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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 : 꿈결 같은 시절
한영수 지음 / 한스그라픽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0
‘어린이 사진’은 ‘다큐 작품’이 아닙니다
― 꿈결 같은 시절
한영수 사진
한영수문화재단 펴냄, 2015.4.30. 4만 원
한영수문화재단에서 두 권째 펴낸 한영수 님 사진책 《꿈결 같은 시절》(2015)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책 《꿈결 같은 시절》을 보면, 이 사진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강원도 아이나 경기도 아이도 있지만, 아무래도 서울 아이가 가장 많습니다. 서울에서도 물지게를 지고, 서울에서도 널뛰기를 하며, 서울에서도 얼음지치기를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을 도와 일도 할 뿐 아니라, 신나게 놀고, 마음껏 온누리를 두 발로 씩씩하게 밟으면서 자랍니다.
1950∼60년대에 서울에서 흔히 만날 수 있던 아이들 모습이 사진책 《꿈결 같은 시절》에서 흐릅니다. 그런데 이 사진책은 1950년대나 1960년대가 아닌 20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옵니다. 2000년대나 1990년대에도 이 사진을 담은 사진책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삶》이라는 사진책이나 《내가 자란 서울》 같은 작은 책에 한영수 님이 찍은 어린이 사진이 더러 나오기는 하지만, 두 책 모두 어린이 사진을 차곡차곡 그러모아서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삶》이라는 사진책은 말 그대로 ‘삶’을 크게 아우르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내가 자란 서울》은 이 책에 글을 쓴 동화작가 이야기에 맞추어 몇 가지 사진을 보여줄 뿐입니다.
한영수 님이 어린이를 찍은 사진은 왜 1960년대나 1970년대나 1980년대에 사진책으로 나오지 못했을까요? 왜 이만 한 사진을 눈여겨보거나 알아보거나 살펴보는 손길이 그동안 나타나지 못했을까요? 왜 1990년대나 2000년대에도 이들 사진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하는 몸짓은 일어나지 못했을까요?
가만히 보면 2010년대인 오늘날에도 ‘어린이 사진’을 제대로 들여다보거나 알아보는 비평가는 아주 드물거나 없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어린이를 찍는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알아보는 비평가도 드물지만, ‘어린이가 읽을 사진’을 헤아리거나 생각하는 비평가도 드뭅니다.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를 다루는 사진이 될 때에 비로소 ‘다큐멘터리’라고 여길 뿐, 어린이가 다녀야 하는 학교라든지 어린이가 늘 지내는 집이나 마을 이야기를 다룰 적에 ‘다큐멘터리’가 되는구나 하고 깨닫는 비평가는 참으로 드뭅니다.
《멈춘 학교 달리는 아이들》 같은 사진책이 1992년에 나왔으나, ‘멈춘 학교’에서 고단한 아이들 모습을 살짝 그리는 데에서 그칠 뿐, 아이들이 마음껏 노는 즐거운 꿈까지 알알이 여미지 못했습니다. 1998년에 나온 《분교, 들꽃 피는 마을》은 시골마을 작은학교 어린이를 보여주기는 하되, 시골마을 어린이 삶까지 헤아리면서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2009년에 나온 《소꿉》이라는 사진책은 드디어 한국에서도 ‘노는 어린이’를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 될 만했는데, 이 사진책은 ‘아시아 어린이’만 보여줍니다. 이밖에 어린이를 주제로 삼아서 나온 사진책이 여러 권 더 있지만, 동심천사주의에 빠진 틀에서 못 벗어나기 일쑤였습니다. 어린이를 찍는 사진이라고 하면, 먼저 알록달록 예쁜 옷을 입히고, 놀이터나 꽃밭에서 놀거나 서도록 한 다음, 활짝 웃거나 병아리를 들여다보는 몸짓을 하도록 시키고서 찍기 일쑤예요. 시골 어린이를 사진으로 찍을 적에는 알몸으로 냇물이나 바닷물에 뛰어드는 모습을 찍기 일쑤이지요. 다들 하나같이 틀에 박힌 ‘어린이 사진’을 찍기만 하면서 ‘어린이가 누리는 삶’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한영수 님이 어린이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에서는 어떤 모습과 어떤 이야기가 흐를까요? 한영수 님은 ‘노는 어린이’하고 ‘일하는 어린이’를 나란히 찍습니다. ‘도시 어린이’하고 ‘시골 어린이’를 함께 찍습니다. 극장 앞에 있는 커다란 쇠울타리를 철봉 삼아서 노는 어린이를 찍고, 신문이나 책이나 껌을 파는 어린이를 찍습니다. 고무줄을 하는 어린이를 찍고, 그냥그냥 있는 어린이를 찍습니다. 그리고, 한영수 님이 찍은 어린이 사진에는 ‘어린이가 사는 터’가 잘 드러납니다. 어떤 집인지, 어떤 마을인지, 어떤 골목인지, 어떤 시골인지 하는 이야기가 환하게 드러나지요.
