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센테니얼 맨
Bicentennial Man, 1999
나는 200이라는 숫자가 꽤 마음에 듭니다. 아니, 마음에 든다기보다 문득문득 200이라는 숫자를 떠올립니다. 누가 200이라는 숫자를 말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남는다기보다는, 어느 때에 불현듯이 떠올라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100이라는 숫자를 ‘온’으로 여겨서 빈틈이 없는 모습을 빗대곤 하는데, 나는 ‘한 온(100)’보다는 ‘두 온(200)’이라는 숫자가 마음이 끌려요.
로빈 윌리암스 님이 훌륭하게 연기를 선보이는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을 보면서 처음에는 ‘바이센테니얼’이 무엇을 뜻하는지 딱히 살피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같은 느낌이나 생각을 품고 싶은 로봇이 나오는 영화로만 여겼거든요. 이러다가 ‘Bicentennial’이라는 영어가 “200년을 잇는”을 뜻하는 줄 깨닫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영화를 다시 들여다보니, 아하, 영화에 나오는 로봇은 바로 ‘200살 나이’를 살아요. 200살에 걸쳐서 사람살이를 지켜보는 동안 이 로봇은 이 사람살이에서 스스로 무엇을 품을 때에 ‘즐겁게 살림을 지을’ 만한가 하는 대목을 깨닫습니다.
로봇은 부품을 제때에 갈면 목숨이 끊어질 일이 없습니다. 로봇한테는 죽음이 찾아올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없는’ 로봇으로서는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없어요. 로봇으로서는 ‘할 일’만 있으면 됩니다. 놀이도 아닌 일만 주어지면 됩니다. 로봇한테 가장 두렵다고 해야 할 대목은 ‘할 일이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200해가 아니라 2000해도 살 수 있는 로봇인데, 2000해에 걸쳐서 ‘할 일이 없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아마 미쳐서 날뛰다가 전쟁병기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어느 모로 본다면, ‘할 일을 모르는’ 채 사는 사람은 살림을 짓거나 사랑을 짓는 길이 아니라 전쟁무기로 전쟁을 일삼으면서 끝없이 배를 채우려고 하는 데에 매달리기 일쑤입니다. 전쟁무기로는 전쟁무기밖에 끌어들이지 못합니다만, 수많은 정치권력은 전쟁무기에만 매달려요. 평화나 사랑이나 살림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는 수많은 정치권력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정치권력을 손에 거머쥔 이들은 이 정치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데에만 마음을 쓸 뿐, 어떤 삶이나 사랑이나 살림을 지을 적에 즐거운가 하는 대목에는 마음을 쓰지 않거든요.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 나오는 로봇은 ‘주어진 일’에 온힘을 쏟습니다. 게다가 온힘을 쏟던 어느 날 ‘생각하는 힘’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생각을 지어서 눈부신 길을 갈고닦을 수 있으며,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법니다. 다만, 돈을 아무리 벌어도 이 로봇은 ‘돈을 쓸 곳’이 없을 뿐이에요. 돈을 쓸 일이 없고, 돈을 쓸 생각이 없으니 엄청난 돈이 있어도 부질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로봇은 오랫동안 여행을 하지요. 여행을 하는 동안 비로소 스스로 깨달아요. 로봇이든 사람이든 꼭 한 가지 빠지거나 모자란 대목은 ‘사랑·삶·살림’인 줄, 따로따로 있는 사랑이나 삶이나 살림이 아니라,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엮은 꿈일 때에 비로소 ‘보람’이 있어서 ‘일을 할 뜻’이 있는 줄 깨닫습니다.
죽을 까닭이 없는 로봇이지만, 사람들하고 어울려 사는 동안 이 로봇은 ‘사람들처럼 살기’를 바라면서 ‘죽음(늙음·노화)’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을 바랍니다. 웃고 울 뿐 아니라 아프고 괴로운 느낌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요. 바야흐로 ‘사람보다 사람다운 숨결’로 거듭나는 길을 걷습니다.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로봇이 아니기에 사람입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로봇하고 다른 사람으로서 하루를 짓습니다. 새봄을 맞이하고, 씨앗을 심고, 아이들을 돌보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살림을 가꾸고, 또 이 일 저 일을 하면서 가만히 돌아봅니다. 내가 바라는 200이라는 숫자는 한낱 200이 아닙니다. ‘내 온(내 모든 숨결)’이 ‘네 온(네 모든 숨결)’하고 만나서 어우러지기를 바라는 ‘두 온(200)’입니다. 200살을 사는 로봇인 ‘바이센테니얼 맨’은 ‘혼자서만 살 수 없다’는 대목을 깨달아서 ‘죽음으로 가지만, 막상 죽음이 아닌 삶으로 가는 길’로 씩씩하게 나아가려 합니다. 오롯이 사람이 되고, 옹글게 삶이 되며, 오순도순 살림이 되는 자리에서 빙그레 웃으면서 고요히 눈을 감습니다. 2016.3.29.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영화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