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문화찾기 10살부터 읽는 어린이 교양 역사
배유안 지음,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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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29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온 모습

―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

 배유안 글

 책과함께어린이 펴냄, 2008.12.5. 11000원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 님은 우리가 일제강점기로 지내야 하던 무렵 이 땅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은 꽤 있었을 텐데, 우리 이야기와 우리 문화를 가만히 살피면서 남긴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요. 이녁이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서 그려서 남긴 그림은 오늘날 한국에서 지난날 발자취를 되새기도록 도와주는 조촐한 선물과 같습니다.


  어린이 인문책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책과함께어린이,2008)를 읽습니다. 엘리자베스 키스 님이 남긴 그림을 놓고, 배유안 님이 살을 붙여서 엮은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이 책은 역사 자료로 들려주는 한국 현대사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수수하게 살던 사람들 발자취가 물씬 묻어나는 그림을 새삼스레 바라보면서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문화로 아로새겼는가 하는 대목을 들려주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인쇄까지 다 한 크리스마스실을 갑자기 일본이 압수해 간 거야. 산을 크게 그린 것이 군사법에 어긋난다나? 산을 작게 그리고, 또 그림에 1940년이라고 쓰지 말고 일본 연호를 써야 한다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화가 났지만 좋은 일에 쓸 거니까 참고 다시 그렸대. (15쪽)



  ‘풍속화’라는 이름으로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를 그림으로 담은 일이 지난날에도 더러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삶은 그림이나 글이나 책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요. 으레 임금님이나 신하나 지식인 모습이나 발자취만 그림이나 글이나 책으로 엿볼 뿐이에요.


  엘리자베스 키스 님이 남긴 그림에도 일제강점기 무렵 꽤 이름이 높거나 정치권력이 센 사람도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보다는 여느 시골집이나 살림집에서 수수하게 사는 사람들 모습이 더 자주 나와요. 마당에 멍석을 깔고서 맷돌을 돌리는 사람이 나옵니다. 마을 고샅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나옵니다. 연을 날리는 아이가 나오고, 널을 뛰는 사람하고 널뛰기를 구경하며 아기를 업은 사람이 나와요.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그 위에 얇은 천을 펴 놓았지? 맷돌에서 흘러나오는 마른 가루를 받도록 말이야. 삶은 콩이나 불린 쌀같이 젖은 걸 갈 때는 맷돌 아래에 커다란 함지를 받쳐 놓아야 해. (29쪽)


오다가 만나도 이야기 한 소쿠리, 가다가 만나도 이야기 한 소쿠리, 밤에는 바느질감 들고 모여 또 한 소쿠리, 해도 해도 끝도 없는 게 사는 이야기야. (35쪽)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에 나오는 그림을 살피고, 이 그림에 붙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해방 뒤나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던 무렵이나 오늘날에도,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눈여겨보는 사람은 ‘수수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이 눈여겨보는 사람도 ‘수수한 사람’이 아니기 마련이에요.


  이름난 사람을 그리거나 찍어야 뭔가 이야기가 되는 줄 여기곤 해요. 힘(권력)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내로라하는 자리에 선 사람을 그리거나 찍어야 뭔가 역사가 되거나 기록이 되는 줄 여기곤 하지요.


  수수한 이웃을 그림으로 담거나, 수수한 동무를 사진으로 찍으면서 ‘삶을 짓는 기쁨’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드러내는 손길이 아직 퍽 모자라지 않느냐 하고 느낍니다. 수수한 이야기에서 수수한 사랑이 흐른다는 대목을 보여주는 그림이나 사진은 아직 한국에 얼마 없구나 싶어요. 일제강점기에는 외국사람 손길이라도 타면서 수수한 살림살이와 수수한 사랑이 남을 수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우리 손길로도 좀처럼 수수한 살림살이와 수수한 사랑이 남도록 하는 일이 드물구나 싶어요.




말간 하늘에 둥실둥실 연들이 춤추고 있어. 빨간 댕기를 늘어뜨린 여자아이가 얼레를 들고 높이 뜬 연을 올려다보고 있구나. (50쪽)


초가지붕에도 돌담에도 짚을 엮어 얹었어. 돌담 위에 빨래통 같은 걸 엎어 놓았네. 오른쪽에는 줄을 매서 빨래도 널어놓았어. (74쪽)



  임금님 밥상도 문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수한 사람들 밥상도 문화 가운데 하나예요. 임금님 옷차림도 문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수한 사람들 옷차림도 문화 가운데 하나이지요. 커다란 궁궐이나 절집도 문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수한 사람들 풀집이나 흙집도 문화 가운데 하나랍니다.


  문화란 멀리 있지 않다고 느껴요.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짓는 살림살이가 모두 문화라고 느껴요. 수수한 살림집에서 수수한 사람(서민이나 시민)이 수수하게 짓는 놀이랑 웃음이랑 이야기가 바로 문화라고 느껴요. 아이들이 그리는 어머니 모습이나 아버지 모습이 바로 문화이고, 어버이가 아이한테 종이접기를 해서 내미는 작은 종잇조각이 늘 문화이지 싶어요. 집집마다 아기자기하게 태어나는 문화이고, 사람들마다 새삼스레 앙증맞게 가꾸는 문화라고 봅니다.





이 초상화는 할아버지가 독립 청원서를 내서 붙잡혔다가 풀려난 뒤에 바로 그렸다고 해. 그러니까 가슴 한쪽을 누르던 부끄러움을 어느 정도는 씻어 내린 뒤의 고단한 얼굴이야. 그림을 그리고 나서 한 달 뒤, 할아버지는 죽었어. (98쪽)


이 사람은 대금의 명인 김계선(1891∼1944)이라고 추정하고 있어. 궁중 음악가로 제례에 나가 연주를 했는데 이제 나라가 멸망해 제례도 치르지 못하고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그가 창조하는 소리의 세계에는 슬픔이 섞여 있을 것 같아. (114쪽)



  엘리자베스 키스 님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찾아와서 머물며 ‘지구별 이웃’을 새롭게 만났다고 느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국을 벗어나서 다른 나라로 찾아가서 그림을 그린다면, 우리도 이웃나라에서 ‘이웃나라 수수한 사람’을 살가이 마주하면서 그림 한 점에 담을 만하리라 생각해요. 유명인사나 관광명소를 찾아가서 그림을 그려도 재미있을 테고, 그저 수수한 사람들을 스치고 수수한 골목을 걷다가 그림을 그려도 즐거울 테지요.


  따사로운 눈길로 아이를 보살피면서 따사로운 살림을 짓습니다. 따사로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따사로운 손길로 그림을 그립니다. 따사로운 눈길로 서로 마주하면서 말도 몸짓도 차림새도 다른 사람들이 기쁜 손길이 되어 살가이 어깨동무를 합니다. 4349.1.2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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