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라는 생각 창비시선 392
이현승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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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4



시와 회사원

― 생활이라는 생각

 이현승 글

 창비 펴냄, 2015.9.25. 8000원



  한창 아플 때에는 아무것도 못 먹기 일쑤입니다. 끙끙 앓느라 바쁘기에 밥도 물도 몸에서 안 받을 뿐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몸이 아프면 소화기관은 모두 스르르 멈춘다고 할까요. 몇 끼를 굶거나 며칠을 굶어도 소화기관은 밥 달라는 소리를 않습니다.


  넋을 잃도록 아프던 나날이 지나고 조금 넋을 차리면 아주 조금 물을 마시거나 밥술을 뜹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많이 먹지도 않습니다. 제법 아픔을 털고 일어날 만한 때가 되면 조금 더 먹지만, 조금만 먹어도 배가 찬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조금만 먹어서 배가 차면 이내 졸음이 쏟아지면서 하염없이 꿈나라를 헤맵니다.


  아픔을 이럭저럭 털어내어 제법 움직일 수 있을 만하면, 몸에서 이것저것 많이 바랍니다. 그렇다고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골고루 몸에 넣어 달라고 바라요. 그동안 그리 내켜 하지 않던 것까지 몸속에서 넣어 달라고 바라기에, 나는 내 몸이 씩씩하게 나아서 튼튼하게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이것저것 신나게 먹습니다.



아픈 사람을 빨리 알아보는 건 아픈 사람, / 호되게 아파본 사람이다. / 한 사나흘 누웠다가 일어나니 / 세상의 반은 아픈 사람, / 안 아픈 사람이 없다. (오줌의 색)


십자가가 저렇게 많은데, / 우리에게 없는 것은 기도가 아닌가.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이현승 님이 빚은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창비,2015)을 읽습니다. 1973년에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만 짤막하게 책날개에 나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어떤 하루를 누리는지 같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시를 읽으며 집안에 아이들도 있구나 하고 느끼고, 여느 살림집하고 비슷하게 집일이나 아이키우기는 거의 곁님이 도맡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어디에서 사는지 꼭 알아야 하지는 않으나, 시를 읽다 보면 이래저래 궁금합니다. 시골에서 사는 이웃인지, 도시에서 사는 이웃인지 궁금하다고 할까요. 그래도 시를 읽으면 이 시가 시골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도시에서 태어났는지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시를 읽으면 이 시를 쓴 분이 어떤 눈길로 사회를 바라보면서 어떤 일을 하는가 같은 대목도 넌지시 드러납니다.



죽은 사람의 눈을 감기듯 / 이불을 덮어주고 간 아내의 손끝이 한없이 부드러워 / 잠 깨어 다시 일어난다. (잠 깨우는 사람)


숨이 막힌다. / 가지런히 잘려나간 잔디에서 풀 냄새가 난다. / 씀바귀꽃이 개선 환영 인파처럼 늘어선 길을 걸으며 / 박수 받아야 할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한 채 / 암담은 화창과 마주하고 있다. (블랙아웃)



  시인 이현승 님은 책끝에 붙인 말에 “사람의 말 속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이 담긴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그 사람 안으로 담기고, 그 사람의 모든 것에는 그 사람이 담긴다(134∼135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리하여, 해적이 같은 말이 없어도 시만 읽더라도 시인이 걸어온 길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굳이 해적이를 달지 않더라도 시인이 품은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애써 온갖 이론과 지식을 곁들이는 시평(해설)을 책끝에 문학평론가 이름으로 달아 놓지 않더라도 시집 한 권이 우리한테 나누어 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 초등학교 놀이터에 와서는, 놀이터 한쪽에 가만히 앉아서 시집을 다 읽고서 생각해 봅니다. 아직 덜 나은 오른무릎을 살살 움직여서 자전거를 달려 놀이터에 와서는, 고작 오 킬로미터쯤 달리고도 무릎이 시큰거려서 아이들하고 어울려 놀지도 못하고 그저 놀이터 둘레에 퍼질러 앉아서 시집 한 권 들춰야 하는 몸으로 천천히 읽고 나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사람이 하는 말에는 그 사람이 담기는데, 나는 이 시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이녁한테서 어떤 몸짓을 이웃한테 보여주려는 마음이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한테서 어떤 몸짓을 바라보려는 마음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 손은 두 개뿐인데 / 잡아야 할 손은 여러개다. / 애써 친절을 베풀면서 / 쉬운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사람처럼 / 내가 잡아야 할 손들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저글링)



