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함께 있을게 웅진 세계그림책 120
볼프 에를브루흐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웅진주니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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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81



동무를 떠나보내는 삶인 ‘죽음이’

― 내가 함께 있을게

 볼프 에를브루흐 글·그림

 김경연 옮김

 웅진주니어 펴냄, 2007.10.31. 9500원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짓고, 이튿날 새 하루를 새로우면서 기쁘게 맞이하자’고 생각합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적에 ‘이제 곧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새로운 하루는 어떻게 누리면 재미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적에 ‘하루를 더 살았으니, 죽음하고 하루 더 가까워지네’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른인 나도 이렇게 생각하지만, 아이들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모두 잠자리에서 삶을 생각할 뿐입니다. 구태여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부터 오리는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대체 누구야? 왜 내 뒤를 슬그머니 따라다니는 거야?” “와, 드디어 내가 있는 걸 알아차렸구나. 나는 죽음이야.” (4∼5쪽)



  볼프 에를브루흐 님이 빚은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게》(웅진주니어,2007)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에는 오리가 한 마리 나오고, 오리 곁을 늘 맴돌았다는 ‘죽음이’라는 아이가 나옵니다.


  오리는 어느 날 문득 제 곁에 누군가 가까이 있는 줄 깨닫고는 고개를 홱 돌리면서 묻습니다. 그리고, 오리가 이렇게 물을 적에 ‘죽음이’는 그동안 드러내지 않던 모습을 오리 앞에 환하게 드러냅니다. 뒷짐을 진 손에 꽃을 한 송이 든 채 말이지요.



“사고가 났을 때 걱정해 주는 것은 삶이야. 삶은 감기라든가, 너희 오리들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걱정하지. 한 가지만 예를 들게. 여우가 나타났다고 생각해 봐.” 오리는 그건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으스스 소름이 돋았습니다. (9쪽)




  오리는 왜 죽음이를 알아챘을까요? 죽음이는 왜 오리 곁에서 맴돌았을까요? 오리는 죽고 싶은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오리는 이제 삶을 마치고 죽음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무래도 오리 스스로 죽음을 생각했기에 죽음이 늘 곁에 맴도는 줄 느꼈으리라 봅니다. 죽음을 생각하던 나날이었으니 때때로 오싹하기도 하고, 때때로 ‘누가 옆에 있네’ 하고 느꼈을 테지요.


  죽음이는 죽음으로 가도록 이끄는 아이입니다. 그러니 늘 꽃 한 송이를 갖고 다니면서 ‘죽음을 맞이한 님’한테 꽃송이를 가만히 올려놓고 냇물에 주검을 띄워서 흘려보냅니다.



“추워? 내가 따뜻하게 해 줄까?” 오리가 물었습니다. 아무도 죽음에게 그런 제안을 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13쪽)




  오리는 죽음이를 알아챘지만, 그다지 죽음이를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스스로 곧 죽음이 닥칠 줄 알았기에, 제 곁에 늘 맴돌던 숨결이 무엇인가를 알아챈 뒤에는 아무것도 거리낄 일이 없어졌구나 싶습니다. ‘죽음이 곁에 있는 삶’이란 두려움도 무서움도 없는 줄 알았다고 할까요.


  바야흐로 오리는 죽음이를 제 동무로 삼아요. 오리는 죽음이가 늘 따라다니는 줄 깨닫습니다. 아침에 번쩍 눈을 뜨면서 죽음이를 깨웁니다.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기뻐합니다. 죽음이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오리가 기뻐하는 대로 함께 기뻐합니다. 이러면서 오리하고 함께 놀지요. 못에도 가고 나무에도 오르지요. 어디를 가든 함께 움직여요.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게》를 읽을 어린이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 그림책을 읽을 어린이는 ‘죽음은 두려워할 만하지 않다’는 대목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죽음을 생각하기에 죽음이 찾아오고, 삶을 생각하기에 삶을 누린다’는 대목을 가만히 마음속에 그릴 만할까요?



오리는 죽음의 옆구리를 툭 치며 큰 소리로 기뻐했습니다. “나, 아직 죽지 않았어!” 죽음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나도 기쁘다.” 죽음이 기지개를 켜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죽었다면?” “그럼 난 늦잠을 잘 수 없었을 거야.” 죽음이 하품을 하며 말했습니다. (15쪽)




  기쁨을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마음속에 기쁨을 그리면서 삶에 기쁨이 깃들도록 이 길을 걷습니다. 슬픔을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마음속에 슬픔을 그리면서 삶에 슬픔이 스미도록 이 길을 걸어요. 웃음을 생각하니 웃음을 스스로 길어올리고, 눈물을 생각하니 눈물을 스스로 끌어냅니다.


  온누리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뭘 하고 놀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누구나 참으로 재미나게 놀고 신나게 놀며 개구지게 놀아요. 그런데, 학교에 매인 아이들은 ‘아이고, 오늘도 학교에 가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학교 공부가 괴롭거나 대학입시로 고달픈 아이들이라면 ‘아침에 일어나서 새로 맞이하는 삶’이 그리 기쁘지 않을 만합니다. 아침을 기쁘게 웃으면서 맞이하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삶하고 멀어질 테지요. 기쁨이를 부르지 못하고 죽음이를 부를 테지요.


  그림책 끝자락을 보면 ‘죽음이’한테는 “죽음이 삶”이라고 읊는 대목이 나옵니다. 모처럼 동무를 사귀었어도 동무가 죽음으로 가는 길로 이끄는 일이 죽음이한테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죽음이한테도 죽음이 있을까요? 삶을 누리던 목숨이 죽음으로 가도록 이끄는 ‘죽음이가 죽으’면, 이 아이는 ‘삶’이라는 자리에서 다시 태어날까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일 텐데, 참말 삶과 죽음은 수수께끼라고 할 만합니다. 수수께끼를 풀려고 이 땅에 태어나고, 수수께끼를 풀면서 이 삶을 지으며, 수수께끼를 풀거나 맺으면서 이 길을 마무리짓겠지요. 그림책에 나오는 ‘죽음길로 떠난 오리’는 몸뚱이는 고이 내려놓고 새로운 삶길로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4348.11.16.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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