1950∼60년대에 찍은 사진이니까 ‘일부러 흑백필름으로 골라서 찍은 사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요즈음도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하면 ‘흑백필름 사진’이어야 비로소 다큐사진이 되는 줄 잘못 아는 사진가와 비평가가 아직 제법 있습니다. 왜 흑백사진이어야 다큐사진일까요? 흑백사진은 그저 흑백사진입니다. 칼라사진은 그저 칼라사진입니다. 무엇보다도 ‘다큐 작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품고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다큐사진을 못 찍습니다. ‘다큐 작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품는 사진가는 ‘다큐 작품’을 만들 뿐입니다.
《꿈결 같은 시절》에 나오는 어린이 모습은 ‘다큐 사진’도 아니고 ‘다큐 작품’도 아닙니다. ‘옛날 추억을 기록한 사진’도 아닙니다. 이 사진책에 흐르는 사진은 모두 한영수 님이 이녁 아이를 낳으면서 즐겁게 누리려는 삶을 그야말로 즐겁게 찍은 사진입니다. 내 아이를 바라보듯이 이웃 아이를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내 아이하고 동무할 이웃 아이를 마주하는 사진입니다. 지구별이라는 테두리까지 헤아리지 않더라도, 전국을 두루 헤아리지 않더라도, 서울 하늘에서만 해도 이렇게 수많은 아이가 수많은 모습으로 수많은 삶을 가슴에 안으면서 살아요.
어느 날에는 웃고, 어느 날에는 웁니다. 눈물을 흘릴 때가 있지만, 이내 눈물을 씻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놉니다. 맨발에 맨손이어도 흙을 뭉쳐서 소꿉을 짓습니다. 나물에 보리밥이어도 한 그릇 뚝딱 배부르게 먹고는 배가 꺼지도록, 아니 배가 꺼지고 나서도 신나게 뛰어놉니다. 제비랑 함께 놀고 박쥐하고 같이 놀아요. 아침을 제비와 함께 열고, 저녁을 박쥐랑 나란히 마무리하지요.
한영수 님이 찍은 어린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흑백필름으로 찍은 결이지만 얼굴빛이나 목소리나 몸짓이 모두 잘 살아서 움직입니다. 필름으로는 까망과 하양 두 가지 빛깔로 그리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사진에 아로새긴 이야기는 온통 무지개빛으로 되새길 수 있을 만합니다. 포대기도 두루마기도 홑벌치마도 고무신도 모두 반들반들 예쁜 빛깔이 드러납니다. 판잣집도 흙길도 때 묻은 손도 모두 까무잡잡하면서 살가운 숨결이 배어납니다.
사진작가 한영수의 사진집을 시리즈로 출간한다는 계획은, 남겨진 필름과 밀착인화물을 처음 접한 이래 계속 생각해 온 것이지만, 막상 두 번째 사진집의 주제를 정하는 데에는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정한 것이 바로 ‘어린이’ 사진이다 … 이 사진들에 실려 있는 것은 아마도 지금 막 노년에 접어든, 재건의 시대를 거쳐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바로 그 세대들의 어린 시절일 것이다. (책머리에/한선정)
1950∼60년대에 이 어린이 사진이 책으로 나오기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1970∼80년대에라도 ‘어린이’만을 헤아리는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이 한국에서 한 권쯤 제대로 나올 수 있었으면 한국에서 사진문화와 사진예술은 무척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풍경이나 산만 찍은 사진책이 아니라, 이렇게 아이들 목소리와 숨소리가 싱그러이 펄떡펄떡 피어나는 사진책이 1990년대나 2000년대라도 나올 수 있었으면, 다큐사진을 찍는다면서 ‘다큐 작품’만 만드는 요즈음 한국 사진가한테 따끔하면서 따사로운 한마디를 들려줄 만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어린이를 찍는 사진은 어렵지 않으면서 어렵습니다. 첫째, 어린이를 마주하는 어른으로서 ‘어린이 마음’이 되면 어린이 사진을 찍기란 어려울 일이 없습니다. 둘째, 어린이를 마주하는 어른으로서 ‘어른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들한테 반말만 찍찍 늘어놓고 이리 해라 저리 해라 시키기만 하면서 멋진 구도나 노출이나 풍경을 연출하려고 하면, 어린이 사진을 찍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놀도록 하면 아이들을 찍기는 아주 쉽습니다. 골목에 자동차가 싱싱 달리지 못하도록 막고, 자가용을 골목에 대지 못하도록 막기만 하면 돼요. 아이들이 골목길을 이쪽저쪽으로 100미터는 넉넉히 마음껏 내달릴 수 있는 터만 있으면 됩니다. 연줄을 잡고 달리면서 연을 하늘로 띄울 만큼 넉넉한 빈터가 있으면 ‘노는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기란 매우 쉽지요. 다음으로, 살림을 꾸리면서 아이들한테 잔소리나 꾸지람을 하지 않고 늘 웃고 노래하면서 심부름을 알맞게 시킬 뿐 아니라 아이한테 고마워 할 줄 아는 다소곳한 마음인 어른으로 지내면 ‘일하는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기란 참으로 쉽지요.
