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입이 크다 - 교사 시인 박일환의 청소년시, 2014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한티재시선 2
박일환 지음 / 한티재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사랑하는 시 80



똑같은 교복 입혀도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 학교는 입이 크다

 박일환 글

 한티재 펴냄, 2014.7.14. 8000원



  우리 집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닙니다. 학교를 안 다녀도 얼마든지 삶을 배우고 살림을 익힐 수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가르치고, 주어진 틀에 맞추어 가르칩니다. 학교에서는 또래를 만날 수 있고, 선배와 후배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마음껏 뛰거나 놀거나 달리거나 웃거나 노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교는 수험공부를 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수업 시간에 수업을 받지 않고 다른 공부를 하거나 논다면 딴짓을 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한창 그림을 그리다가도 다른 교과서를 펼쳐야 하고, 한창 숫자와 글씨에 푹 빠지다가도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에 나가야 하며, 운동장에서 뛰놀며 흐른 땀이 식지 않았는데 다시 옷을 갈아입으면서 온몸이 다시 땀으로 푹 절면서 얌전히 칠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얼거리는 사람한테 그리 걸맞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러한 얼거리는 아이들이 사회에 잘 길들도록 돕는 구실을 한다고 느낍니다. 다시 말해서 학교는 사회에서 시키는 일을 말없이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곳이라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길어올려서 새로운 살림을 짓도록 북돋우는 곳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학교라 할 만해요.



선생님! / 시험 문제가 왜 그래요? / 시험지를 막 씹어 먹고 싶었어요! (어린 염소의 등극)


예나는 예쁘다 / 생각만 했을 뿐인데 / 입이 벙싯거려지는 것도 / 조건반사 때문일까? (조건반사)



  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박일환 님이 쓴 ‘청소년시’를 모은 《학교는 입이 크다》(한티재,2014)를 읽습니다. 박일환 님은 ‘어른시’도 ‘어린이시’도 아닌 ‘청소년시’를 일부러 썼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중·고등학교 푸름이 눈높이를 헤아리면서 삶을 노래한 시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문학인 어른시는 여러 출판사에서 수없이 나오고, 어린이문학인 어린이시(동시)도 제법 여러 출판사에서 나오지만, 막상 ‘어린이에서 푸름이 자리에 들어선 숨결’ 눈높이를 살피는 ‘청소년문학·청소년시’는 매우 드물어요.



별이 안 보인다고 투덜대자 별이 조용히 속삭였다 / 눈을 감아봐, 그러면 내가 보일 거야 (별은 숨어 있는 게 아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 여자가 말했다. / 예쁜 것도 죄가 되나요? // 텔레비전에 나오지 못하는 / 여자 친구가 말했다 / 나도 예뻐지고 싶어! (괜찮은 인간)



  열네 살부터 열아홉 살 사이인 아이들한테 따로 ‘푸름이(청소년)’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오늘날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푸름이’나 ‘청소년’이라는 이름보다는 ‘학생’이나 ‘수험생’이나 ‘입시생’이라는 이름을 훨씬 자주 듣습니다. ‘중1’부터 ‘고3’에 이르는 이름을 더더욱 자주 듣고요.


  이리하여, 학생이요 입시생이자 중1이거나 고3인 푸름이는 ‘시’나 ‘문학’이나 ‘책’보다 자습서와 문제집과 교과서가 가깝습니다.


  책방을 한번 둘러보셔요. 책방마다 아주 넓게 자리를 차지한 ‘책’은 바로 자습서와 문제집과 참고서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인기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자습서랑 문제집이랑 참고서예요. 오늘날 한국 푸름이는 자습서랑 문제집이랑 참고서하고 씨름을 해야 해요. 이러다 보니 중학교 교사 박일환 님은 따로 청소년시를 써서 이 아이들 넋에 고운 바람 한 줄기를 베풀어 주고 싶습니다.



할머니만 무릎이 시린 게 아녜요 / 겨울에 교실에 앉아 있어 봐요 / 무릎이 얼마나 시리다고요 (무릎담요)


엄마는 늘 /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하라는데 / 쓸 데 있는 생각은 어ㄸ너 걸까? (어느 날의 일기)



  청소년시집 《학교는 입이 크다》는 책이름처럼 ‘입이 큰’ 학교를 다룹니다. 자, 입이 큰 학교는 어떤 곳일까요? 입이 큰 개구리 같은 곳일까요? 아니면 입이 큰 괴물 같은 곳일까요? 입이 큰 감옥 같은 곳일까요? 입이 큰 신나는 놀이터 같은 곳일까요?


