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소리 12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606



‘전문가가 엉망이라 해’도 난 그저 좋아

― 순백의 소리 12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12.25. 4800원



  라가와 마리모 님이 빚은 만화책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5) 열둘째 권을 읽습니다. 열둘째 권은 겉그림이 살짝 껄끄러워서 큰아이한테 아예 안 보여줍니다. 나중에 훨씬 나이가 들어야 비로소 겉그림을 보도록 하겠지요. 속을 살피면 이런 겉그림하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습니다만, 굳이 이런 겉그림을 넣어야 했나 싶어요. 왜냐하면 이 만화에서 다루려고 하는 이야기하고 너무 동떨어지니까요.



“니 마지막은 어딘데? 명성을 얻고 실컷 돈이라도 버는 기가?” “아니. 나는, 할배맨치로, 평생 연주할 수 있는 ‘즉흥곡’을 만들고 싶다.” (34∼35쪽)


“글쎄.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는 거죠.” (48쪽)



  《순백의 소리》 열둘째 권에서는 ‘악기를 켜는 사람’이 늘 되새겨야 할 대목을 몇 가지 들려줍니다. 첫째도 둘째도 막째도 언제나 ‘스스로 깎아내리지 않기’입니다.


  이는 다른 자리에서도 늘 같아요.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사진을 찍건, 밥을 짓건, 청소를 하건, 아이를 돌보건, 교사로 일하건, 대통령이나 군수로 일하건,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건 늘 매한가지예요. 내가 나를 깎아내리면 모든 것은 끝입니다. 스스로 깎아내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지요.


  처음부터 아이를 잘 돌보는 어버이란 없어요.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일 때에 비로소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어버이가 되어 아이를 따사로이 보살필 수 있어요.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일 때에 ‘악기 켜기가 서툴’어도 사랑스러운 노랫가락을 들려줄 수 있어요.



“네가 무슨 노력을 했는데? 교실 차려서 지도자가 되든가, 지역 행사에서 연주를 하든가, 길거리 공연을 하든가, 음악사무소에 음원을 보내든가! 자비로 CD를 만들어서 팔아 보기라도 했어?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려 보기나 했냐고!” (128쪽)


‘나는, 밑바닥이다.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다면, 어떤 풍경이 보일까?’ (181쪽)



  아주 수수하다 싶은 소리만 켤 수 있다는 어느 연주자는 한동안 밑바닥에 가라앉아 지내면서 ‘처음부터 재능이 있다’면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고 밝힙니다. 네, 궁금할 테지요. 재주나 솜씨가 있는 사람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재주꾼이나 솜씨쟁이는 아주 대단하거나 매우 아름답거나 무척 사랑스러운 모습을 볼까요? 수수한 사람하고 아주 다른 모습을 볼까요?


  거꾸로 생각해서, ‘재주꾼이나 솜씨쟁이는 수수한 사람이 바라보는 모습’이 무엇인지 몰라요. 재주꾼이나 솜씨쟁이는 ‘수수한 사람이 바라보는 곳’이 어디인가를 도무지 못 짚습니다.


  이리하여, 둘(재주꾼하고 수수한 사람) 사이에서는 만날 만한 자리가 없다 할 만해요. 그리고, 둘 사이에서는 만날 만한 자리가 재미나게 있어요. 둘이 바라보는 모습은 아주 다르지만, 둘이 바라보는 곳은 늘 같아요. 무엇인가 하면, ‘삶’을 바라봅니다. 네가 바라보는 삶이랑 내가 바라보는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만, ‘삶’이라는 대목에서는 언제나 같아요.



“정말, 지금 엉망이라서 듣기 싫을 기라.” “전문가가 엉망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난 몰라. 도쿄에 살 때 강 둔치에서 연주하던 생각이 나네. 난, 세츠의 소리가 참 좋아.” (141쪽)


“츠가루샤미센의 역사를 아는 것도, 반주를 하는 것도, 명인의 수를 듣고 아는 것도, ‘뿌리로 돌아가는’ 것, 자기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그기 아입니꺼?” (174쪽)



  전문 연주가인 사람이 ‘지금 엉망’이라고 말한들, 수수한 청취자나 관객인 사람은 ‘늘 좋다’고 여깁니다.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면 빼어난 솜씨대로 좋고, 투박한 연주를 보여주면 투박한 연주대로 좋으며, 엉망이라고 하는 연주는 또 이렇게 엉망이라고 하는 연주대로 좋아요.


  나는 김현식이라고 하는 노래꾼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퍽 좋아합니다. 이녁이 맨 처음 새내기 노래꾼으로 나타났을 적에 들려준 달콤하면서 매우 보드라운 목소리도 좋아하지만, 죽음을 코앞에 앞두고 잔뜩 가라앉으면서 무거운 목소리도 좋아합니다. 더 낫거나 덜 나은 목소리가 따로 없어요. 모두 ‘노래하는 목소리’입니다. 악기 연주자로서도 언제나 ‘노래를 들려주는 손길’이지요.


  사랑으로 지은 밥이면 언제라도 맛있듯이, 사랑으로 켜는 노랫가락이라면 언제라도 즐겁습니다. 이 대목을 깨달아서 ‘뿌리로 돌아가기’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저마다 ‘연주가’이고 ‘작가’이며 ‘교사’이자 ‘요리사’이기도 한 줄을 기쁨으로 누릴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4349.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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