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쓴 글을 새삼스레 손질합니다. 예전 글을 손질하다 보면, 참 부끄럽네 싶으면서도, 한결 씩씩하게 손질할 기운을 길어올립니다. 예전에는 그때만큼 배우고 알기에 그렇게 쓰고,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 배운 넋으로 기쁘게 손질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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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방울
소나무에는 솔방울이 열립니다. 소나무 방울이라 솔방울입니다. 잣나무에는 잣방울이 맺힙니다. 잣나무 방울이기에 잣방울입니다. 오리나무에는 오리방울이 자랍니다. 오리나무 방울이니 오리방울이에요. 소나무에는 솔꽃이 핍니다. 소나무 꽃이라 솔꽃입니다. 잣나무에는 어떤 꽃이 필까요? 잣나무 꽃은 잣꽃일까요? 오리나무에는 어떤 꽃이 필까요? 오리나무인 만큼 오리꽃일까요?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솔방울’ 하나만 나옵니다. 한국말사전은 ‘잣방울’이나 ‘잣꽃’을 다루지 않고, ‘오리방울’이나 ‘오리꽃’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소나무 꽃을 ‘솔꽃’이라 밝히지 못한 채 ‘송화’라는 한자말만 다뤄요. 그러나, 숲마다 잣방울과 오리방울이 맺습니다. 숲으로 들어가면 잣꽃과 오리꽃이 흐드러집니다. 솔꽃이 피면서 퍼지는 가루는 ‘송화가루’가 아니라 ‘솔꽃가루’입니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벌레는 ‘송충이’가 아니라 ‘솔벌레’입니다. 소나무숲에서 부는 바람은 솔바람입니다. 잣나무숲에서 부는 바람이라면 잣바람이 될 테지요.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솔내음을 맡고, 잣나무가 빼곡한 곳에서 잣내음을 맡아요. 나무 한 그루를 가만히 쓰다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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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 가셔요
책이나 만화영화를 살피면 으레 “조심해!” 같은 말이 나옵니다. 아이들이 개구지게 뛰거나 달리면, 어른들이 곁에서 “조심해!”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이래저래 ‘조심’이라는 한자말을 어린 나날부터 익숙하게 듣고 씁니다. 내 어릴 적을 돌아보면, 내 둘레 어른들은 ‘조심’이라는 한자말도 더러 썼지만, 이보다는 ‘살피다’와 ‘마음 쓰다’ 같은 한국말을 한결 자주 썼어요. 그래서, 나는 어릴 적에 ‘조심·살피다·마음 쓰다’가 다 다른 말마디인 줄 여겼는데, 나중에 철이 들고 한국말사전을 읽다가, 이 세 말마디가 모두 같은 자리에서 같은 뜻을 가리킨다는 대목을 깨달았어요. 내 둘레 어른들은 이 대목을 처음부터 알았을까요? 그러고 보니 언젠가 어느 어르신이 “조심해서 들어가셔요.” 하고 들려주는 말마디를 몹시 얹짢게 여기셨어요. 그분은 “살펴 가셔요.” 하고 말을 하며 절을 해야 바른 인사말이라 여긴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조심’이라는 한자말을 좀 살펴보았더니, 이 한자말은 일제강점기 즈음부터 스며들었구나 싶더군요. 예전에는 아이들한테도 “잘 살펴야지.”라든지 “마음을 잘 써야지.” 하고 말했대요. 길을 살피고, 뜻을 살피며, 사랑을 살펴요. 둘레를 살피고, 동무를 살피며, 숲을 살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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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문·덧문
기차역에는 없지만 전철역에는 있는 문이 있습니다. 기차역에도 때때로 사람들이 복닥거리지만 전철역은 언제나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터라,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 적에 서로 다치지 않도록 하자면서 덧대어 붙인 문이 있습니다. 겹쳐서 붙인 문이 있어요. 처음에는 이 문을 가리키려고 영어로 ‘스크린도어’라는 말을 썼다고 하는데, 요즈음에는 ‘안전문’으로 고쳐서 쓰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래, 잘 고치려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안전’이라는 한자말은 그냥 써도 될 만한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안전하도록 이중으로 달아 놓은 문”이기에 ‘안전문’으로 고쳐서 쓴다고 하는데, 조금 더 살펴본다면 ‘안전문’이란 ‘겹’으로 달아 놓은 문입니다. 또는 문 하나 앞뒤로 다른 문을 하나 ‘더’ 달아 놓은 셈입니다. 이른바 ‘겹문’이거나 ‘덧문’입니다. 다치지 말자는 뜻을 살펴서 ‘안전문’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만, 다치지 말자는 뜻을 살펴서 ‘지킴문’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을 수 있어요. ‘지킴겹문’이나 ‘지킴덧문’처럼 뜻이 한결 또렷하게 이름을 붙여도 될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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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표
나는 버스표를 끊을 적에 ‘어른 표’ 하나와 ‘어린이 표’ 하나, 이렇게 두 가지를 달라고 말합니다. 기차표를 끊을 적에도 ‘어른 표’랑 ‘어린이 표’를 달라고 말해요. 극장표를 끊든 다른 표를 끊든 늘 ‘어른 표’하고 ‘어린이 표’를 말합니다. 그런데 ‘표 파는 곳’을 살펴보면 ‘어른 표’나 ‘어린이 표’라는 이름을 거의 안 씁니다. 흔히 쓰는 이름은 ‘성인 표’하고 ‘학생 표’예요. 어린이라면 모두 학교를 다니기에 학생으로 여겨서 ‘학생 표’라고 써야 할까요? 학교를 안 다니는 어린이도 표를 끊을 적에는 ‘어린이 표’가 아닌 ‘학생 표’라고 말해야 할까요? 더 살펴보면, ‘푸름이 표(청소년 표)’는 아직 따로 없기 일쑤예요. 이때에는 ‘중학생 표’나 ‘고등학생 표’이기 일쑤이고, 때로는 ‘중·고등학생 표’라고 하지요. 더욱이 한국에는 ‘대학생 표’가 따로 있기까지 합니다. 배우는 사람인 학생을 섬기려는 마음에서 ‘어른이 아닌 사람’은 모두 ‘학생’으로 여길는지 모르지만, 어린이도 푸름이도 그저 어린이와 푸름이로 마주하며 아끼는 마음이 되어서 이름을 알맞고 사랑스레 붙이고 불러 줄 수 있기를 빌어요.
(최종규/숲노래 . 2016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