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탐구 생활 - 할머니라는 지혜의 창고에서 발견한 삶의 보물들, 2015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선정작(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정청라 지음, 임종진 사진 / 샨티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책 읽기 94



할머니한테서 받은 사랑을 돌아보기

― 할머니 탐구 생활

 정청라 글

 임종진 사진

 샨티 펴냄, 2015.11.30. 15000원



  내 어릴 적을 더듬으면, 나는 할머니한테서 사랑을 받은 일을 거의 못 떠올립니다. 갓난쟁이일 무렵에는 여러 할머니한테 둘러싸여 사랑을 받았을는지 모르나, 어느 만큼 나이가 든 뒤에는 우리 집 할머니를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작은아버지 댁에서 살던 할머니는 설이나 한가위가 되어야 비로소 얼굴을 보다가, 병원에서 몸져누운 뒤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을 뿐입니다.


  할머니가 곁에 없이 지내던 어린 나날 왜 우리 집에서는 할머니가 함께 안 사나 하고 생각해 보는데, 할머니 한 분이 큰집과 작은집에 함께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형제 자매가 함께 살면 할머니가 함께 계시겠지만, 형제 자매가 따로 사니까 할머니는 여러 형제 자매 가운데 한 집에 사셔야겠지요.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안 계셨지만 마을에서는 할머니를 어디에서나 마주했습니다. 할머니는 누구나 느린 걸음이었고, 짐을 잘 들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누구나 찬찬히 말씀을 하고, 따사로운 목소리와 손길로 다가오셨습니다.



“여그서 걸어갈 때는 아파 죽겄어. 근디 산에 들어가믄 아픈 줄도 몰라. 꼬사리 끊다 보믄 오지가꼬 암시랑토 않당께. 내일은 집이도 같이 가. 고롱구테(골짝 이름)로 갈라니께.” (19쪽)


어쩌면 하느님도 고사리며 산더덕 같은 나물을 미끼로 사람들을 산으로 불러들이시는 게 아닐까? (24쪽)




  정청라 님이 멧골자락에서 오붓하게 지내는 살림살이 이야기를 담고, 이러한 살림살이를 임종진 님이 사진으로 살가이 담은 《할머니 탐구 생활》(샨티,2015)을 가만히 읽습니다. 정청라 님은 곁님하고 아이들하고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지냅니다. 시골자락에는 거의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입니다. 아니, 시골자락에는 젊거나 어린 사람은 모조리 도시로 나가고 없다고 해야겠지요. 마을에서 한 시간쯤 걸어서 나와야 비로소 군내버스가 지나가는 곳에 이른다고 하니, 이런 멧골에서 조용히 살려고 꿈을 키우는 어린이나 젊은이는 매우 드물다고 할 만합니다. 자가용 없이 이런 멧골에서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주 드물다고 할 만하고요.


  그렇지만 정청라 님네 집안에 처음부터 자동차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자동차가 있었어도 이 자동차를 탈 수 없는 살림이 되었다고 할까요.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그냥 자동차하고 살며시 멀어진 살림이라고 할까요.


  자동차를 달려서 읍내나 면내를 다녀올 적에는 이대로 재미있습니다. 두 다리로 걷거나 버스를 타고 읍내나 면내를 다녀올 때에는 이대로 즐겁습니다. 마을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먼먼 옛날부터 걸어서 그 길을 오가셨겠지요. 마을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이녁이 어릴 적부터 고개를 넘고 골짜기를 지나면서 마실을 다니셨겠지요.



지난봄, 마침 아울이와 산에 오르다가 할머니가 고추 이랑 만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가운데 괭이질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고, 할머니는 천천히 한 줄씩 고랑을 그려 나갔다. 고요히 숨을 내쉬는 것처럼, 한 땀씩 바느질을 하는 것처럼, 너무나 편안하고 가벼운 괭이질에 나는 가슴이 숙연해졌다. (44쪽)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꽃과 함께 살아가는 동래 할머니를 바라보며 꽃이 주는 위안이 얼마나 큰지 생각했다. (60쪽)





  멧길을 걷는 동안 멧내음을 마십니다. 들길을 걷는 사이 들내음을 마셔요. 숲길을 걷는 내내 숲내음을 받아들입니다. 나무를 하고 나물을 하면서 멧자락도 들도 숲도 모두 마음으로 고이 안습니다. 오랜 나날 나무를 하고 나물을 하던 길이기에 멀지도 힘들지도 않습니다. 철 따라 어느 나물을 훑을 만한지 서로 알고, 철 따라 어떤 숨결이 멧골과 숲에 깃들어 이웃이 되는가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할머니 탐구 생활》을 쓴 정청라 님으로서는 마을 이웃이 모두 할머니요 할아버지이니, 할머니하고 할아버지를 살펴봅니다. 마을 할머니는 마을 젊은 집안을 찬찬히 살펴볼 테지요. 젊은 아낙은 늙은 할매를 지켜보고, 늙은 할매는 젊은 아낙을 지켜보아요. 젊은 아낙은 늙은 할매를 따사로이 마주하고, 늙은 할매는 젊은 아낙을 따사로이 마주합니다. 아이들은 어머니 아버지뿐 아니라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에서 함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랍니다. 마음으로 이웃이 되고 사랑으로 동무가 되는 살림살이를 찬찬히 물려받고 지켜보면서 자라요.



