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 낯선 생각을 권하는 가장 따뜻한 사진
강윤중 글.사진 / 서해문집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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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아닌 사람’으로 이웃을 만나는 기자

―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강윤중 글·사진

 서해문집 펴냄, 2015.11.10. 13900원



  흔히 말하기를 ‘기자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기자는 객관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한쪽 자리에 서서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룬다면 다른 한쪽 자리에 서는 사람이나 모임을 깎아내리거나 헐뜯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자라고 한다면 두 쪽에 있는 사람이나 모임을 모두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두 쪽에 있는 사람이나 모임이 어떤 뜻을 밝히는가를 차분히 적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이를테면, 가해자하고 피해자가 있으면 가해자하고 피해자 목소리를 고루 듣고 고루 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아주 마땅한 소리라고 느낍니다. 다만, 이는 한 가지 대목에서만 마땅하리라 느낍니다. ‘사실 보도’라는 대목에서는 중립과 객관을 지켜야지요. 그러면, 신문이나 방송은 ‘사실 보도’만 해야 할까요? 어쩌면 오늘날 신문이나 방송은 ‘사실 보도’조차 제대로 안 하지는 않나요?



장애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없다’는 것을 딱히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장애인에게 좀더 깊이 다가가려 했을 때 비로소 내 안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닫힌 생각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4쪽)


막장의 소음 속에서 백승호 씨는 소리 질렀다. 그는 이어 물었다. “가장 정직하고 깨끗한 일이지 않습니까?” 웃어도 웃는 게 아닌 그런 웃음으로 ‘네,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대신했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진 두어 장을 찍은 채 갱도 밖으로 나왔다. (22쪽)



  경향신문 사진기자인 강윤중 님이 선보인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서해문집,2015)를 읽으면서 ‘기자는 어느 자리에 서서 어떤 일을 할 때에 기자다운가?’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기자는 어떤 글을 쓰거나 어떤 사진을 찍어서 신문이나 방송을 엮을 적에 기자로서 제몫을 다하는가를 헤아립니다.


  사실 보도라고 한다면, 이를테면 대통령 담화문을 옮기거나 대통령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뒤 고스란히 적는 일쯤 될 만합니다. 기자 자리에 있는 이들은 이때에 으레 대통령이나 여러 정당 관계자를 더 만나서 느낌을 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여느 사람들은 잘 만나지 않습니다. 온갖 곳에서 일하거나 살림을 짓는 수많은 사람을 두루 만나서 ‘대통령이 펼치려는 정책을 어떻게 느끼거나 생각하는가’ 같은 이야기를 매체에 담지 못합니다.


  사실 보도라는 테두리에서 보자면, 대통령 한 사람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이르러 모든 신문과 방송이 ‘4대강사업에 부질없이 쏟아부은 돈’이 얼마나 어마어마한가를 밝힙니다. 이제 모든 신문과 방송은 사실 보도를 합니다. 다만, ‘진실 보도’까지 하는 신문과 방송은 아직 그리 안 많습니다. 왜 4대강사업을 그토록 부질없이 밀어붙였는가 같은 ‘참(진실)’을 안 밝힌다고 할까요? 그도 그럴 까닭이 적잖은 매체가 어느 대통령 한 사람이 밀어붙인 4대강사업 같은 정책을 두 손 들고 반기면서 널리 알리는 나팔수 구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로 떠드는 ‘까만’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들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니?” 답이 금세 돌아왔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한국사람이죠.” (56쪽)


“왜 커밍아웃을 합니까?” 반사적으로 명료한 답이 돌아온다. “행복하려구요.” (132쪽)


한국 생활 4년째라는 이도 간단한 우리말 대화가 되질 않았다. 음식 얘기가 이어졌다. “한국 식당에는 메뉴가 너무 많아요. 그중에 삼겹살과 김치찌개만은 먹을 만해요.” (143쪽)



