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지음, 노승영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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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3



‘말’을 빼앗겨 ‘자급자족’을 못하는 ‘그림자 삶’

― 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글

 노승영 옮김

 사월의책 펴냄, 2015.12.1. 15000원



  즐겁게 일하려고 하는 마음일 적에는 언제나 즐겁게 일할 수 있습니다. 즐겁게 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면 아무리 돈을 많이 받는 일자리를 얻더라도 즐거움이 찾아들기 어렵습니다.


  즐겁게 먹으려고 하는 마음일 적에는 언제나 즐겁게 먹을 수 있습니다. 즐겁게 먹으려는 마음이 아니라면 아무리 대단한 곳에서 대단하다는 대접을 받더라도 즐거운 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남이 나를 즐겁게 해 주기에 즐거울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할까요. 내가 스스로 즐거운 삶으로 나아가기에 즐겁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셈이라고 할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학교 교육은 유전적 차이를 왜곡해 신분 하락 자격증을 발급하는 것과 다름없고, 건강의 의료화는 감당 가능하고 유효적절한 한도를 훨씬 넘는 의료 수요를 발생시킴으로써 상식적인 의미의 ‘건강’ 즉 환자의 유기적 대처 능력을 떨어뜨린다. 또한 운송 부문에서는 출퇴근 시간대에 차량이 몰림에 따라 허비되는 시간이 늘어나고, 이동 수단의 자유로운 선택 폭이나 상호 접근성 모두가 줄어든다. (21쪽)



  이반 일리치 님이 쓴 《그림자 노동》(사월의책,2015)이 새롭게 나옵니다. 이 책은 1988년에 분도출판사에서 처음으로 한국말로 옮겼지 싶은데, 그동안 몇 차례 새 옷을 입고 나오기도 했으나 이내 판이 끊어졌습니다. 널리 읽힐 만한 책이기에 꾸준히 새로 나오지만, 제대로 읽히지 못한 책이기에 자꾸 판이 끊어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인문책 《그림자 노동》은 어떤 줄거리를 다룰까요? 무엇보다도 책이름으로 붙은 ‘그림자 노동’이란 무엇인가 하는 줄거리를 다룹니다. ‘임금 노동’ 밑바닥에 그림자처럼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시커멓게 짓눌린 채 끙끙 앓는 ‘그림자가 되어 버린 노동’을 다루어요. 그리고, ‘그림자 노동’이 태어나도록 이끈 몸짓과 사람들과 물결이 무엇인가를 다루지요.



자급자족 활동이 점차 희귀해짐에 따라 모든 무급 활동은 가사 노동과 비슷한 구조를 띠게 된다. 성장 지향적 노동은 유급이건 무급이건 획일화되고 관리되는 활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9쪽)


여성들은 집안일을 하면서 벌지 않고 소비만 하는 것이 과연 특권인지 묻는다. 다시 말해 의무적인 소비의 패턴에 매여 있느라 사실상 질 낮은 일에만 내몰리고 있는 게 아닌지 묻는다. 학생들은 학교 다니는 것이 배우기 위해서인지 스스로를 마비시키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인지 묻는다. (57쪽)



  지구별 곳곳에 ‘그림자 노동’은 왜 생길까요? 이반 일리치 님은 이 실마리를 풀려고 ‘엉킨 실타래’를 하나씩 벗기는데, 실마리를 하나씩 찾으려고 하면서 ‘말’이라고 하는 대목을 마주합니다.


  아니, ‘일(노동)’을 다루는데 ‘말’이라니? 왜 그림자 노동은 ‘말’에서 모든 실타래가 비롯하는지?


  그야말로 수수께끼라고 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말이 무엇이요 말을 정치권력자가 어떻게 다루려 했는가를 돌아보고 짚고 살피고 생각하고 헤아릴 수 있다면, 그림자 노동이 비롯한 자리를 알아차릴 만하고, 그림자 노동을 걷어치우는 길을 찾아낼 만합니다.


  이반 일리치 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한테 다시금 힘주어 말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서기(자급자족)’를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걸림돌을 살피는 실마리가 바로 ‘말’에 있고, 말을 어버이가 집에서 가르치지 않고 ‘국가기관이 세운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려고 하는 자리에서 그림자 노동이 태어난다고 외쳐요.



(스페인에서) 네브리하의 바람은 훗날 교회가 쓴 금지의 방법보다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쇄물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민중의 토박이말을 문법학자의 언어로 대체하고 싶어 했다. 이 인문주의자가 제안한 것은 구어를 표준화함으로써 인쇄라는 신기술을 토박이 영역으로부터 빼앗아버리는 것이었다. (73쪽)


네브리하가 문법을 가르치려고 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읽기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여왕에게 권력과 권위를 달라고 청원한 이유는 자신의 문법을 이용해 읽기의 무정부적 확산을 가로막기 위해서였다 … 그의 계획이란 제국의 동반자를 침착하게 제국의 노예로 바꾸는 것이었다 … 토박이말로부터 가르치는 언어로의 근본적인 변화는 모유에서 분유로, 자급자족에서 복지로, 사용가치를 위한 생산에서 시장가치를 위한 생산으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78, 79, 80쪽)