두 발로 걷는 길에서는 풍경과 하나로 어우러져 숱한 이야깃거리를 주워 담을 수가 있었다 … 차가 없어진 것을 무척 서운해 했던 다울이도 자전거나 수레를 실컷 탈 수 있어서 좋은지 나들이 갈 때마다 연신 노래를 불렀다. (91쪽)


잘은 몰라도 도시에 나가 길 가는 젊은 사람 붙잡고 나락이 뭔지 아냐고 물으면 대답 못할 사람도 수두룩하지 않을까 … 나는 그와 같은 무지와 무관심이 ‘쌀 수입 전면 개방’이라는 황당무계한 정책을 펼치게 하는 거라고 본다. 백성이 어리석으면 권력자가 백성을 함부로 보고 제 뜻대로 쥐고 흔들게 마련이니까. (107∼108쪽)





  할머니는 저마다 이야기꾼입니다. 할머니마다 오랜 나날 천천히 걸어온 살림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서로서로 노래꾼입니다. 할머니마다 오랫동안 찬찬히 일하고 살림하며 부른 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젖은 이야기이든, 웃음이 묻어나는 노래이든, 할머니는 이녁한테 아이와 같을 젊은 아낙한테 도란도란 말을 걸고 받습니다. 두멧자락 할매가 쓰는 투박한 고장말을 모두 다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어도, 포근하면서 살가운 숨결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귀로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듣고 몸으로도 듣습니다. 할머니는 말에 앞서 몸이요,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삶으로 모두 다 보여주고 알려주거든요.



“이것도 모르간디? 나는 통 이렇게 꿰매서 신어. 비 오는 날이믄 양말 꿰매는 것도 재미져.” (122쪽)


가지러 온다면 모를까 뭐하러 보내느냐고 그랬더니 “주고 자픈디? 뭐 있으믄 다 주고 자퍼”라고 대답하시며 그리움에 젖은 눈망울을 보이신다. (162쪽)


“너무 뜨거와도 안 되고 덜 뜨거와도 안 돼아. 너무 뜨거우믄 메주가 안 뜨고 거죽만 깨까시 말라붙더랑께. 메주가 추우믄 검은곰팡이가 나불고. 그란께 불 조절을 잘해야 써.” “어떻게 잘이요?” “워따, 그걸 어떻게 말로 혀. 집이가 적당히 알아서 해야제.” (177쪽)



  몸으로 겪은 삶을 몸으로 들려줍니다. 몸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몸으로 듣습니다. 《할머니 탐구 생활》을 쓴 정청라 님은 멧골마을에 깃든 작은 집에서 그야말로 작은 풀꽃 같은 할머니들을 마주하면서 이 작은 풀꽃 한 송이에서 온누리를 포근히 감싸는 기운을 느낍니다. 크고 밝으며 따스한 해님이 지구별을 감싸고, 작고 낮으며 조용히 피어나는 풀꽃이 지구별을 덮으면서 해님을 마주 바라봅니다. 넉넉하고 푸르며 싱그러운 숲이 마을을 어루만지고, 조그맣고 여리며 고요한 풀씨 한 톨이 지구별이 고루 퍼지면서 숲이 새롭게 자라도록 북돋웁니다.


  할머니 한 분은 풀꽃이요 풀씨라고 할 만합니다. 할머니 한 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풀꽃 같은 노래이고 풀꽃 같은 사랑이라고 할 만합니다. 할머니 한 분한테서 듣는 이야기는 풀꽃 같은 사랑이 어리는 이야기이고, 할머니 한 분한테서 받는 사랑은 숲을 이루는 작은 풀씨 같은 품에서 피어나는 사랑이라고 할 만합니다.





“걱정 안 해도 되겄네. 애기 배꾸리가 든든허니 꽉 찼구만. 배 곯은 아그는 배꾸리가 이러지를 않는단 말여. 내가 새대기 때, 이 마을 아그들 동냥젖 많이 묵여봐서 안당께.” (254쪽)


내가 밭일에 지쳐 고단해 하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쉬다 해라!” 하는 설매실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그때가 쉬는 시간이 된다. 할머니가 어르신 몰래 가져온 소주병을 꺼내 큰 컵으로 하나 가득 따라 주시면 얼떨결에 받아 마시고는 알딸딸하게 취한다. (262쪽)



  오늘날 시골은 젊은이도 어린이도 자꾸 사라지는 고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시골은 할매와 할배한테서 살가우면서 슬기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고장이기도 합니다. 손수 삶을 짓는 살림살이를 보고 듣고 배우면서 마주할 수 있는 곳이 시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손수 사랑을 길어올린 보금자리를 보고 듣고 배우면서 어깨동무할 수 있는 곳이 시골이라 할 만합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한 마디에 마음이 놓이고, 할머니가 건네는 이야기 한 마디에 마음이 다사롭습니다. 가슴으로 아기를 품은 숨결로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로 살며 아이를 돌보는 사이에 할머니가 되며, 할머니는 다시 천천히 아이다운 마음으로 거듭나면서 흙내음 어린 웃음을 짓습니다. 시골 아낙으로 살림을 짓는 정청라 님은 이 흙내음 어린 웃음을 날마다 보고 듣고 마주하는 사이에 아주 천천히 나이를 먹고 살림을 먹고 슬기를 먹고 이야기를 먹으면서 아이들하고 새롭게 자랄 테지요. 먼 뒷날 아이들이 씩씩하고 의젓하게 자라서 짝님을 만나 아이를 낳을 무렵이 되면, 멧골마을을 예쁘면서 알뜰히 지키고 가꾸는 새로운 할머니가 되실 테고요. 4348.12.2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