아이들은 밥짓기나 비질이나 빨래도 참 좋아해요. 그러니 늘 소꿉놀이를 합니다. 아이들은 동생을 돌보거나 업기도 참 좋아해요. 그래서 놀이를 하면서 언제나 깍두기를 두어요. 아이들은 새로운 노래를 참 좋아해요. 대중가요나 뽕짝 같은 노래가 아니라, 어버이나 어른이 저희(아이)를 아끼면서 들려주려는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노래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웃으면서 부르는 노래를 귀여겨듣고는 따라 불러요. 노래하면서 춤추는 아이들이요, 웃으면서 뛰노는 아이들이며, 뛰놀면서 착하고 참다운 넋으로 거듭나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도 지게를 잘 집니다. 아이들도 호미나 낫을 잘 다룹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머잖아 나락도 손수 심고 나무도 손수 베어 집이랑 옷도 손수 짓겠지요. 어버이가 물려주는 깊은 사랑을 가슴으로 담아서 새로운 삶을 지어요. 어린이를 찍는 사진이라고 한다면, 어버이가 아이한테 온 삶을 사랑으로 물려주듯이 찍는 사진입니다. ‘웃으며 노는 모습’을 찍으면 되는 어린이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어른으로서 이 아이들이 ‘나(어른)한테서 물려받을 사랑’을 느끼면서 마음껏 뛰놀거나 기쁘게 심부름하는 하루를 찬찬히 담아낼 때에 아름다운 어린이 사진입니다.
사진책 《꿈결 같은 시절》은 왜 “꿈결 같은 시절”을 말할까요? 사진에 찍히는 아이들이 사진을 찍는 어른을 믿고 따릅니다. 사진을 찍는 어른이 사진에 찍히는 아이들을 믿고 따릅니다. 아이들은 사진가 아저씨를 따라서 놀지 않습니다. 저희 놀고픈 대로 놉니다. 사진가 아저씨는 아이들 놀이에 맞추어 움직이면서 신나게 웃는 낯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일하는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적에는 사진가 아저씨도 차분하면서 고요한 몸짓으로 정갈하게 손을 놀려서 사진 한 장 살그마니 찍었을 테지요. 일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거룩하면서 놀랍고 애틋한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사진가 아저씨 가슴이 찡하게 울렸을 테고, 이 울림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옮겼으리라 느낍니다.
이리하여, 한영수 님이 어린이를 찍은 사진을 그러모은 《꿈결 같은 시절》은 ‘다큐사진’이 아닙니다. 그저 ‘어린이 사진’입니다. 어린이가 누리는 삶을 찍은 사진입니다. 어린이가 스스로 사랑하면서 마음껏 뛰놀거나 기쁘게 일하던 하루를 고맙게 마주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앞으로 한국 사회 곳곳에서 ‘작품 만들기’가 아니라 ‘삶짓기’와 ‘사랑짓기’를 하는 몸짓과 마음으로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사진을 찍는 어른(사진가)이 늘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티없이 맑은 눈빛’을 찾아서 동남아시아나 남미나 티벳이나 먼먼 지구별 두멧시골 나라로 찾아갈 생각은 좀 내려놓고, 바로 이곳 한국에서 이 나라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터전부터 함께 가다듬고 마련하는 몸짓으로, 이 나라 아이들하고 함께 실컷 웃고 뛰놀려는 사랑으로 사진을 찍는 착한 어른(사진가)이 나타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9.10.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