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무명치마 창비아동문고 70
김종상 지음 / 창비 / 198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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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76



호박잎에 비 내리는 소리 듣는 시골집에서

― 어머니 무명치마

 김종상 글

 한연호 그림

 창작과비평사 펴냄, 1985.8.30. 7000원



  어제 우리 집 텃밭에서 콩꽃을 보았습니다. 언제 피려나 하고 날마다 수없이 들여다보았는데, 새벽에는 못 본 꽃이 낮에 살그마니 봉오리를 열었어요. 밥상을 차리고 나서 이래저래 집 안팎을 드나들며 몇 가지 일을 하다가 콩꽃을 보고는 한동안 바라보다가 부엌으로 돌아가서 밥상맡에 앉았지요. 먼저 밥을 먹는 아이들한테 “오늘 콩꽃 피었는데 보았니?” 하고 물었어요. 아이들은 아직 못 봤다면서,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던지고 콩꽃을 보러 가려 합니다. “밥 다 먹고 보렴. 서두르지 않아도 콩꽃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까.”



감자에 / 싹이 날 때면 / 돌도 / 꿈을 꾸어 볼 거야. / 파아란 싹이 나는 꿈을 (돌과 모래)


물은 / 나뭇가지로 기어올라 / 파란 잎과 예쁜 꽃을 / 피게 하고 // 사과 알을 굵게 한다. (물)



  고흥집에서 지낸 지 여섯 해째 되면 올해에 아이들은 무화과나무에 피는 꽃을 잘 알아봅니다. 여러 해째 우리 집 무화과나무를 살폈으니 ‘꽃이자 열매’가 이쁘장하게 맺는 무화과나무를 잘 알아보지요. 아이들은 무화과나무에 맺힌 꽃망울을 바라보며 참말로 날마다 물어요. “아버지, 무화과 언제 먹을 수 있어?” 그러면 나는 아이들한테 “너희가 나무한테 물어보렴. 그리고 날마다 지켜봐. 그러면 너희가 스스로 알 수 있어.” 하고 대꾸합니다.


  찔레꽃이 피고 들딸기가 익는 오뉴월에 아이들은 또 묻습니다. “감은 꽃이 언제 피어?” “언제 필까?” “몰라.” “그러면 날마다 감나무를 바라보렴. 아버지가 보기에는 곧 꽃망울이 벌어질 듯한데?” 엊그제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했는데, 어제 낮에 찔레나무 앞에 서서 찔레꽃 냄새를 한껏 들이켜다가 감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문득 놀라서 고개를 들으니, 아니 감꽃이 이렇게 조롱조롱 잔뜩 달렸네!



어른들은 / 날 보고 / 까분다지만, // 바람이 달려가는 / 들길 저 건너 // 모랫돌을 굴리는 / 냇물이 있고, // 밤 이슬이 자고 간 / 잔디 언덕엔 // 예쁜 꽃이 눈짓으로 / 불러 주는데, (나 혼자만 어떻게)


엄마가 김매시는 / 서숙밭 머리 // 도롱 삿갓 모아서 / 볕을 가리고, // 아기는 혼자 놀다 / 잠이 들었다. (여름)



  김종상 님 동시집 《어머니 무명치마》(창작과비평사,1985)를 읽어 봅니다. 퍽 묵은 동시집이라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이 동시집이 나올 즈음만 해도 ‘시골에 사는 아이’가 꽤 많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동시집이 나올 무렵만 해도 ‘무명치마’를 입는 분들이 퍽 계셨어요.


  시골아이가 제법 많고, 시골마다 크고작은 학교가 면소재지뿐 아니라 깊은 두멧자락에도 있던 무렵에 나온 동시집에는 크고작은 시골마을에서 올망졸망 밭일을 하고 들놀이를 하는 아이들 몸짓과 목소리가 흐릅니다. 참말로 요즈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할 만한 이야기와 노래가 흐릅니다.



수수깡 울타리 / 호박잎에 비 내리는 소리. // 들로 가신 어머니는 / 아직도 웬일일까? (기다림)


마을 앞 무논에 / 얼음은 덮여도 / 미나리는 야들야들 / 겨울을 살고, // 응달밭 이랑마다 / 서릿발이 할퀴어도 / 보리싹은 파릇파릇 / 겨울을 살고, (겨우살이)



  “감자에 싹이 날 때면” 꿈을 꾸어 보겠노라 하는 동시를 오늘날 아이들은 어느 만큼 헤아릴 만할까요? 가게에서 어머니가 장만한 감자라든지, 인터넷으로 시켜서 택배로 날아오는 상자에 담긴 감자는 쉽게 볼 아이들일 테지만, 감자싹이나 감자꽃이나 감자잎은 거의 볼 일이 없으리라 느껴요. 호박싹이나 호박꽃이나 호박잎도 거의 볼 일이 없을 테고요.


  그렇지만 오늘날 어른들도 깻잎은 고기에 맛나게 싸서 먹으면서도 정작 들깨 씨앗은 모르기 마련이요, 콩잎도 깻잎처럼 맛나게 먹는 줄 잘 모르곤 합니다. 들이나 밭에서 돋는 풀잎은 뜯고 뜯어도 새로 돋아서 봄내 여름내 가으내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줄 잘 모르기도 할 테고요.


  바야흐로 보리랑 밀이 익으면서 샛노란 물결을 이룰 들판을 아이들하고 걷다가 들딸기를 훑습니다. 자전거를 몰아 골짜기를 찾아가고 고갯길을 넘다가 다리를 쉬면서 들딸기를 새삼스레 따면서 동시를 가만히 생각합니다. 이제 시골에서 자라거나 노는 아이는 거의 다 사라졌기에 《어머니 무명치마》 같은 동시집은 읽힐 값어치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아직 시골에서 씩씩하거나 꿋꿋하거나 즐겁거나 재미나게 살림을 짓는 어른들이 도시 아이들한테 ‘얘들아, 너희들이 앞으로는 도시 아닌 시골에서도 얼마든지 새롭게 삶을 일굴 수 있단다’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를 새로 쓸 만한 뜻이 있다고 할 만할까요?



놀이터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 “내 신발이 더 좋다.” / “우리 학교가 더 크다.” / 싸움은 이래서 시작되고 / 내 것 네 것을 가려 따지면서 / 서로가 지지 않으려고 버틴다. (나의 것은)



  밥 한 그릇에서 평화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땅을 일구어 얻은 열매를 서로 나누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평화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밥그릇을 나누기에 평화요, 밥을 얻으려고 땅을 짓는 투박한 손길에서 평화가 태어난다고 할 만합니다.


  흙을 만지는 손길은 흙을 가꾸려 하기에 전쟁무기에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흙을 아끼는 눈길은 흙에 깃드는 풀이랑 꽃이랑 나무를 사랑하기에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마을살이를 꿈꾸리라 봅니다. 동시집 《어머니 무명치마》에 흐르는 차분한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이들이 개구리하고 동무가 되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이 새하고 곱게 노래하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이 풀벌레를 고이 보듬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이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다루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이 새파란 하늘을 마음에 가득 안고 싱그러운 마음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오늘 이 시골집에서 새롭게 꿈을 꾸는 아침을 맞이합니다. 2016.5.21.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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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6-05-21 15:54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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