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삶터, 달동네 문화의 길 11
김은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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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14



달동네를 가꾸고 지키는 마을사람

― 끈질긴 삶터 달동네

 김은형 글

 한겨레출판 펴냄, 2015.7.25. 13000원



  인천문화재단에서 기획에서 어느덧 열한째 권까지 나온 ‘문화의 길 총서’ 가운데 하나인 《끈질긴 삶터 달동네》(한겨레출판,2015)를 읽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한겨레〉 기자로, 인천 동구 송림동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문화의 길 총서’ 가운데 ‘달동네’를 다루는 이 책은 송림동수도국산박물관을 한복판에 놓으면서 이야기를 풀고, 송림동을 둘러싼 화수동과 만석동과 북성포구와 중앙시장과 배다리까지 다룹니다.


  책을 읽는 내내 ‘달동네’를 다룬다고 하는 책으로서는 줄거리가 좀 가볍네 하고 느낍니다. 인천에 있는 달동네는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언저리에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수동하고 맞닿아서 북쪽으로 걸어가면 가좌동하고 석남동이 나오는데, 이곳도 인천에서 손꼽히는 ‘달동네’입니다. 송림동 옆에는 송현동과 배다리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도화동하고 숭의동이 맞닿는데, 이곳 또한 인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달동네’이지요. 배다리 아래쪽으로 경동과 유동과 신흥동과 율목동이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내동과 중앙동, 오른쪽으로는 이내 용현동과 학익동이 나오며, 이곳도 인천에서 사람들이 아주 빼곡히 모여서 살아가는 ‘달동네’입니다.



인천은 정주의 거처가 아니라 잠시 머무르는 도시였던 것 같다. 그때 교회학교 아이들과 찍은 사진에서 맨발의 친구들 가운데 유일하게 하얀 양말을 발목까지 올리고 찍은 언니의 모습에는, 구질구질한 달동네의 무리와 어울리지 않겠다는 엄마의 ‘자존심’이 반영돼 있었을 터이다. 실은 우리 식구들이 떠나온 신당동도 서울의 달동네였는데 말이다. (5∼6쪽)



  인천 달동네는 동쪽으로 천천히 뻗어, 숭의동 옆으로 주안동이 나오고 간석동이 나옵니다. 간석동 곁으로 이제 부평구 언저리가 되면서 산곡동하고 십정동이 나오지요. 그리고 간석동 오른쪽으로 구월동하고 만수동이 나와요. 이곳도 하나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서 어우러지는 ‘달동네’입니다.


  그러면, 《끈질긴 삶터 달동네》는 인천에서 달동네라고 일컫는 곳을 차근차근 짚거나 다루어야 알맞지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한 군데 달동네만을 대표로 삼아서 더욱 깊게 파고들어야지 싶어요. 이 책은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서 했던 몇 가지 전시 자료를 퍽 길게 다루느라 정작 인천에 넓게 퍼진 아기자기하면서 수수하고 투박한 달동네 삶자락은 거의 못 보여준다고 느낍니다.


  그렇다고 글쓴이 김은형 님이 어릴 적에 겪거나 느낀 달동네 삶을 들려주지도 못합니다. 자율학습을 빼먹고 살짝 골목을 거닐던 이야기는 있으나, 막상 그무렵 달동네 이웃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이야기가 없고, 김은형 님에 식구가 달동네 살림살이를 어떻게 가꾸었는가 하는 이야기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달동네는 또 다른 달동네를 탄생시키는 방식으로 늘어났다. 정부가 도시를 정비하면서 달동네 판잣집을 철거했고,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거나 쥐꼬리만 한 보상금으로 더 낙후된 지역에 판잣집을 지었다. (23쪽)


공장 도시 인천은 여공의 도시이기도 했다. 기술이나 자본을 가진 쪽이 기득권층 남성이었다면, 묵묵히 지지대 역할을 했던 것이 수많은 여공들이었다. (79쪽)



  정부나 지자체에서 재개발 정책을 펼쳐서 달동네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맞습니다. 그런데 인천에서는 그런 정책이 그리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천에서는 오래된 달동네가 그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켰어요. 서울처럼 엄청난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인천입니다. 그래서 “달동네는 또 다른 달동네를 탄생시키는 방식” 같은 이야기는 인천에 있는 달동네하고는 안 맞습니다. 인천에 있는 달동네는 쉰 해 앞서도 달동네였고 일흔 해 앞서도 달동네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태어난 옛 지번주소를 찾아서 어느 곳이 ‘내가 태어난 골목집’인가를 아직도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태어나서 살던 골목집(인천 도화동)은 빌라로 바뀌었기 때문에 콕 짚어서 어느 한곳을 알 수 없으나, 지번주소는 여태 그대로입니다. 나즈막한 동산을 낀 달동네인 율목동, 이름을 한국말로 풀면 ‘밤골’이나 ‘밤나무골’인 율목동은 1990년대가 저물고 2000년대로 접어들며 갑작스레 빌라가 늘었어요. 그제서야 조금 ‘재개발’이 된 셈인데, 재개발이라고 해 보았자 마당이 있던 작은 기와집이 저마다 빌라로 바뀌어 빌라끼리 거의 맞붙듯이 서서 햇볕 한 줌 안 들어오는 ‘새로운 달동네 빌라’가 되었다뿐입니다.



