니라 앞서 소개했던 방송토론 상대의 말에서, 그리고 한자 맹신자들의 말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핵심 논리다. (105∼106쪽)
《한자 신기루》는 여러 가지 보기를 들면서 ‘한자를 알아야 말을 알지 않는다’는 대목을 밝히려 합니다. 우리는 ‘한자를 알기 때문에 한자말을 알지 않는다’는 대목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한자가 아닌 ‘말’을 알고 ‘뜻’을 생각하기 때문에 ‘말을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인문’이라는 한자말에서 ‘人’이나 ‘文’이라는 한자를 알기에 ‘인문’을 제대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학교’나 ‘전철’이 어떤 한자를 쓰거나 말거나 모르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전기’나 ‘자전거’가 어떤 한자를 쓰거나 말거나 모르더라도 우리는 어렵거나 힘들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더 많은 한자’가 아니라 할 만합니다. ‘한자 지식’을 많이 갖추어야 한자말을 잘 알지 않아요. 쓸데가 없는 수많은 한자말은 털어내고, 알맞게 쓸 만한 한자말을 즐겁게 쓸 수 있으면 된다고 느낍니다.
신문은 ‘신문’일 뿐 ‘新聞’이 아니어도 됩니다. 아니 ‘新聞’이라고 쓰는 사람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겠지요. 성탄절은 ‘성탄절’일 뿐 ‘聖誕節’이 아니어도 됩니다. 아니 ‘聖誕節’이라고 쓸 사람도 이제 찾아볼 수 없을 테지요.
“최고의 고려청자”는 그 고려청자가 가장 오래된 것인지 가장 좋은 것인지 누구도 구별할 수 없다. 단지 ‘한글만으로 썼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입말로 해도 가려낼 수 없다 … 말로도 분간할 수 없는 걸 한글로 써놓으면 당연히 분간할 수 없지 않겠는가? 즉, 동형어는 글에서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말에서도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다. (129쪽)
《한자 신기루》는 ‘입으로 말을 할 적에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한다고 밝힙니다. 이는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 글로 낱낱이 따져서 읽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글씨를 입으로 말한다면, 아무도 못 알아듣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입으로 말을 할 적에 누구나 알아듣는다’면, 이는 한자말이거나 영어이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컴퓨터나 버스는 그저 ‘컴퓨터’나 ‘버스’이지, 이를 영어라고 여길 일이란 없어요.
사실 어려운 한자어는 중·고교 수업에서 훨씬 많이 나오는데 왜 중·고교 한자 사교육은 없을까? 한자 교육 강화 주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중·고교 한문 수업을 강화하자는 이야기는 없고 오로지 초등학생만 잡으려고 들까? (208쪽)
중등 한문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의 지정 효과가 미미해지고 정규 과목인 한문 교과가 나날이 부실해지며, 교과서 한자병기도 시행되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중·고교 한문 교육을 개선하겠다는 내용은 단 한 가지도 제시하지 않았다. (210쪽)
한자 급수시험의 응시생 절반 이상이 초등학생이라고 한다. (215쪽)
곰곰이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어려운 한자말’은 중·고등학교에 더 많이 나올 뿐 아니라, 인문책이나 신문이나 방송에 훨씬 자주 나옵니다. 그렇지만 중·고등학생한테 ‘한자 교육 더 시켜야 한다’라든지 어른들한테 ‘한자 교육 더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일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초등학교 한자 교육’은 ‘한자 사교육’으로 장사를 하려는 속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볼모로 삼은 ‘한자 사교육 장사’ 바람이 대단히 드셉니다. 책방에는 ‘초등 대상 한자 부교재·학습서’가 엄청나게 많고, 이런 ‘초등 대상 한자 부교재·학습서’는 자꾸자꾸 새로 나와서 불티나게 팔려요.
한자병기 논쟁에서 사람들이 그동안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매우 뜻깊은 사실 하나가 확인되었다. 한자 맹신자들도 한글전용 덕분에 우리 사회에서 문맹이 사라졌다고 모두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255쪽)
문제는 이제 한글전용이 아니라 어려운 낱말들이다. 입말로 할 때 알아들을 수 없는 낱말이 섞여 있다면 글로 써놓아도 그 낱말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256쪽)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까닭을 슬기롭게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생각을 활짝 열고 마음을 새롭게 가꾸려는 뜻으로 말을 익히거나 글을 쓴다고 봅니다.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진작 바뀌어 이제 안 쓸 뿐 아니라, 일본조차 쓰지 않는 ‘한자(나라마다 한자가 모두 다릅니다)’는 조용히 내려놓고서 중국‘말’을 배우자고 외치는 일이 훨씬 나아 보인다고 느낍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를 무시무시한 사교육 수렁에 빠지게 하지 말고,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생각을 널리 열고 마음을 따사로이 가꾸도록 하는 데에 힘을 쏟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어려운 한자말’을 우리 어른들이 아직 털어내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초등 교과서 한자 혼용’이나 ‘한자 사교육’이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지식 사회에 퍼진 ‘어려운 한자말’을 어린이한테까지 가르치려 들지 말고, ‘쉽고 또렷하면서 고운 한국말’을 슬기롭게 살펴서 함께 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한자 신기루’를 말끔히 털어내고 ‘즐겁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말’을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6.6.6.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