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시선 374
안현미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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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9



깊은 새벽에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며

―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안현미 글

 창비 펴냄, 2014.5.23. 8000원



  깊은 새벽에 아이들 이불깃을 여밉니다. 한밤에도 으레 아이들 이불깃을 여밉니다. 하루 내내 신나게 뛰논 아이들은 꿈나라에서 뛰노느라 잠자리에서 이리저리 구릅니다. 온 하루를 개구지게 뛰논 아이들은 잠자리에서 무척 고단한지 자꾸 뒹굴면서 내 옆구리를 차고 이불을 걷어찹니다. 그러니 나는 밤새 잠을 살짝 옆으로 미루고 틈틈이 이불깃을 여미면서 보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으면 아이들은 밤새 저희가 어떻게 잤는가를 하나도 모릅니다. 알 턱이 없기도 할 테고, 알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밤새 무슨 꿈을 꾸었느냐 하고 물으면, 두 아이는 언제나 대단히 신나게 온갖 놀이를 다 하면서 놀았다고 해요. 그래, 그렇게 꿈에서도 뛰어놀고 날아다니니까 밤새 이불을 차고 구르면서 잘 테지요.



악어가죽 가방을 든 여자가 도착한다 결정적으로 코를 빠뜨린 녹색 카디건을 입고 있다 비에 젖은 트렁크에선 빗물이 떨어지고 호텔 로비의 괘종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다 (백 퍼센트 호텔)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 우리는 잠시 사는 것 (불혹, 블랙홀)



  안현미 님이 빚은 시집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창비,2014)를 읽습니다. 태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산다는 안현미 님은 시를 쓰는 사람이면서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2001년에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았고 2010년에 신동엽문학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시집을 찬찬히 펼치다가 “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시 쓴다” 같은 말마디를 봅니다. 아하, 이녁은 낮밤을 길디길게 보내는 살림이로군요. 집살림을 꾸리려고 낮에는 몸으로 뛰고, 마음살림을 가꾸려고 밤에는 온힘을 기울이는 하루이지 싶어요.



망우리 지나 딸기원 지나 누군가 무심으로 아니 정성으로 가꿔놓은 파밭 지나 구리 지나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하얗게 하얗게 파꽃이 피는 동안 여름과 초록과 헤어지는 동안 (구리)


우리는 선천적으로 두개의 음악을 가지고 있다. 들숨과 날숨! 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시 쓴다. (정치적인 시)



  〈정치적인 시〉라는 노래에서 들려주듯이, 우리한테는 누구나 두 가지 노래가 있다고 느낍니다. 들숨하고 날숨. 마시는 숨하고 내쉬는 숨. 숨을 쉬며 사는 우리 가운데 ‘늘 숨을 쉰다’고 느끼는 사람은 무척 드물는지 모르는데, 사람은 누구나 1초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목숨이 끊어져요. 사람뿐 아니라 벌레하고 짐승도 숨을 아주 살짝이라도 안 쉬면 죽습니다. 풀하고 나무조차도 숨을 못 쉬면 그예 죽습니다. 이른바 ‘진공’이라는 데에 들어가면 누구라도 곧바로 죽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숨을 살피면, 들숨하고 날숨은 ‘같은 바람’을 마시더라도 다른 결입니다. 들이마실 적하고 내쉴 적에 다르게 흐르는 바람이에요. 참말로 두 갈래 노래입니다. 마시는 노래요 내쉬는 노래입니다. 받아들이는 노래요 내보내는 노래입니다. 받는 노래요 주는 노래예요. 어버이한테서 받은 사랑을 아이한테 주고, 아이한테 주는 사랑을 새삼스레 아이한테서 받습니다.



그리하여 그도 그렇겠다 글렌 굴드를 듣는다 당신은 가벼울 필요도 없지만 무거울 필요도 없다 내 생의 앞 겨울을 당신을 훔쳐보면서 설레었으나 그 겨울은 거울처럼 깨져 버렸고 깨진 거울의 파편을 밟고 당신은 지나갔다 (그도 그렇겠다)


오늘은 내 생일인데 밥상이 날아가고 핸드폰이 날아가고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던 삼겹살이 날아가고 소주병이 날아가고 (축 생일)



  아줌마 시인인 안현미 님은 낮밤으로 바쁘게 하루를 지으면서 시를 씁니다. 나는 낮밤으로 바쁘게 살림을 꾸리면서 글을 씁니다. 나는 낮에 밥하고 빨래하고 집 안팎을 건사하고 마을도서관을 열고 아이들을 이끌면서 놀이를 하다가는, 밤이 되어 고단한 몸을 움직여 글 몇 줄을 신나게 씁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슬그머니 일어날라치면 아이들은 “아버지 곧 와?” 하고 묻습니다. 잠든 척하고 잠들지 않은 아이들은, 깊은 밤에도 꿈나라에서 함께 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우리는 늘 마음으로 함께 있어.” 하고 속삭이고는 이불깃을 다시 여미어 줍니다.


  사월에 사월답게 피고 지는 꽃하고 잎을 바라보면서 사월스러운 노래를 듣습니다. 어느덧 꽃잎이 다 떨어진 매화나무 곁에서 새롭게 돋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이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듣습니다. 매화나무는 꽃잎을 모두 떨구었지만, 나뭇잎을 먼저 내놓은 뒤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과나무는 이제 막 꽃잎을 한껏 벌립니다. 모과나무에 피는 모과꽃이 머잖아 꽃가루받이를 마치고 하나둘 눈송이처럼 떨어질 무렵에는, 이 나무 곁에 있는 다른 나무인 찔레나무에서 새하얀 꽃이 잔치를 벌여요. 그리고, 찔레나무 찔레꽃이 질 무렵에는 우리 집 마당에 있는 후박나무가 퍽 느즈막하게 꽃을 터뜨리면서 온 마을 새하고 나비를 부릅니다.



새벽 5시, 세탁기를 돌린다 특별시의 시민으로서 세탁기를 돌린다 얼굴도 모르는 이웃들이 함께 살고 있는 8가구 다세대주택의 새벽을 돌린다 (1인 가족)


엄마는 노루모산을 끼고 살았다 / 신이 되려는 중인지 (화란)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서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오늘 아침은 어떤 밥으로 지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제 먹고 남긴 국을 들여다보고, 어젯밤에 등허리가 결리도록 마련한 밑반찬을 살핍니다. 오늘도 새로 밑반찬을 하나 해 볼까 하고 어림하다가는, 살며시 트는 동에 따라 아침부터 바지런히 날아다니는 새들이 들려주는 노래에 귀를 기울입니다.


  나는 시골에서 새하고 풀벌레하고 나비하고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옆에 끼고 삽니다. 그리고 두 아이가 하루 내내 종알종알 종달새처럼 들려주는 노래를 곁에 끼고 삽니다. 아줌마 시인 안현미 님네 어머님은 노루모산을 끼고 살면서 하느님이 되려고 하셨다면, 나는 숲노래를 듣고 아이들 놀이노래를 끼고 살면서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이틀 동안 내린 비가 밤에 비로소 그쳤으니 오늘은 아침부터 사흘치 빨래를 하면서 열어야겠군요. 어제부터 불린 옥수수 씨앗도 뒷밭에 가지런히 심어야겠고요. 바쁜 사월에 시집 한 권을 동무처럼 책상맡에 놓습니다. 2016.4.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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