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쓴 '말이랑 놀자'를 손질한 글을 새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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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보
작은 일에도 으레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울음이 많은 아이를 가리켜 ‘울보’라 합니다. 작은 일에도 으레 웃는 아이가 있습니다. 웃음이 많은 아이를 가리켜 곧잘 ‘웃보’라 합니다.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울보’는 실어도 ‘웃보’를 안 싣습니다. 우는 아이를 가리키는 이름은 한국말사전에 나오지만, 웃는 아이를 가리키는 이름은 한국말사전에 안 나옵니다. 예부터 누구나 흔히 웃으면서 살아가니 “잘 웃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은 따로 없을까요? 누구나 웃으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잘 웃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을 만하지 않을까요? 잘 웃어서 웃보이고, 잘 울어서 울보이니, 잘 먹어서 ‘먹보’입니다. 그러면 잘 노는 사람은 ‘놀보’라고 하면 어떠할까요?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일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샘을 잘 내는 사람은 ‘샘보’라 할 만하고, 미운 짓을 잘 하는 사람은 ‘밉보’라 할 만해요. 잠꾸러기는 ‘잠보’라고도 하고, 꾀를 잘 내기에 ‘꾀보’라 해요. 뚱뚱하기에 ‘뚱보’라면 마른 사람한테는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요? 늘 툭탁거리거나 걸핏하면 싸우는 사람은 ‘싸움보’인데 언제나 따스한 사랑으로 동무나 이웃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사랑보’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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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물
오월로 접어들어 드디어 들딸기를 땁니다. ‘첫물’ 들딸기입니다. 처음으로 익는 들딸기는 아직 통통하지 않습니다. 첫물이 지나고 나서 새로 돋는 들딸기는 차츰 통통하게 익으며, 새빨간 빛이 한결 곱습니다. 오이나 토마토를 심은 분이라면 첫물 오이와 토마토가 나온 뒤부터 꾸준히 새 오이와 토마토를 얻습니다. 씨앗을 받으려면 첫물 열매를 갈무리하곤 해요. 처음 맞이하기에 첫물입니다. 처음 누리기에 첫물입니다. 처음 얻으면서 처음으로 맛보기에 첫물입니다. 제철에 먹는 첫물 들딸기란 싱그러운 오월빛이 고스란히 녹아든 사랑스러운 숨결입니다. 제철에 먹는 숱한 ‘첫물 열매’는 그 철하고 달에 서린 따사로운 햇볕하고 바람하고 빗물 냄새랑 느낌이 골고루 깃든 숨결이에요. 처음으로 얻기에 첫물이고, 처음으로 내딛기에 ‘첫발’입니다. 아기는 첫발을 떼며 걸음마를 익히고, 우리는 무엇이든 처음으로 새롭게 배우려는 첫발을 떼며 씩씩하게 일어섭니다. 처음으로 먹기에 ‘첫술’이기에, 첫술에 배불러 하지 않으면서 느긋하고도 차분하게 몸짓을 다스립니다. ‘첫손’으로 꼽을 만한 ‘첫길’로 나아가고, ‘첫마음’을 고이 건사하면서 ‘첫꿈’을 가슴에 살며시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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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소금
나는 왜 언제부터 ‘가는소금’이라고 말했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퍽 어릴 적이었지 싶은데, 불쑥 ‘굵은소금·가는소금’을 말하다가 동무가 놓은 퉁을 들었어요. “얘, ‘가는소금’이 어디 있니? ‘고운소금’이지!” 이러구러 몇 해 지나 어느 날 또 ‘가는소금’이라고 말했는데, 어머니가 ‘고운소금’으로 바로잡아 줍니다. 얼마 뒤 또 ‘가는소금’을 말하고, 이웃 아주머니가 ‘고운소금’으로 바로잡아 줍니다. 한참 여러 해가 흐르고 흐른 요즈음, 우리 집 곁님이 ‘고운소금’ 이야기를 꺼냅니다. 곰곰이 돌이키니, 나는 어릴 적부터 참 끈질기게 ‘가는소금’이라 말했구나 싶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곱다’라는 낱말을 ‘아름답다’라는 뜻으로만 써야 한다고 잘못 알기 때문일 수 있어요. 어쩌다 입에 한 번 붙은 말씨가 안 떨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소금도 밀가루도 잘게 빻을 적에는 ‘곱다’라는 낱말로 가리킵니다. ‘가늘다’라는 낱말로 가리키지 않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굵은소금·가는소금’이 올림말로 나오고, ‘고운소금’은 올림말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 어릴 적 동무와 이웃을 비롯해 곁님과 어머니와 할머니는 모두 ‘고운소금’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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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 손잡이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가는 길입니다. 누렇게 고운 가을 들녘을 달리는데 내리막을 만납니다. 빠르기를 줄이려고 자전거 손잡이에 붙은 ‘브레이크’를 잡습니다. 샛자전거에 앉은 큰아이가 이때 뒤에서 묻습니다. “아버지 뭘 잡았어요?” “응? 멈추는 손잡이 잡았어.” “멈추는 손잡이?” “응, 멈춤 손잡이.” “아, 그렇구나.” 0.0001초쯤 ‘브레이크’를 잡는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일곱 살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고쳐서 이야기해 줍니다. 자전거를 만드는 회사에서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거의 다 ‘브레이크 레버’라는 영어만 씁니다. ‘브레이크 손잡이’라 말하는 사람을 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멈춤 손잡이’나 ‘멈추개’라 말하는 사람은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멈추개’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도 오르지만, 이 낱말을 제대로 살피거나 익혀서 알맞게 쓰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도 ‘멈추개’ 같은 말을 안 가르치겠지요?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에서도 ‘멈춤 손잡이’ 같은 말을 안 쓰겠지요? 그렇지만 ‘멈추는 손잡이’라 하니 일곱 살 어린이도 알아들어요.
(최종규/숲노래 . 2016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