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1
김일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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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2



나뭇가지 움트는 소리에 잠이 깨는 새벽

―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김일영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9.5.11. 8000원



  아홉 살 큰아이하고 마실을 다니다 보면 큰아이한테 궁금한 것이 잔뜩 있습니다. 아이는 언제나 아버지더러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예전에 이 아이한테 막바로 이것은 무엇이요 저것은 무엇이네 하고 말해 주었는데, 요새는 이렇게 하지 않아요. 다시 아이한테 묻지요. “이것은 무엇일까? 참말 저것은 무엇일까?” 아이가 먼저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하고서 이야기를 이끌지요.


  얼마 앞서 읍내로 마실을 다녀올 적에도 큰아이가 “아버지, 이 꽃은 무슨 꽃?” 하고 묻기에 “그래, 예쁜 꽃이네. 이 꽃은 무슨 꽃일까? 네가 한번 이름을 붙여 볼래?” 하고 되물었어요.


  이렇게 아이한테 되묻기를 하면서 내 어린 날을 돌아봅니다. 나도 어릴 적에 우리 아이들처럼 우리 어머니한테, 그러니까 아이들 할머니한테 끝없이 묻고 다시 물었어요. 어머니는 지치거나 귀찮지도 않으신지 꼬박꼬박 알려주셨지요. 그렇지만 나는 늘 잊어버리고는 다시 물어요. 우리 어머니는 아이가 물어도 늘 상냥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가끔 나한테 되묻기도 하셨어요. 이렇게 되물으면 움찔 하고 놀라면서도 ‘어라, 그러게. 참말 뭘까?’ 하는 수수께끼가 내 마음속에 생기곤 했어요.



나뭇가지 움트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합니까 / 누군가 웃고 간 듯 공기가 간지럽습니다 (벙어리별)


바다를 떠돌다 만난 나뭇잎들은 / 너무 깊이 젖어 있어 서로를 부를 수 없겠지 (안개 속의 풍경)



  김일영 님이 빚은 시집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실천문학사,2009)를 읽으면서 ‘삐비꽃’이 참말 뭘까 하고 궁금합니다. 이런 꽃이름을 들은 일이 없고, 아마 본 일도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꽃이름만 들은 일이 없이 삐비꽃을 스쳐 지나가듯이 보았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시집은 삐비꽃을 궁금해 하라는 시집은 아닙니다. 시인 김일영 님이 삐비꽃하고 얽힌 삶을 풀어낼 뿐 아니라, 삐비꽃처럼 김일영 님을 둘러싼 수많은 삶과 살림과 사람과 사랑을 두고서 ‘먼저 스스로(꽃이 피기 앞서)’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길어올린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집이라고 할 만합니다.



나뭇잎들 떨어지는 무게가 아프다 / 흑백 초상화가 지켜보는 / 사진틀 밖에서도 / 어머니는 늘 해녀였다 / 검은 고무옷이 / 속살보다 부끄러웠다는 / 당신의 부은 손등 위에 / 어린 손을 얹으며 / 나무들은 나이테 속에 / 봄을 숨긴 채 겨울을 건너왔다 (가을 숲 속에서)


노란 박스 테이프로 / 정성 들여 감겨진 지팡이 (지팡이)



  김일영 님은 문득 묻습니다. “나뭇가지 움트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하느냐고 묻습니다. 움찔 놀라다가 가만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어떻게 나뭇가지 움트는 소리를 듣느냐고 대꾸할 일이 없이, 나뭇가지 움트는 소리는 어떠한 결이나 가락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러면서 더 헤아리지요.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라든지, 꽃잎이나 나뭇잎이 벌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나비가 번데기를 열고 나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나비가 날개를 말리려고 팔랑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벌이 꽃가루를 찾아서 붕붕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매화꽃잎이나 모과꽃잎이 바람에 떨어져 나부끼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런 수많은 소리를 내 삶에서 나 스스로 얼마나 듣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나한테 들려주는 소리를 얼마나 귀여겨듣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바람소리나 빗소리뿐 아니라, 아이들 목소리와 곁님 웃음소리에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는 삶인가 하고 헤아립니다.



가지런히 늙은 고무신도 / 냇물에게 배운 말들도 두고 가야지 (얌전히 뜬 달도 깨끗이 씻어 걸고)


달빛 계곡 꿈을 꾸면 / 쪽배가 저보다 큰 텔레비전을 싣고 / 울 아버지, 하얗게 빛나는 이빨 앞장세워 돌아오듯 / 이제 다친 길을 어루만지며 그만 돌아와 /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삐비꽃이 아주 피기 앞서 생각을 해야겠지요.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내가 스스로 마음을 가꾸고, 내가 스스로 마음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어야겠지요.


  어제는 하루 내내 비가 왔어요. 이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무엇인가를 느껴서 뒤꼍을 올랐어요. 뒤꼍에 올라 텃밭을 바라보니, 그제까지 안 돋았던 옥수수싹이 한꺼번에 올라왔더군요.


  비를 맞으며 한참 옥수수싹을 바라보았지요. 참말 하루 사이에, 아니 날마다 몇 차례씩 밭을 돌아보는데 ‘비 오기 앞서’ 싹이 하나도 안 돋던 아이들(옥수수씨)이 어쩜 이렇게 한꺼번에 싹이 돋을까 하고 생각하며 바라보았어요. 나는 옥수수싹이 땅을 비집고 솟은 소리를 제대로 들었을까요? 미처 못 들었다고 해야겠지요?


  삼월이 지났고 사월이 흐릅니다. 오월이 찾아와서 이 봄이 한껏 터지고 나면 어느새 여름 문턱입니다. 바람도 해도 비도 구름도 모두 우리한테 ‘어떤 이야기’를 소리나 몸짓이나 결로 들려주리라 생각해요. 무엇보다 우리 집에서 함께 삶을 짓는 사랑스러운 식구들도 온갖 웃음과 노래와 몸짓으로 ‘끝없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고요.


  제대로 귀를 기울이자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쏟아 귀를 열자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귀뿐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면서 이 아침을 새롭게 누리면서 온 하루를 즐거이 짓자고 생각합니다. 시집 한 권을 가슴에 대고 살살 문지릅니다. 2016.4.28.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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