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하야후루 16
스에츠구 유키 글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586



기쁨을 누릴 수 있을 적에 아름답게 웃지

― 치하야후루 16

 스에츠구 유키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2.9.25. 4500원



  ‘카루타(かるた/carta)’를 하는 아이들이 나오는 만화책 《치하야후루》는 2015년까지 스물일곱째 권까지 한국말로 나옵니다. 앞으로 이 만화책이 몇 권까지 나올는지 모르나 꽤 오랫동안 더 나오리라고 느낍니다. 나는 처음에 ‘카루타’가 뭔가 하는 마음에 이 만화책을 읽었고, 고등학교를 다니며 새로운 삶과 꿈을 바라보는 아이들 몸짓이나 삶을 잘 그리는구나 싶어서 이 만화책을 보다가, 권수가 늘면서 대회에 나가서 솜씨를 겨루는 흐름으로만 나오기에 더 읽을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곰곰이 살피면, 적잖은 일본 만화는 ‘전국 대회’에 나가서 이기려고 하는 몸짓이 ‘긴 연재만화’를 이루는 뼈대나 줄거리가 되곤 합니다. 초밥 이야기이든, 라면 이야기이든, 피아노 이야기이든, 노래나 악기나 야구나 축구 이야기이든, 참말 일본 만화는 전국 대회를 무척 좋아하는구나 싶어요.


  그렇다고 전국 대회가 나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참 온갖 놀이를 놓고도 전국 대회를 벌이는구나 싶어서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제기차기나 공기놀이로도 전국 대회를 하는 셈이라고 할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하모니카 전국 대회’라든지 ‘피리 전국 대회’도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그림 대회나 글쓰기 대회가 있고, 바둑 대회와 장기 대회가 있듯이 오목 대회도 재미있을 테고, 농구 대회나 배구 대회를 겨룰 만합니다. 다만 우리 삶을 이루는 수많은 놀이나 운동이나 솜씨를 놓고서 꼭 대회까지 치러서 겨루어야 하는지 아리송하기도 합니다.



“타이치, 나한테 팀이란 오직 ‘타이치와 치하야’뿐이었다.” “말하고 보이 부끄럽네. 됐다, 치아라. 그거랑은 상관없지만, 난 대학은 도쿄에서 다닐라 칸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 어느 학교 칠 건데?” “추천받을 수 있는 학교. 내일 개인전에 우승하고 도쿄애 갈 거다.” (17∼18쪽)



  한국에 윷놀이 대회나 제기 대회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연날리기 대회나 자치기 대회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고무줄 대회라든지 땅따먹기 대회가 있을까요? 이런 대회까지 누군가 열 수 있습니다만, 대회를 열어서 ‘전문가’가 나오도록 하기보다는 여느 삶자리에서 즐겁게 누리면서 웃음꽃을 피울 때에 그야말로 ‘즐거움’이요 ‘기쁨’이 되리라 느낍니다. 빵 굽는 솜씨나 밥 짓는 솜씨를 겨루는 전국 대회가 있어도 재미있을 테지만, 솜씨를 겨루는 대회보다는 마을살이를 즐겁게 밝히는 조촐한 잔치마당이 있을 적에 한결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어떤 대회가 있으면 ‘대회에 나가려는 생각’에 오랫동안 어느 한 가지 일이나 놀이만 합니다. 처음에는 재미난 놀이나 일이었을 수 있지만, ‘대회에 나가려고 하’면, 이때부터 사뭇 달라져요. 처음에는 배구나 축구나 야구나 농구도 재미있게 했어도, 대회를 앞두고는 ‘훈련’이나 ‘연습’으로 바뀝니다. 이제껏 그냥 재미나게 놀다가 대회 때문에 ‘꼭 이길 수 있도’록 작전을 짜고 계획을 세우지요.


  작전 짜기나 계획 세우기도 이 나름대로 머리를 쓰면서 북돋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밥 먹고 연습과 훈련만 하면서 온 하루를 보낸다면? 연습과 훈련으로 온 하루를 보낼 뿐 아니라 기나긴 해를 보낸다면? 축구 전문가나 야구 전문가로 아이들을 키운다면? 그러니까 만화책 《치하야후루》에 나오는 아이들이 ‘카루타 전문가’가 되어 오직 카루타 한 가지만 아주 빼어나게 잘 하는 어른이 된다면?



