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새롭게 살려서 쓰자고 하는 이야기를 적은 짧은 글을 이모저모 크게 손질해서 새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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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남녘과 북녘이 갈라지고 난 뒤부터 한 나라는 두 나라가 되었고, 이동안 두 나라에서 쓰는 말이 차츰 벌어져요. 나라는 같아도 고장이 다르면 말이 다르기 마련이라서 고장말(사투리)이 있지요. 고장마다 다르면서 즐겁게 쓰는 고장말이에요. 그런데, 우리 삶터에서는 남녘하고 북녘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가 되면서 ‘동무’라고 하는 살갑고 오래된 낱말이 짓밟혔어요. ‘동무’라는 낱말은 마치 북녘에서만 써야 하는 낱말인듯이 윽박지른 어른이 많았어요. 이리하여 남녘에서는 ‘친구’라는 한자말을 써야 했습니다. 남녘에서 새롭게 태어나 자라는 아이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동무’라는 낱말은 어쩐지 낯선 말로 여겨야 했어요. 그러나 ‘동무’라는 낱말은 ‘글동무·소꿉동무·어깨동무·놀이동무·길동무·책동무’ 같은 낱말에 씩씩하게 남았지요. 한 나라가 두 나라로 바뀌었어도 오래도록 사람들 삶에 뿌리내린 말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아요. 이제 우리는 남녘하고 북녘 사이에서도 기쁘고 사랑스럽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평화를 찾아야지 싶어요. 이웃에 있는 다른 나라하고도 어깨동무를 하면서 기쁘게 웃는 웃음동무도 되고 노래동무도 되며 꿈동무도 되는 삶으로 거듭나야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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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까리기름



  마치 사람 손바닥처럼 생긴 잎이 돋는 풀이 있어요. ‘아주까리’라는 풀인데, 이 풀에서 꽃이 핀 뒤에 씨앗이 여물어 열매가 맺으면, 이 열매를 얻어서 기름을 짜요. ‘아주까리기름’은 여러모로 살림을 북돋우는 구실을 해요. 우리가 쓰는 여러 가지 기름을 살피면 으레 풀씨나 풀알(풀 열매)에서 얻어요. 참기름은 참깨를 짜서 얻고, 들기름은 들깨를 짜서 얻지요. 이밖에도 해바라기씨나 포도씨를 짜서 기름을 얻고, 유채씨를 짜서 기름을 얻기도 해요. 콩알을 짜서 얻는 기름이라면 콩기름이고, 옥수수알을 짜서 얻는 기름이라면 옥수수기름이에요. 우리가 쓰는 기름을 놓고 이처럼 어느 풀씨나 풀알에서 얻은 기름인가 하고 이름을 붙이면 알아보기 쉽지요. 그렇지만 어른들은 이런 쉬운 이름보다는 ‘캐놀라유’나 ‘채종유’처럼 어려운 말을 쓰기도 해요. ‘캐놀라유·채종유’는 ‘유채기름(유채씨기름)’을 가리킨답니다. ‘아주까리기름’을 놓고도 ‘피마자유’ 같은 이름을 쓰려는 어른이 많아요. 그런데 말이지요, 시골에서 살며 아주까리풀이랑 아주까리꽃을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 어린이라면 ‘아주까리’라는 이름도 똑같이 어려우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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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까지꽃



  조그마한 봄꽃을 놓고 세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아기 손톱만큼 조그마하면서 보랏빛 꽃송이가 피는 봄꽃인데, 이를 놓고 ‘봄까지꽃·봄까치꽃·개풀알풀꽃’이라고 가리키곤 해요. 이 가운데 ‘봄까지꽃’이 옳고 알맞게 쓰는 이름이에요. 이 봄꽃은 한겨울에 볕이 포근할 적부터 떡잎이 돋고 꽃망울이 터져요. 이러다가 봄이 저물고 여름으로 접어들면 모두 시들어서 사라지지요. 이름 그대로 “봄까지 피는 꽃”이기에 ‘봄까지꽃’이랍니다. ‘봄까치꽃’이라는 이름은 이 봄꽃 이름을 어느 분이 잘못 알아듣고 시를 쓰면서 잘못 퍼졌어요. ‘개불알풀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식물학자가 붙인 이름을 한국 학자가 고스란히 옮긴 이름이고요. 세 가지 이름을 놓고 어느 이름을 쓰더라도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될 노릇이에요. 이름 때문에 꽃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이 작은 봄꽃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생각을 기울일 수 있기를 바라요. 작은 들꽃 한 송이한테는 누가 어떤 이름을 어떻게 지어서 붙일 적에 더없이 사랑스레 어울리면서 고울까요? 꽃이름은 예부터 이 꽃을 가까이 두며 아낀 사람이 붙일 만할까요, 아니면 식물학자한테 맡겨서 붙일 만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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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빛



  제비꽃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하얗게 꽃송이를 피우는 제비꽃이 있고, 노랗게 꽃잎을 벌리는 제비꽃이 있어요. 가장 흔히 볼 만한 제비꽃이라면 보랏빛입니다. 한겨울에도 볕이 잘 드는 자리에서 씩씩하게 고개를 내미는 제비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제비꽃은 으레 ‘보랏빛’이라 하는데, 보랏빛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제비꽃빛’을 쓸 만하겠구나 싶어요. 하얗거나 노란 제비꽃을 볼 적에는 ‘흰제비꽃빛’이나 ‘노란제비꽃빛’이라 말하면 될 테고요. 그래서 빛깔을 나타낼 적에 꽃빛을 놓고 여러모로 재미나게 빛깔 이름을 지어 볼 수 있어요. 감꽃빛, 살구꽃빛, 탱자꽃빛, 벚꽃빛, 개나리꽃빛, 민들레꽃빛, 모과꽃빛, 능금꽃빛, 배꽃빛, 오얏꽃빛, 복숭아꽃빛, 콩꽃빛, 배추꽃빛, 무꽃빛, 유채꽃빛, …… 그야말로 모든 꽃은 저마다 꽃빛이 다르니, 이 다르면서 고운 꽃송이하고 꽃내음을 헤아리는 빛깔말을 지을 만하지요. 꽃빛으로 빛깔을 가리키면 빛깔뿐 아니라 그윽한 냄새까지 우리 마음으로 스며들리라 느껴요.


(최종규/숲노래 . 2016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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