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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님이 공항에서 열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새 아침 즈음에 비로소 비행기를 타는구나 싶다. 공항에서 열한 시간을 기다린다고 하는 말은 그야말로 말로만 듣는다. 나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다. 열한 시간 동안 공항 언저리에서 보내야 한다는 뜻인데 이동안 무엇을 할 만할까?
올 한 해나 지난 한 해나 지지난 한 해를 더듬어 보면, 곁님이 배움길을 다녀오도록 온힘을 쏟았다. 지난 세 해 동안 늘 빚을 지면서 곁님이 배움길을 다녀올 수 있게 했다. 뭐, 곁님이 집에 없으니 이런 글을 쓸는지 모르지만, 곁님이 배움길을 다녀오는 동안 빚쟁이가 되어 빚 재촉에 시달리는 삶을 실컷 겪었다. 그렇지만, 빚 재촉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한집에서 사는 사람 가운데 누구라도 삶을 새롭게 사랑하는 꿈을 배우려 한다면 참말 집을 팔아서라도 배움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할 노릇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그리 대수롭지는 않지만, 우리 집이 시골에서 살며 내가 아버지로서 어린 아이들을 도맡아 보살피며 곁님이 배움길에 나서도록 하는 모습을 놓고 안 좋게 바라보거나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듯하다. 이런 말을 듣거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기는 하지만, 거꾸로 보아 ‘사내가 배움길에 나서고 가시내가 집일과 돈벌이를 도맡는다’고 하면 그냥 마땅한 노릇으로 여길 테지.
내가 이런 말을 굳이 하는 까닭은 이 한국 사회에서 ‘진보’라든지 ‘민주’라든지 ‘평등’ 같은 이야기를 외치는 이들조차 우리 집에서 ‘아이 어머니’가 집일이나 아이돌보기를 아버지한테 도맡기면서 배움길에 나서는 몸짓을 ‘안 좋게 보는’ 사람이 꽤 많은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배움길은 사내만 나서야 하나? 아이를 돌보고 집일을 도맡는 몫은 가시내만 해야 하나? 참말 뭐가 진보이고 민주이고 평등일까?
우리 곁님이 집일을 하거나 아이들하고 놀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나날은 거의 못 보낸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이 ‘세 식구 살림’이라고 느낀 적이 없다. ‘여자가 집을 안 지킨다’고 하는 말을 2015년에도 똑같이 들으면서 ‘허허 웃어서 넘기’고 싶지 않아 이런 글을 끄적여 본다. 삶을 제대로 사랑하는 길을 배울 때에 비로소 살림꾼이 되지, 삶도 사랑도 꿈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 하거나 안 한다. 4348.10.27.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