  이반 일리치 님은 에스파냐(스페인) 이야기를 불쑥 꺼냅니다. 에스파냐 어느 지식인이 ‘에스파냐 곳곳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쓰던 고장말(사투리)’을 더는 못 쓰게 하면서 ‘표준 에스파냐말(국가 통제 표준말)’만 쓰도록 할 때에, 에스파냐 사람들(민중)은 ‘여왕 폐하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노예로 부릴’ 수 있다고 외칩니다. 중앙집권 권력을 이루고, 왕권을 더욱 튼튼히 다질 뿐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놀라우면서 가장 무시무시한 일이란 바로 ‘국가 표준말’을 세워서, 사람들이 ‘국가 표준말’로만 ‘의사소통’을 하도록 시키는 데에 있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뚱딴지 같다고 여길 만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릎을 칠 만하리라 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그림자 노동》에서 잘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아주 먼 아스라한 옛날부터 ‘말’은 ‘여느 집’에서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아이한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말을 가르친다면서 나라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 학교를 짓거나 교사를 키우거나 교과서를 엮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비롯해서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살림살이는 모든 마을 모든 집에서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던, 돈으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고 스스로 물려주고 물려받은 아름다운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는 정해진 대로 말하는 법을 배운다. 가난뱅이가 부자처럼 말하고, 환자가 건강한 사람처럼 말하며, 소수가 다수처럼 말하도록 하는 데 돈이 쓰인다. 우리는 아이와 교사의 언어를 개선하고 교정하고 확장하고 갱신하는 데 비용을 지출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전문용어에는 더 많은 돈을 쓰고, 고등학교에서 십대들이 이 용어를 맛보도록 하는 데는 더더욱 많은 돈을 쓴다. (112쪽)


이 부부는 자녀 앞에서까지 ‘인 로코 마기스트리’ 즉 ‘교사의 입장에’ 서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 없이 자라는 셈이었다. 두 어른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향해 말끝마다 ‘교육’을 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말하는 본보기를 보였고, 내게도 그리 해 달라고 부탁했다. (130∼131쪽)



  아이한테 말(을 비롯해서 온갖 지식)을 가르칠 적에 학교에 보내는 일이 ‘사람 역사’에서 대단히 짧습니다. 게다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친 어버이는 말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말을 가르친 어버이는 아이가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모두 가르쳤어요. 여느 보금자리인 집에서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운 아이들은 누구나 손수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살림을 몽땅 배웠지요.


  한국 사회를 돌아보아도 이 대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겨레는 조선 봉건 사회일 적에도 일제강점기 사회에서도 분단이 되고 전쟁이 터지던 때에도, 시골에서 여느 마을 수수한 보금자리에서 아이를 낳아 돌보던 모든 어버이는 이녁 아이한테 ‘말을 바탕으로 집짓기·밥짓기·옷짓기’를 가르치고 물려주었습니다.


  학교 문턱을 밟은 적이 없는 시골마을 수수한 어버이입니다만, 책 한 권조차 읽은 적이 없는 시골마을 투박한 어버이입니다만, 쓰레기 하나 내놓지 않으면서 ‘손수 삶을 지어서 삶을 누리는 길(완전한 자급자족)’로 살림을 빚었어요.



점점 커지고 있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산업화된 전통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여성이 하는 일을 노동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비생산적인 여성은 재생산이라는 임무를 줘서 달랜다는 속임수가 통하게 된 것이다. (193, 194쪽)


자본가와 관료 모두 임금 노동보다는 그림자 노동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 성으로 결합된 가족은 이들에게 그림자 노동의 예속을 강화할 수 있는 청사진을 마련해 주었다. (202쪽)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오늘날을 돌아볼 노릇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집짓기나 밥짓기나 옷짓기를 못 배우고 못 하지요. 서울에 있는 내로라하는 대학교를 나온 젊은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대학교에서 집이나 밥이나 옷을 짓는 솜씨를 못 배웁니다. 이런 삶을 배울 생각조차 아예 못 하기까지 해요.


  이름난 대학교를 마친 젊은이는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어서 돈을 많이 벌는지 모르지요. 돈으로 집도 밥도 옷도 살는지 몰라요. 그러나, 돈으로 집과 밥과 옷을 사서 쓰는 삶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쓰레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돈으로 집과 밥과 옷을 사서 쓰는 삶에서는 ‘그림자 노동’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고작 하루조차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국가권력은 ‘말’을 표준말로 바꾸려고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으면서 사람들을 윽박지릅니다. 이러는 동안 국가권력은 학교와 문학과 예술과 언론매체를 빌어서 고장말(사투리)을 몽땅 짓밟아 사라지게 합니다. 고장말이 사라진 곳에서는 자급자족 얼거리가 모래알처럼 무너졌으며, 자급자족 얼거리가 무너진 곳에서는 ‘고향사랑’ 같은 마음이란 가뭇없이 흩어집니다. 이리하여 ‘서울로! 서울로!’를 외치면서 서울이나 큰도시로 몰려들어 회사원 일자리를 붙잡으려고 하는 불나비 사회로 내몹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국가정책에 따라 사람들 삶이 휘둘립니다. 나라가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지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었으니까요.


  ‘그림자 노동’이 태어난 자리는 바로 우리가 스스로 말을 잃은 자리라는 대목을 낱낱이 따져서 밝히는 책이 《그림자 노동》입니다. 우리가 ‘우리 말(토박이말을 가리키는 한국말이 아닌 우리 말)’을 찾아서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을 담아 우리 삶을 짓는 길을 밝히는 넋을 북돋우는 말’로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그림자 노동을 걷어내고 ‘참일(참다운 일·노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말(내 말)’을 잃은 사람은 ‘스스로 서기(자급자족)’하고 언제까지나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야 하거나 안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삶을 배워야 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야 하거나 안 얻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 웃는 삶으로 거듭나는 슬기로운 넋으로 자라야 합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삶이기에 모든 차별과 불평등과 따돌림이 그림자 노동 다음으로 잇달아 자라나고, 이런 자리에서는 전쟁과 경쟁이 불거질 수밖에 없습니다. 4348.12.2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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