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물려주면서 가르치는 어른



  한국말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요. 문법하고 시험공부만 가르치지요. 어쩌면 학교는 말을 가르칠 수 없는 곳이라 할 만할는지 모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학교에서는 교과서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온 나라 모든 학교에서 똑같은 교과서로 다 다른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잘 헤아려 보면, 학교교육이 보통교육으로 퍼지기 앞서까지 온 나라 모든 마을에서는 다 다른 말을 썼어요. 자그마한 마을마다 말이 달랐고, 이 마을이 모인 고을마다 말이 달랐으며, 또 이 고을이 모인 고장마다 말이 달랐어요. 이를테면 ‘리’라는 행정구역으로 묶는 마을마다 말이 달라요. 다음으로 ‘면’이나 ‘읍’이나 ‘동’이라는 행정구역에 따라 고을마다 말이 다르고, ‘면’하고 ‘읍’ 사이도 말이 다르며, ‘군’이나 ‘시’라는 행정구역마다 말이 달라요. 또한, ‘도’로 끊는 행정구역마다 말이 다른데, ‘남도’하고 ‘북도’가 또 말이 다르지요.


  이처럼 다른 말을 크게 ‘사투리’라 하고 ‘고장말·고을말·마을말’로 더 잘게 가릅니다. 게다가 집집마다 다 다른 살림을 꾸리기에 ‘집말’도 조금씩 달라요. 이처럼 다른 말이던 살림인데, 모두 똑같은 교과서로 배워야 하면서 ‘모두 똑같은 틀에 맞추는 말’로 지식을 가르치는 얼거리로 바뀌었어요.


  표준말은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의사소통 도구’입니다. ‘말’이라기보다 ‘의사소통 도구’예요. ‘말’이라고 할 적에는 집이나 마을이나 고을이나 고장마다 그곳 터전과 날씨와 바람과 물과 흙과 숲에 맞추어 다 달리 짓던 살림이 깃든 ‘이야기’라고 할 만해요. 이리하여 오늘날 학교교육이나 사회문화는 ‘의사소통 도구’로 수많은 ‘지식·정보’를 주고받는 얼거리로 나아갑니다. 겉보기로는 똑같은 ‘말’로 보이는 표준말이지만, 막상 말다운 말은 아닌 셈이에요.


  그러니, 어른이 된 사람들도 한국말을 몽땅 새롭게 배우려 하지 않으면, 한국말이 아닌 한국말을 쓸 뿐입니다. 마음을 싣지 못하는 이야기가 되는 ‘의사소통 도구’에 얽매인 채 아이들한테 ‘삶과 사랑과 살림을 짓는 사람이 생각을 가꾸는 슬기’인 ‘말’을 좀처럼 못 물려줄 수 있어요.


  의사소통 도구를 쓰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지도 않습니다. 어수선하고 까다로운 오늘날 문명사회에서는 의사소통 도구가 없으면 안 됩니다. 다만, 이러한 의사소통 도구로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할 수 있고, 때때로 마음을 잘못 읽거나 넘겨짚으면서 다툼이 생겨요. ‘이야기가 흐르는 사랑스러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읽거나 넘겨짚는 일이 생기지요.


  어른이나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말을 가르친다고 할 적에는 ‘의사소통 도구’는 이러한 ‘의사소통 도구’대로 알맞게 일러 주면 됩니다. 그리고, 늘 되새기면서 생각할 대목은 ‘삶을 짓는 말’하고 ‘살림을 가꾸는 말’하고 ‘생각을 밝히는 말’하고 ‘사랑을 나누는 말’을 ‘슬기로운 마음’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기틀을 닦아 주어야지 싶어요.


  ‘말 배우기’는 ‘삶 배우기’라고 느낍니다. ‘말 가르치기’는 ‘살림 가르치기’라고 느낍니다. ‘말 나누기’는 ‘사랑 나누기’라고 느낍니다.


  아이하고 ‘의사소통’만 하겠다면 ‘지식·정보’를 주고받는 ‘도구’만 써도 됩니다. 아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겠다면 ‘생각을 슬기롭게 짓는 살림으로 누리는 삶’을 한껏 북돋우는 ‘말’을 우리 어른과 어버이 스스로 새롭게 배우면서 즐겁게 쓸 수 있을 노릇이라고 봅니다. 2016.3.2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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