  나팔수 노릇을 하는 기자도 어느 모로 보면 ‘사실 보도’를 합니다. 다만 한쪽 자리에 서서 한쪽 자리에 있는 이들이 읊는 말만 옮겨적는 ‘편견에 가득 찬 사실 보도’입니다. 이리하여, 기자다운 기자로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면 ‘사실 보도’에 그치지 말고 ‘진실 보도’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진기자 강윤중 님이 빚은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는 바로 기자로서 사실만 다루지 않고 진실을 다루겠노라 하는 다짐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기자 강윤중 님 스스로 ‘기자라는 이름표’는 살짝 내려놓고 ‘사실을 넘어선 진실’을 마주하려고 하는 몸짓을 보여주는 책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사진기자로 온갖 곳을 뛰어다니면서 미처 못 본 모습을 바라보고, 아직 깨닫지 못한 모습을 배우며, 섣불리 파고들지 않았던 자리에 씩씩하게 나아가려는 마음을 책 한 권으로 여미었구나 싶습니다.



이제 ‘그림이 될까, 또 어떤 얘기로 풀어갈까?’를 다시 고민하는 내게 오 교사는 가만히 말을 건네 왔다. “여기 있는 동안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세요.” 내 속이 들켜버린 듯 화끈거렸다. 나는 목적을 가지고 왔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내가 갖는 조바심이 아이들에게 친구가 되어 줄 마음의 공간을 허락할 수 있을까. (163쪽)



  기자도 사람입니다. 기자가 만나는 이들도 사람입니다. 기자는 어디 별나라나 달나라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기자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이웃입니다. 아직 이름도 낯도 모를 뿐이었던 수많은 이웃을 만나서, 이들 이웃이 가슴으로 삭이거나 새긴 눈물과 아픔을 차분히 듣고서, 이를 다른 이웃한테 알리는 몫을 맡는 기자입니다. 수많은 이웃이 피어내는 웃음과 기쁨을 가만히 듣고서, 이를 새롭게 수많은 이웃한테 알려주는 구실을 맡는 기자입니다.


  기자는 기계가 아닌 사람입니다. 기자가 그저 기계일 뿐이라면 ‘사실 보도’만 하고 그칩니다. 기자가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면, 참말로 ‘기계 아닌 사람’으로 이웃을 만나는 기자라고 한다면, 어느 매체에서 일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진실 보도’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지금 용역들이 비닐집을 둘러쌌어요. 지금 와 주실 수 있나요?”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망설였다. 내 안의 변명은 이랬다. ‘내가 현장에 가서 강제 철거를 막을 수는 없다. 나는 기록하는 자여야지 개입자여서는 안 된다.’ … ‘기사 게재라는 목적을 위해 철거민들은 그저 이용할 수단일 뿐인가, 이 취재에 진정성이 있는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철거 현장으로 가야 했다. (190쪽)



  사진은 기계질로 찍지 않습니다. 사진기는 틀림없이 기계입니다만, 이 기계를 만지고 움직이고 다루는 손길은 ‘사람 손길’입니다. ‘기계 손길’이 아닌 사람 손길로 사진을 찍습니다. 연필이나 볼펜이나 노트북은 모두 연장이나 기계입니다만, 글은 기계로 쓰지 않습니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노트북이든 모두 사람 손길로 다루어요.


  사람이 취재를 해서, 사람으로서 보고, 사람으로서 느끼며, 사람으로서 생각한 끝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엮습니다. 기자라는 이름표에 앞서 사람이라는 숨결로 이웃을 마주합니다. 아픈 이웃을 마주하고, 기쁜 이웃을 마주합니다. 눈물짓는 이웃을 만나고, 웃음짓는 이웃을 만납니다. 이리하여, 사진기자 강윤중 님은 강원도에 있는 작은 분교로 찾아가서 ‘다큐 취재’를 할 적에 다큐도 취재도 아닌 ‘아이들 놀이동무’로 한동안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늦깎이에 한글을 익히고 검정고시 졸업장도 따고 싶은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다니는 야학에서도 사진기는 저만치 안 보이는 데에 숨기고서 말동무가 될밖에 없습니다.