자유공원 아래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단짝 친구와 나는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빠져나오면 자유공원에서 중국인거리까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공원과 중국인 동네를 잇는 계단에 앉아 항구에 배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고, 마름모나 동그라미로 창문이 뚫린 이국적이고 낡은 적산가옥 주변을 서성이며 집 안을 훔쳐보기도 했다. (99쪽)


〈파이란〉이나 〈천하장사 마돈나〉의 인천도 낡고 구질구질하기는 마찬가지다. 왜 카메라 속에 담긴 인천은 하나같이 이렇게 허름하고 칙칙한지,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만약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한 연수구나 송도 신도시에서 찍은 영화라면 누가 그 작품을 보면서 인천을 떠올릴 수 있을까. (115쪽)



  달동네란 무엇일까요? 백기완 님은 ‘달동네’라는 이름을 이녁이 지었다고 밝힙니다. 공무원이나 지식인이 ‘여느 사람들이 사는 수수한 마을’을 가리켜 자꾸 ‘빈민촌’이나 ‘빈민가’라고만 하면서 깎아내리기에, 이러한 이름은 이 작은 마을에서 오순도순 사는 사람들한테 어울리지 않다고 여겨서 ‘우리는 언제나 달을 보고 산다’고 하면서 ‘달동네’라는 이름을 1950년대부터 썼다고 밝힙니다. 가난한 사람이 모인 빈민촌이 아니라, 삶을 새롭게 가꾸려고 모인 달동네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달동네 숨결을 헤아리면서 골목마을을 돌아볼 수 있다면, 또 이 골목마을에서 골목사람(주민)으로 지낼 수 있다면, 골목마을을 바라보는 눈길은 사뭇 달라지리라 느낍니다.


  나는 인천 도화동에서 태어나 주안동과 신흥동에서 어린 나날을 보냈고, 인천을 떠나서 다른 고장에서 살다가 서른이 넘어 인천으로 돌아가서 창영동과 내동에서 살며 아이를 낳았습니다. 어릴 적을 더듬고, 나중에 아이를 낳아 함께 살던 무렵을 헤아리면, 우리 집뿐 아니라 이웃 여러 집은 모두 따사롭고 살뜰한 사람들입니다. 크게 잘나지 않으나 딱히 못나지 않습니다. 골목마을에는 커다란 집이 거의 없습니다. 아예 없지 않습니다만 높이 솟는 아파트에 대면 아무것이 아닙니다. 거의 엇비슷하다 싶은 골목집이 옹기종기 모여서 마을을 이루는데, 골목집마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 나무를 한두 그루씩 심어요. 골목마실을 할 때면 으레 이 골목나무를 바라보면서 즐겁습니다. 우리 집 나무가 아니어도 마을나무요 골목나무이기 때문에 반갑습니다.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바로 아래쪽으로는 그 옛날의 좁은 골목들과, 날아갈 듯 얇은 슬레이트 지붕 위에 타이어며 온갖 잡동사니를 올려놓은 슬레이트 집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또 미래가 될 달동네의 얼굴이다. (171쪽)


관광 상품화가 그냥 버려야 할 카드인가는 개인적으로 단순명쾌하게 정리를 못 하겠다. ‘관광 상품’이라는 말 자체에서 배어 나오는 기계적 사고, 그리고 구체적 실행안에 자주 등장하는 박물관 체험관 카페 벽화 도예 공방 등, 마을 재생 운동에 단 한 번 발 들여놓지 않았던 나조차 줄줄이 읊을 수 있는 빈곤한 내용들이 ‘안 봐도 비디오’인 결말을 예상케 한다. 하지만 그런 식이 아니라면,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보람도 느끼며 수익도 낼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 본다면, 외지인들의 발길이 가라앉는 동네에 활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든다. (293쪽)



