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상경기
사이바라 리에코 지음, 김동욱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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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98



밑바닥 밑에서 기면서 만화가로 일어서다

― 만화가 상경기

 사이바라 리에코 글·그림

 김동욱 옮김

 AK 커뮤니케이션즈 펴냄, 2011.8.25. 9000원



  사이바라 리에코(1964∼)라는 일본 만화가가 빚은 《만화가 상경기》(AK 커뮤니케이션즈,2011)는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서울(일본 도쿄)’로 가는 날만 손꼽아 꿈꾸던 이녁이 드디어 시골을 벗어나서 서울살이(도쿄살이)를 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단편만화집입니다. 짤막하게 1화부터 53화까지 한 쪽에 한 가지 이야기씩 그립니다. 그러니까 쉰세 쪽짜리 만화책인 셈이니 무척 가볍고 작은 책이라 할 테지요. 그렇지만 모든 이야기는 무지개빛으로 그렸고, 한 가지 이야기마다 깊고 긴 나날에 걸친 땀과 눈물과 피가 고루 섞였어요. 쉰세 쪽짜리 만화책이지만 쉰세 해쯤 살아낸 이야기 같은 만화책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나한테는 얼굴 말고 다른 게 있을 거야, 그러니까 도쿄에 올라가자, 나는 매일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도쿄에 올라와서 처음 깨달은 것. 그건 바로 내가 이날을 위해 마련해둔 예쁜 신발이랑 옷가지가 실은 죄다 엄청 꼴불견이라는 사실이었다. (1화)



  서울(도쿄)에서 사는 사람은 어쩜 그렇게 멋져 보이는 옷을 차려입을 수 있을까요? 서울(도쿄)에서 사는 사람은 그 비싼 물건값이랑 집삯에도 어쩜 그렇게 살림을 꾸리면서 먹고살 수 있을까요?


  ‘아직 만화가로 살지 못’하고 술집에서 접대원으로 일하면서 겨우 입에 풀을 바르는 사이바라 리에코 님은 지저분하고 좁으며 갑갑한 집에서 ‘내가 이 꼴이 되려고 겨우 시골집을 벗어났는가?’ 하면서 한숨을 쉽니다. 그런데 한숨을 쉬다가도, 이 까마득한 곳(도쿄)에서 전철을 타고 출퇴근(접대원으로 일하는 술집으로 오가는 길)을 하는데 전철바닥에 한가득 게우고는 몹시 부끄러운지 계단을 세 칸씩 성큼성큼 뛰면서 내빼는 회사원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고이 접습니다. 언제나 한숨만 가득한 나날이지만, 접대원으로 일하는 술집에서 여러 해 동안 상냥한 웃음으로 일하는 언니가 ‘연극단원’이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또 이 언니가 접대원 일을 그만두고 동물원 일자리를 얻었다고 귀띔하는 말을 듣고는, 또 이 언니가 접대원 일을 그만둔 뒤에 그 술집에 손님이 절반 남짓 뚝 끊어진 모습을 보고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참말 삶이란 무엇이고, 서울살이(도쿄살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둘레에는 어떤 사람이 있고, 나(와 너)는 어떤 사람일까요. 《만화가 상경기》를 보면, 시골에서 지낼 때이든 서울(도쿄)로 올라와서 지내든, 사이바라 리에코 님은 이녁 스스로 ‘나는 더없이 못난 꼴불견’이라고 되뇝니다. 참말 사이바라 리에코 님은 그저 ‘더없이 못난 꼴불견’이기만 한 사람일까요.




고양이는 친해진 지 일주일 만에 사라졌다. 우리 집에서 아픈 데도 다 돌봐 주고 깨끗하게 목욕도 시키고 또 사람도 잘 따르게 붙임성 좀 키워서 내보냈으니, 그래도 우리 집보다는 좋은 데서 거둬 줬겠지.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땐 정말 그 고양이가 부러웠다. (10화)


미술서가 잔뜩 쌓인 책방에 들렀다. 이런 책들은 비싸서 사진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봤다. 정말 재미있었다. 그 순간, 왜 못 사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바로 이 책인데 왜 난 이런 옷이나 입고 있지?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바로 이 책인데 왜 허구한 날 하는 일도 없이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남자랑 살고 있지? (16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꿈이 있지만, 이 꿈을 언제 이룰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만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이 마음을 언제 열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어느 날 책방에 들러서 미술책을 서서 읽다가 ‘왜 이 책을 사지 못하나?’ 하고 스스로 물어요. ‘왜 이 책을 사서 집에서 느긋하게 읽지 못하나?’ 하고 스스로 물어요.