어르신들을 만난 이후 얼마간 사천 원짜리 커피 한 잔 마실 때면 ‘최 할아버지의 점심 스무 끼구나.’ 만 원을 지불할 때면 ‘야, 이건 쉰 끼네.’ 하고 따지게 되고, 회사에 가득 쌓인 신문을 보면, ‘저 정도면 김 할머니 천 원 벌이네. 이천 원 벌이쯤 되겠지.’ 하고 가늠하는 버릇이 생겼다. (251쪽)



  기사 한 번 썼으니 이제 끝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자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사 한 번 썼으니 ‘후속 취재’를 안 해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자도 취재원도 모두 사람이요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도에서 그치지 않고 진실 보도를 하려는 매체라고 한다면, 대통령 담화문이라든지 대통령 소식이라든지 대통령 일정쯤 며칠 동안 한 마디도 안 쓸 만합니다. 정치 이야기는 며칠 동안 아예 한 줄로도 기사를 안 써도 됩니다. 이러면서 봄에는 기자들도 시골로 모내기를 하러 가고, 가을에는 또 시골로 가을걷이를 하러 가면서, 적어도 봄가을에 다문 며칠이라도 시골살이 이야기를 몸소 겪으면서 시골 이야기를 머릿기사로 두고두고 다룰 만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 주인공을 대통령이나 정당 지도자가 아니라, 수수하고 투박한 시골 할매와 할배로 삼아서 여러 날 재미나게 엮을 만합니다. 참말로 모든 매체는 ‘사실 보도’에서 ‘진실 보도’로 한 걸음 나아갈 적에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진이 누나 사랑해.” 엄마는 솟는 눈물을 찍어 냈다. 소진이 방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뒤에 선 엄마의 흐느낌이 전해졌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엄마를 눈물짓게 한 것이 내 탓이라 어쩔 줄 몰랐다. (262쪽)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어른들이 동시를 씁니다. 삶을 곱게 가꾸면서 밝히려는 뜻으로 아름다운 동화가 꾸준히 나오고, 사랑스러운 동시가 잇달아 태어납니다. 기자 자리에 있는 이들이 빚는 신문이나 방송은 어떤 이야기가 될 만할까요? 하루치 이야기를 다루면서 하루가 지나면 이내 잊혀지고 말 기사를 엮으려 하는가요, 아니면 두고두고 되읽거나 되새기면서 삶을 새롭게 마주하도록 북돋우는 기사를 엮으려 하는가요?


  사진기자 강윤중 님이 다리품을 팔아서 이웃을 만나고 귀를 기울였기에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같은 책이 태어났으리라 느낍니다. 그때그때 사실 보도 취재만 했다면, 사실 보도 취재 이야기는 책으로 태어나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글도 사진도 이웃을 헤아릴 적에 비로소 빚습니다. 신문도 방송도 책도 언제나 이웃을 생각할 적에 비로소 짓습니다.


  사진기자 한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그늘진 자리를 취재하려고 ‘다큐 취재’를 했을 수 있습니다만, 누구보다도 기자로서 ‘중립·객관’이라는 틀을 넘어서 ‘이웃을 가까이에서 사귀면서 알려는 몸짓’이 되려고, 다시 말하자면 ‘편견을 깨려는 편견’을 스스로 배우려고 하면서, 이 같은 책을 꾸몄구나 하고 느낍니다. 탄광에 가 보지 않고는 탄광을 알 수 없고, 작은 분교에서 지내 보지 않고는 작은 분교를 알 수 없습니다. 낫을 들고 풀을 베어 보지 않고는 시골을 알 수 없고, 숲에 깃들어 맑은 바람을 들이켜지 않고는 숲이 얼마나 사람한테 고맙고 아름다운가를 알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쳐서 참을 비트는 ‘바보스러운 편견’이 아니라, 이제껏 우리 사회에서 구석자리로 내몰리는 곳으로 찾아가서 ‘잊혀진 한쪽 이야기를 더 귀담아듣는 예쁜 편견’일 수 있을 때에, 너와 나는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 낮은 몸짓으로 찾아가서 귀와 눈과 마음과 입을 여는 예쁜 기자가 늘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1.2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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