  골목집 사람들은 골목을 스스로 건사합니다. 청소부가 오가면서 쓰레기봉투를 가져가지만, 이밖에 여느 때에는 아침 낮 저녁으로 골목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비질을 합니다. 골목마을에서 사는 분이라면 으레 스스로 골목길을 치울 테고, 골목마실을 다니는 분이라면 으레 ‘비질을 하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만날 만하리라 느낍니다. 더욱이 골목마을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아주머니나 아저씨는 담벼락 앞쪽을 조금씩 꽃밭으로 가꾸기 마련이고, 담벼락에도 꽃그릇을 가지런히 올려놓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골목길은 ‘꽃골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골목사람 삶자락을 헤아린다면, ‘오래된 골목마을 살리기’는 ‘관광 상품’이 아니어도 넉넉합니다. 관광 상품을 꾀한다면서 용역을 내고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느라 돈을 쓰지 말고, 골목마을 사람들한테 ‘골목집 곱고 정갈하게 가꾸는 도움삯’을 다달이 이십만 원쯤 줄 수 있어요. 골목마을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니 집집마다 다달이 이십만 원을 ‘골목집 가꿈삯’으로 정책을 마련해서 집행한다면, 골목사람 스스로 훨씬 아기자기하면서 더욱 아름답게 골목마을을 가꿀 테지요.


  어쩌다가 한 번 골목을 찾는 관광객이나 예술가는 ‘겉치레를 하는 벽그림’밖에 못 그리고 못 보지만, 늘 마을에서 사는 사람(주민)은 ‘속을 가꾸는 삶을 밝히는 길’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마을사람 스스로 가꾸는 마을살림이 관광객한테도 더 아름다우면서 재미나고 놀라우며 새롭게 보일 테지요.



2000년대 중반 청라신도시에서 송도신도시를 곧바로 잇는 산업도로를 만든다는, 그 도로만큼이나 단순무식한 계획 아래 배다리마을은 존폐 위기에 놓였다. 계획대로라면 도로가 배다리를 관통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아벨서점의 곽현숙 대표와 스페이스빔의 민운기 대표 등을 중심으로 동네 주민들까지 합세해 이 계획을 저지시켰다. (204쪽)



  《끈질긴 삶터 달동네》를 읽다 보니 204쪽에 잘못된 정보가 나옵니다. 인천시 종합건설본부에서 밀어붙이려고 하던 ‘배다리 산업도로’는 2006년에 인천 동구 창영동 주민 세 사람이 알아내어 처음으로 밝혔고, 이 마을 주민 세 사람이 끝까지 앞장서서 싸우면서 2011년에 백지화까지 이끌었습니다. 인천시 종합건설본부에서 몰래 밀어붙이려던 공사 계획을 밝힌 마을 주민 세 사람 이름은 곽현숙, 박태순, 하유자입니다. 이들은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 아벨서점을 본부처럼 삼아서, 동구 송림동에 있는 송림동성당 신부님과 신자가 함께 나설 수 있도록 이끌었고, 여기에 인천에 있는 여러 단체와 지식인을 한자리에 모으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배다리 산업도로를 막으려고 하는 사무실을 마련할 적에 아벨서점 곽현숙 님이 사무실을 손수 알아보고 임대료까지 냈지요. 스페이스빔이라는 문화공간도 이때에 함께 한 여러 단체 가운데 하나이지만, “아벨서점의 곽현숙 대표와 스페이스빔의 민운기 대표 등을 중심으로 동네 주민들까지 합세해”라는 말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 배다리 산업도로 싸움에서 ‘중심’은 ‘마을 아주머니(라기보다는 할머니입니다만) 세 사람’이고, 배다리를 둘러싼 마을사람(거의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였습니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비로소 인천에 있는 시민사회단체가 모여들었고, 이 힘을 바탕으로 여러 해에 걸쳐 끈질기게 싸웠기에 공사 백지화를 이끌었습니다.


  인천문화재단에서 ‘문화의 길 총서’로 내는 책이라면 이만 한 정보를 모아서 갈무리하기는 어렵지 않을 텐데, 이 같은 대목은 부디 나중에라도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같은 대목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하는 까닭을 더 든다면, ‘왕복 16차선 공사 계획’을 밝혀내고 이를 막은 밑힘은 바로 마을사람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마을을 살리는 힘은 언제나 마을에서 샘솟습니다. 바보스러운 공사를 가로막는 힘도, 마을을 새롭게 가꾸는 힘도, 언제나 마을에서 샘솟아요. 예술가와 지식인과 시민사회단체 힘도 고맙습니다만, 언제나 모든 일에서 중심은 마을이어야 합니다. 관도 단체도 아닌 마을이 중심이어야 하고, 마을에서 터를 닦고 오래도록 오붓하게 살면서 알뜰살뜰 살림을 가꾸는 사람이 중심이어야 한다고 느껴요. 이때에 비로소 달동네는 달을 사랑스레 누리면서 달잔치도 하고 마을잔치도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곳간으로 거듭날 테지요. 4348.11.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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