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 (양장) - 일상과 그 너머에 대한 인문적 성찰
류대영 지음 / 생각비행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책읽기 삶읽기 229



길을 잃은 아버지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책

―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

 류대영 글

 생각비행 펴냄, 2016.1.15. 2만 원



  한동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일을 맡는다는 류대영 님은 이녁이 쓴 책을 이녁 아이들이 한 권도 안 읽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학자로서 쓴 글이고 책이니 이녁 아이들이 읽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고 할 테지요. 아이들한테 읽히려는 마음으로 논문을 쓰는 사람은 매우 드물거나 딱히 없을 테니까요. 류대영 님이 그동안 쓴 글하고 책이라면 이녁 스스로 걸어가고 싶은 학문길을 살피면서 빚은 열매라고 느낍니다.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생각비행,2016)라는 책은 누구보다 류대영 님네 아이들한테 읽히려는 마음으로 쓴 글을 묶었다고 합니다. 학문도 논문도 아닌 ‘우리 아이들이 읽고서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이야기만 따로 써서 이 책을 엮었다고 해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고 어떤 생각을 가슴에 품으면서 살았으며 이제껏 사람과 사회와 삶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제법 두툼한 책으로 여미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떠나도 그가 주고 간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를 먹이고, 업어 주고, 쓰다듬어 주던 할머니의 사랑은 지금도 나를 살리고 있다. (24쪽)


학교 앞에 난 고속도로는 멀리서 학교로 오가는 일을 편리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다른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그 길은 주변 사람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29쪽)



  글이나 책을 쓰는 어버이라면 아이한테 글이나 책을 남길 만합니다. 땅을 지어서 흙을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한테 땅을 물려주면서 흙을 돌보는 손길을 물려줄 만합니다. 살림을 가꾸는 어버이라면 아이한테 살림을 가꾸는 숨결을 물려줄 만해요. 자동차를 좋아하는 어버이라면 아이가 자동차를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물려줄 테고, 바다를 좋아하는 어버이라면 아이하고 바다로 자주 나들이를 가면서 바다가 베푸는 넋을 물려줄 테지요.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를 읽으면, 류대영 님을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 이야기가 흐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야기가 흐릅니다.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온 사회가 캄캄하던 무렵 어리거나 젊은 류대영 님이 겪어야 한 이야기가 흐르고, 캄캄해서 앞이 보일 듯 말 듯하던 무렵에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등화관제’ 이야기를 읽다가, 나도 어릴 적에 으레 겪은 등화관제 훈련이 떠오릅니다. 등화관제 훈련을 시킬 적마다 민방위대원인지 새마을대원인지 온 마을을 돌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우리 식구가 사는 집은 5층짜리 아파트였는데, 전쟁이 터지면 항구에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길목을 우리 아파트를 허물어서 막는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길가에는 아파트가 남달리 많았는데, 이 아파트는 모두 ‘전쟁 대비 목적’으로 그곳에 세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유신시대 등화관제 때문에) 가로등을 포함해서 땅에서 모든 불빛이 사라지자, 놀랍게도 하늘에는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빛이 나타났다. 거대한 별바다였다. (56쪽)


나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주로부터 왔다. 물질적으로 볼 때 내 몸은 우주의 구성성분과 같다. (66쪽)


영어 사전에 걸레처럼 되어서 책갈피를 넘기기도 힘들게 되었을 때쯤, 나는 영문학이 무엇인지 조그씩 그 맛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때나마 문학의 길을 꿈꾸며 시를 습작하기도 했다. (78쪽)



  신학을 배웠고, 신학을 가르치는 류대영 님이라 하는데,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라는 책은 종교를 거의 안 다룹니다. 하기는, 류대영 님이 걸어온 길은 ‘학문 닦기’입니다. ‘종교 섬기기’라고 하는 길이 아니니까요.


  엄청난 별바다를 보던 어릴 적 일을 그립니다. 이윽고 ‘우주와 내가 이어진 고리’를 헤아립니다. 한국말이 아닌 영어라는 새로운 말을 익히면서 맛본 ‘다른 나라 문학’에서 새로운 삶과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손전화 없이 살다가, 손전화가 없으면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 얼거리에서 ‘네 식구가 함께 쓰는 전화기’를 마련하고, 아이들이 커서 따로 지낼 적에는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전화기’로 이어간다고 합니다.


  포항에서 커다란 공장이 설 적에 숲을 어떻게 밀어서 없애는가 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숲길을 거닐거나 멧자락을 오르내리면서 느낀 생각을 들려줍니다.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동무가 일찍 숨을 거둔 일을 겪으면서 사람과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되새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수하다면 수수하고, 투박하다면 투박한 이야기입니다. 류대영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요,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수수하고 투박한 이야기가 여러모로 맛깔스럽습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아마 류대영 님네 아이들은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책을 재미있게 읽으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어느 지식을 강요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삶을 치르면서 어느 한 사람이 차근차근 거듭나거나 자라온 발자국을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한창 젊은 발자국을 내딛는 류대영 님네 아이들은 이 책을 곁에 두면서 새삼스레 기운을 얻을 만하리라 봅니다.



