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실 각시
the yarn princess, 1994
어머니 자리에 서는 사람은 온마음을 기울여서 아이를 사랑합니다. 어머니 자리에서는 언제나 온마음을 쏟는 사랑으로 삶을 짓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버지 자리에서도 이와 같아요. 온마음을 기울이는 사랑이 아니라면 아이를 마주할 수 없습니다. 온마음을 쏟는 사랑일 적에 비로소 살림을 알뜰살뜰 지을 수 있어요.
사랑이 아니고서는 삶이 될 수 없고, 사랑이 아니라면 살림을 지을 수 없습니다. 아주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얼거리가 어느덧 뚝 끊어지거나 싹둑 잘렸지 싶습니다.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이 같은 이음고리가 자꾸 끊어지거나 잘리지 싶어요. 그렇지만 이 대목을 잊지 않는 사람은 어김없이 있고, 이 대목을 자꾸 되새기거나 되살리면서 스스로 새로 일어서는 삶과 사랑과 살림이 되려고 힘쓰는 사람이 있어요.
영화 〈털실 각시(the yarn princess)〉는 털실처럼 보드랍고 고우며 포근한 숨결인 어머니 사랑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엉키기 쉽고, 때로는 끊어질 동 말 동하는 털실이지만, 이 털실로 짠 옷은 참으로 보드랍고 고우며 포근합니다. 털실로 짠 옷이 헝클어지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짜거나 뜰 수 있어요. 게다가 아이들 몸이 자라는 결에 맞추어 얼마든지 다시 풀어서 새로 짜거나 뜰 수 있지요.
영화 〈털실 각시〉에 나오는 어머니는 ‘어머니가 되려고 태어난 숨결’이고, 이러한 숨결대로 아이들을 사랑으로 마주합니다. 사회에서는 어딘가 떨어져 보이는 사람일는지 몰라도, 남보다 느리거나 더디다고 할는지 몰라도, 아이들 앞에서 더없이 따사로운 품이고 곁님 앞에서도 가없이 너른 품입니다. 사회에서 보기에 할 줄 아는 일이 없다고 할 테지만, 못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할 수 있어요. 다만, 느리거나 더뎌 보이겠지요. 다른 어머니나 다른 사람처럼 후다닥 해내지는 못하겠지요.
아이라면 어버이 사랑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압니다. 아이라면 어버이 사랑을 물질이나 재산이나 겉차림으로 읽지 않습니다. 아이라면 어버이 사랑을 가슴으로 읽을 뿐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노래해요. 어버이도 이와 같지요. 아이한테 물려주거나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사랑은 책이나 지식이 아닌, 온마음을 기울여서 빚는 따사로우면서 너른 살림으로 물려주거나 보여주거나 가르칩니다.
누구나 아이로 태어나서 어른이 됩니다. 느즈막하게 철이 들 수 있고, 일찌감치 철이 들 수 있는데, 모든 아이는 어른으로 자랍니다. 그리고 모든 어른은 아이로 태어나서 살아온 만큼 아이다운 넋을 언제나 가슴 가득 건사하지요. 아이다운 맑은 눈빛으로 사랑을 북돋우고, 아이답게 밝은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합니다. 어버이가 어버이다울 수 있는 까닭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에 즐겁고 슬프며 아프거나 기쁜 모든 이야기를 찬찬히 아로새겨서 들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어머니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다운 까닭은 ‘내가 겪은 일을 안 물려주’거나 ‘내가 겪은 일을 물려주’겠다는 넋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서로 아끼며 헤아리는 사랑이 되어 삶을 짓겠다는 넋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어버이는 하나하나 새롭게 배웁니다. 아이를 지킬 뿐 아니라 사랑하려고 삶을 새롭게 배웁니다. 아이를 돌볼 뿐 아니라 가르치려고 사랑을 새롭게 배웁니다. 아이를 이끌 뿐 아니라 아이 스스로 일어서도록 일깨우려고 살림을 새롭게 배웁니다.
배우는 사람이기에 어버이요, 배울 줄 아는 사람이기에 어른입니다. 배우는 사람이기에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이기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아이는 기쁨으로 사랑을 가르치는 어버이 곁에서 빙그레 웃으면서 배울 수 있는 숨결입니다. 슬픔이나 괴로움이 있어도 어버이가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를 똑똑히 알아채면서 그예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넋이 바로 아이입니다. 4348.12.3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https://www.youtube.com/watch?v=MOPaIUNKd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