  학교도 학교 나름이기 때문에, 슬기로운 교사가 아름다운 아이를 가르치는 배움터가 있습니다. 슬기롭지 못한 교사가 사랑스러운 아이를 윽박지르거나 모질게 다루는 감옥 비슷한 곳도 있어요. 오직 입시에 치우친 채 아이들이 햇볕 한 줌 못 쬐면서 책상맡에서 온 하루를 고분고분 보내야 하는 곳이 있지요.


  초·중·고등학교 가운데 혁신학교라는 ‘새로운’ 학교가 생긴다 하더라도, 대학교에는 ‘혁신 대학교’가 없습니다. 공공기관이나 회사나 공장에서도 ‘혁신 공공기관’이 없지요. 부속품이 아닌 오롯한 한 사람으로 서서 즐겁게 일하는 보람을 누리면서 살림을 기쁘게 짓도록 북돋우는 배움터나 일터는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될까요.



똑같은 교복을 입혀 놓아도 우린 결코 똑같은 사람이 아니란 걸 / 선생님들도 잘 아시잖아요 (찔리실 겁니다)


책은 안 보고 거울만 보는 이유가 궁금하다고요? / 선생님도 거울을 들여다보세요 / 거기 선생님 얼굴 비치죠? / 그래서 보는 거예요 /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하신 / 선생님 말씀처럼 / 소중한 내가 잘 있는지 살펴보는 중이에요 (책보다 거울)



  아이들은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똑같은 옷을 입혀도 다 다르게 아름답습니다. 똑같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꾸며야 해도 다 다르게 아름답습니다. 똑같은 교과서를 손에 쥐도록 해도 이 다 다른 아이들은 마음속에 다 다른 꿈을 키웁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 예쁜 아이들을 어떤 눈길로 바라볼 만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른들 스스로 예쁜 눈썰미와 눈매와 눈길이 될 때에 비로소 아이들하고도 예쁜 삶과 살림과 사랑을 가르치면서 배울 만하지 않으랴 하고 생각합니다. 시험을 잘 치르도록 채찍질해야 하는 학교가 아니라, 서로 돕고 아끼면서 고운 동무님이나 이웃님이 되도록 이끄는 배움자리요 살림자리요 사랑자리요 꿈자리가 될 학교여야 하지 않으랴 싶어요.



세월호가 가라앉던 날 / 7교시에 방과후수업에 야자까지 / 정해진 일과는 빈틈이 없었다 / 어른들이 제일 먼저 달아난 선장을 욕하고 / 어른들이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며 탄식하고 / 어른들이 대한민국이 함께 침몰했다며 분노하는 동안 / 우리는 교실 안에 잘 갇혀 있었다 (열일곱 나의 친구에게)


미확인 비행물체가 떴다 // 남들은 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 나는 분명히 보았다 (UFO)



  배 한 척이 바닷속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마다 교실마다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아이들은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책상맡에 붙들려야 합니다. 아이들은 ‘똑같은 제복’을 벗어던질 틈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소리치고 노래하고 달리고 뒹굴고 웃고 떠들면서 놀이를 누릴 겨를이 없습니다.


  왜 열네 살이 중학교에 가야 할까요? 왜 열세 살에 낫질을 익힐 수 없을까요? 왜 열일곱 살에 고등학교에 가야 할까요? 왜 열여섯 살에 등짐을 익힐 수 없을까요? 왜 열아홉 살에 대입시험을 치러야 할까요? 왜 열여덟 살에 아기를 돌보며 아끼는 손길을 익힐 수 없을까요?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몸과 마음이요, 다 다른 꿈과 사랑입니다. 똑같은 나이에 똑같이 뭘 해야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학교만 ‘입이 크지’ 않습니다. 나라도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모두 ‘입이 크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넣고 모든 가르침(교육)을 교사한테 맡기는 어버이(학부모)도 ‘입이 크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은 ‘마음이 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꿈이 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온누리에 아름다움이 넉넉히 퍼지면서 사랑스러움이 따사로이 흐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6.3.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청소년문학 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