파이어스톤 도서관에 있는 책꽂이 길이를 모두 합치면 약 110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서울 시청 앞에서 천안 사거리까지의 도로 길이가 약 100킬로미터라고 하니. (104쪽)


상상력은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낳는다. 상상력은 위대한 문학과 예술을 탄생시키고, 초월을 위한 종교와 사상을 만들며, 놀라운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루어낸다. (135쪽)



  미국에 있는 파이어스톤 도서관은 무척 크다고 합니다. 그곳에 깃들어 책이나 자료를 살피다 보면 흔히 길을 잃는다고 해요. 파이어스톤 도서관에 들어갈 적에는 ‘도서관 지도’를 꼭 손에 쥐고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도서관 지도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찾아다녀도 때때로 ‘어디로 돌아 나와야 하는가’를 잃는다고 합니다.


  도서관이 워낙 커서 모든 곳에 불을 밝히지 않는다지요. 사람들이 저마다 책을 살펴서 보는 자리에서 스스로 불을 켜도록 한대요. 그런데, 미국에 있는 의회도서관은 이보다 훨씬 크다고 합니다. 책이라는 모습으로 이룬 열매를 알뜰히 여겨서 건사한다고 하는데, 한 사람이 이들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읽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새롭게 서려고 하는 길에 스스로 배우려고 하는 책을 넉넉히 찾을 만하겠지요.


  류대영 님은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자꾸 길을 잃으면서 학문을 닦습니다. 학문을 닦으면서 스스로 거듭납니다. 길을 잃고 또 잃지만 씩씩하게 새로운 길을 찾습니다. 지도에 없는 길을 느껴서 찾고, 지도와는 다른 도서관 얼거리를 느끼면서 ‘책하고는 다른 삶·사회·사람 얼거리’를 배웁니다. 사람이 이룬 문명과 문화가 어마어마하다 싶은 도서관에 가득가득 모이지만, 사람이 이룬 모든 문명과 문화가 이곳에 다 모이지는 않는다는 대목을 깨닫습니다.


  신라 옛 유적이 있는 곳을 천천히 거닐면서 ‘오늘날까지 남은 문화재(유물)’는 거의 모두 권력자가 쓰던 것이라는 대목을 돌아봅니다. 여느 사람들이 수수하게 살며 쓰던 살림살이는 오늘날까지 거의 남아나지 않는다는 대목을 돌아보지요.



한국은 학자가 100권의 책을 내더라도 논문을 따로 쓰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상한 나라다. (207쪽)


나는 죽비로 머리통을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 이발사는 세계적인 대기업을 다니며 안정적인 생활을 했지만, 순전히 봉사를 위해 이발 기술을 배웠고, 지금까지 이발 봉사를 하고 있었다. (249쪽)


농협이라는 조직은 말 그대로 농촌의 협동조합인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하여 대형 마투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 농협이라면 깨끗하고 편리한 건물을 지어 놓고, 거기에 농민들이 와서 자기 물건을 팔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정이 있는 것 같다. (291쪽)



  어느 모로 본다면, 길을 잃기에 길을 새로 찾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또 어버이로서, 또 학자로서, 또 곁님(남편)으로서 빈틈없는 모습으로 살아온 나날이 아니라, 이렇게 부딪히고 저렇게 넘어지면서 늘 새롭게 배우려고 한 삶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류대영 님 나름대로 책으로 적었다고 할 수 있어요. 어버이 한 사람은 이제까지 살며 이렇게 삶을 배웠다고 하는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주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희 삶을 새롭게 부딪히고 부대끼고 어우러지면서 기쁘게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물려주려고 하는구나 싶습니다.


  나도 두 아이 아버지로서 늘 새롭게 부딪히고 넘어지면서 새롭게 거듭나고 배웁니다. 늘 길을 잃기에 늘 길을 새로 찾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꾸자꾸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걸음마를 익히듯이,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는 곧잘 어긋나기도 하고 어리숙하기도 한 나날을 보내면서 찬찬히 슬기로운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배울 수 있는 마음이기에 어른으로 산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르칠 수 있는 마음이기에 어른이거나 어버이가 아니라, 배울 수 있는 마음이기에 어른이나 어버이로 살면서 아이들하고 사랑을 나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이하고 살며 ‘길을 잃는’ 수수한 어버이한테 길동무가 될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가 되리라 하고 느낍니다. 길을 잃는 수수한 어버이 누구나 ‘우리가 걸어온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한테 스스로’ 기쁘게 들려줄 수 있으면 더없이 아름다우리라 하고도 느낍니다. 4349.1.29.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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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2016-01-29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따뜻해지는 리뷰여요ㅎㅎ

숲노래 2016-01-29 13:23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언제나 마음이 따뜻한 하루 누리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