  바로 오늘 이곳에서는 주머니에 돈이 없을는지 몰라요. 그러면 돈이 없다는 까닭 하나 때문에 미술책을 못 사고, 만화가가 못 되었을까요? 아니면, 스스로 돈을 더 악착같이 벌겠다는 마음이 모자라지는 않았을까요? 아니면, 스스로 만화가로 살겠노라는 꿈을 제대로 못 꾸지는 않았을까요?


  사이바라 리에코 님은 술집 접대원으로 한창 일하던 어느 날부터 겨우 그림을 어느 잡지사에 내밀면서 ‘성인만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성인만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 테지만, 입에 풀을 바르려면, 또 만화를 그리려면, 사이바라 리에코 님으로서는 ‘할 수 있는 힘’을 다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어요. 부끄러움을 챙기거나 이것저것 가릴 살림이 아니었어요. 밑바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나날이었고, 밑바닥 밑에 또 어떤 밑바닥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나날이었다고 할 만해요.




그 뒤로는 제일 싼 맥주 하나 시켜 놓고, 가게에 오던 그 여자애들 흉내를 냈다. 크게 웃고 떠들도 다리도 몇 번씩 이리 꼬고 저리 꼬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일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신나는 인생처럼 보일 수 있도록, 계속 그런 궁리만 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25화)


꼼꼼하게 한 장 한 장 살펴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일 자신 있는 터치로 한 장만 더 그려 오시면 안 될까요?” 제일 자신 있는 터치라니, 그런 거 없다고요. (29화)



  밑바닥 밑에서 기면서 만화가로 일어서는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가 상경기》라고 할 만합니다. 밑바닥 밑에서 기는 동안 눈물이 나면 눈물을 흘리고, 괴로우면 짜증도 부리면서 살던 나날을 고스란히 담되 ‘언제나 이녁 둘레에서 상냥하게 웃는 낯으로 이녁 마음을 달래 주던 이웃님을 떠올리면서 그린 만화’를 찬찬히 그러모은 《만화가 상경기》라고 할 만합니다.


  지나고 보니 다 괜찮아서 지나온 나날을 그린 만화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이제 좀 걱정이나 시름을 덜었기에 《만화가 상경기》를 그렸다고도 느끼지 않아요. 사이바라 리에코 님은 만화책 끝자락에 만화를 그리는 까닭을 차분하게 밝힙니다. 쉰한째 이야기에서 이 까닭을 밝히는데, 힘들거나 괴롭거나 짜증이 날 적에 이녁한테 스승이 되는 분이 그린 만화책을 읽는다고 해요. 이 만화를 그리면서 마음이 풀리고 한바탕 웃음이 난다는데, 만화 한 권을 읽으면서 이토록 기쁜 마음으로 거듭날 수 있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사이바라 리에코 님 만화가 이웃들한테 기쁨을 길어올리는 징검돌이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한다고 해요.




어느 날, 평소대로 성인잡지 4컷을 편집부에 가지고 갔더니, “그럼 사이바라 씨, 이건 이번 회로 끝냅시다. 아니, 그러니까, 사이바라 씨, 청년지에 연재 시작했잖아. 이제 성인지 연재는 그만해야지. 그래도 혹시 일이 또 끊어지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이런 일쯤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어느 큰 출판사의 유명한 잡지에서 연재를 시작할 무렵 일어난 일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동안 정말 신세 많았습니다. (41화)



  웃을 일도 울 일도 언제나 나 스스로 짓습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언제나 내가 스스로 지어요. 반찬을 가득 올려야 맛있는 밥상이 되지 않아요. 반찬이 한 가지만 있어도 내가 스스로 맛있게 먹을 적에 맛있는 밥상이 돼요. 내가 스스로 맛없게 먹으면 수십 가지 반찬이 있어도 맛없는 밥상이 될 뿐이에요.


  밤마다 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을 재우며 가만히 생각합니다. 내가 어버이로 살면서도 스스로 골을 내며 자장노래를 안 부르면 아이들이 괴롭지 않아요. 어버이인 내가 괴롭지요. 스스로 활짝 웃으면서 아이들하고 신나게 자장노래를 부르다가 놀이노래를 부르면 다 함께 즐겁고 신나요.


  밑바닥에서도 또 밑바닥으로 나아가기만 하다가 어느새 밑바닥이 아닌 삶자리와 보금자리를 깨달으면서 만화를 그릴 수 있었다는 《만화가 상경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내가 나를 참답게 사랑하는 길’이지 싶어요. 어느 곳에 있어도 내 마음을 스스로 지키고, 어느 일을 맞닥뜨려도 내 꿈을 스스로 키우면, 스스로 맑게 짓는 웃음이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이 작으면서 앙증맞은 만화책에 흐르지 싶어요. 4349.1.2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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