‘왼손으로도, 이렇게 필사적으로, 즐거운 듯이. 그러고 보면, 처음 치하야에게 한 장을 뺏겼을 때도, 왼손이었지. 재미있겠다. 얼마나 즐거울까. 치하야와 하는 카루타는.’ (83∼85쪽)


“쓰는 손을 다쳐서 힘들겠네. 나도 오른손으로 할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109쪽)



  바둑을 잘 하는 사람은 하루 내내 바둑만 생각하겠지요. 아니, 바둑 전문가가 되어 바둑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라면 하루 내내 바둑만 생각하겠지요. 노래를 잘 불러서 노래로 먹고살 수 있습니다. 이른바 전문 가수가 될 수 있어요. 그러면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노래만 잘 부르면 되고, 밥은 못 짓거나 살림은 못 하거나 사랑은 영 모르거나 이웃은 하나도 헤아리지 못하거나 동무는 조금도 못 만나도 될 만한지 궁금합니다. 어느 한 가지를 잘 하기에 다른 여러 가지는 못 할 수 있습니다만, 잘 하는 한 가지만 해야 할는지, 아니면 스스로 새로운 삶과 살림을 찾거나 살피는 길은 안 걸어도 될는지 가만히 물어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만화책 《치하야후루》를 가로지르는 줄거리나 이야기는 그리 나쁘지 않지만, 권수가 이어지면서 ‘전국 대회로 더 깊이 빠지는’ 흐름은 썩 재미있지 않다고 할까요. 더 빠르고, 더 날렵하고, 더 매서우며, 더 힘센 ‘특급 선수’로 거듭나는 모습이 되어야 비로소 ‘성장 이야기(성장만화/성장소설)’라고 해야 할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퀸이랑 만났는데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지? 어떻게? 보고 싶다. 아라타와 시노부의 결승전.’ (153쪽)


‘같은 급인 상대를 다섯 번 연속으로 이기는 걸, 왜 지금까지 못했을까?’ (165쪽)



  기쁨을 누릴 수 있을 적에 아름답게 웃습니다. 기쁘게 배우고 어우러질 적에 그야말로 환하게 노래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카루타 놀이’가 태어났을 적에는 그야말로 재미나게 놀고, 기쁘게 어우러지며,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우려는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카루타 놀이에 쓰는 ‘백 장짜리 카드’는 그냥 카드가 아니라 ‘짤막하게 읊은 노래를 적은 종이’입니다. 사랑을 노래하고 숲을 노래하며 삶과 마을과 꿈을 노래하는 이야기가 깃든 종이예요.


  어느모로 본다면 ‘노래종이’나 ‘시를 적은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루타라는 놀이를 즐기면서 노래(시)를 더 깊이 살피고, 카루타라는 놀이를 여럿이 둘러앉아서 하는 동안 노래(시)를 더 넓게 돌아보면서, 참말로 도란도란 이야기잔치를 누리는 셈이라 할 만해요.


  한국에서도 이런 놀이를 해 볼 수 있을 테지요. 종이를 백 장이든 이백 장이든 쉰 장이든 마련해서, 이 종이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짤막하게 적으면서 주거니 받거니 뺏거니 나누거니 하면서 놀 만합니다. 노래 한 마디로 꿈을 키우고, 놀이 하나로 웃음을 북돋웁니다. 글 한 줄로 사랑을 가꾸고, 이야기잔치를 열어서 기쁨을 한껏 살찌웁니다. 4348.12.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12-27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과 애니 때문에 우리 한시와 하이쿠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서요..물론 언어의정원도 거기 한 몫 했고요.
좋은 소개 잘 읽고 가요!^^

숲노래 2015-12-27 01:48   좋아요 1 | URL
카루타라고 하는 놀이가
일본 사회에서 `옛 시`를 즐겁게 익히면서
쉽게 부를(읊을) 수 있도록 빚었다고 합니다.

이런 놀이는 우리 스스로도 재미나게 살려서
아이들하고 새롭게 즐길 만하겠구나 하고 느껴요.

[그장소] 2015-12-27 01:51   좋아요 0 | URL
백인 백수 ㅡ라는 데에서 온 거죠..대회가 계속되면 앞에서 시를 읊는 장인이 특유의 목소리를 돋궈서
낭송하고 그 시의 속도에 맞춰 카드를 날리고하죠..
우리도 그런 좋은 놀이를 좀 만들면.. 저도 바라곤 ㅡ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