  아이들은 마음껏 뛰놉니다. 땀으로 옷을 적시든 모래로 옷을 더럽히든 그야말로 마음껏 뛰놉니다. 손발이 지저분해지면 아버지가 씻겨 주는 줄 잘 압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아버지가 갈아입혀 주는 줄 잘 압니다. 신나게 놀아서 배가 고프면 아버지가 밥을 차려 주는 줄 잘 압니다. 개구지게 놀아서 졸음이 쏟아지면 아버지가 토닥토닥 어루만지면서 잠자리에 누여 주고 재워 주고 노래를 불러 주는 줄 잘 압니다.


  나도 아이들을 바라보며 마음껏 일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기쁘면서 신나는 일을 할 적에 웃는 낯이 됩니다. 어버이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운 일을 할 적에 노래하는 몸짓이 됩니다. 웃으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노래하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춤도 추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다만, 달포가 되도록 아직 무릎이 말끔히 낫지 않아서 춤은 못 춥니다.



우리는 나가고 싶다고 느끼면서 /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더 간절해진다. / 간절해서 우리는 졸피뎀과 소주를 섞고 (봉급생활자)


미자에게 맞은 딱지는 언제라도 뼈아플 뿐이고 / 순자가 미자보다 예쁘다는 말처럼 멍청한 말은 없다. (허수아비 디자이너)



  여기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갑니다. 시골에 있고 싶은 사람은 시골에서 태어났어도 시골에서 살고,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시골로 와서 삽니다. 도시에 있고 싶은 사람은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도시에서 살고, 시골에서 태어났어도 도시로 가서 삽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싶으니까 자전거를 탑니다. 자전거를 몰다가 논둑길에서 물이끼를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크게 엎어져서 무릎도 크게 깨져서 여러 날 몸져누워 죽음과 삶 사이를 오갔지만, 무릎이 웬만큼 나아서 걸을 수 있은 뒤에 살살 자전거를 다시 달립니다. 자전거를 다시 달리고 싶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서 홀가분하게 놀도록 하자면 자전거를 달려야 하거든요.


  그러고 보면, 밤새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느라 밤잠을 거의 못 이루다시피 하는 나날을 어느덧 여덟 해를 보낸 삶도, 나 스스로 이러한 삶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이웃이 참 많은데, 두 아이를 건사하느라 갓난쟁이일 무렵에 날마다 천기저귀를 마흔 장이나 쉰 장쯤 손빨래하는 일이 힘든 적은 없었습니다. 몸이 찌뿌둥하게 결리기는 했어도 신나게 빨고, 신나게 다리고, 신나게 개어서, 신나게 갈았어요. 눈을 감고도 기저귀를 채울 수 있고, 눈을 감고도 똥을 치울 수 있어요.



우주에 관해 내가 무얼 알겠는가? / 나는 그가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러자 나도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 사실 계속 걸어서 우리는 배가 조금 고팠다. / 우주를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팠다. (먼지는 외롭다)



  우주를 알고 싶은 사람은 우주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를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더하기와 뺄셈을 알고 싶은 아이는 더하기와 뺄셈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하기와 뺄셈을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어렵고 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주나 더하기나 똑같습니다. 이리하여, 누군가는 밥짓기가 너무 어려워서 밥을 못 짓는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기저귀 채우기가 너무 어려워서 기저귀를 못 채운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아기 똥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나서 아기 똥을 못 치운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못 탄다고 하고, 누군가는 시골에서 못 산다고 하며,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합니다.


  중력은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요? 양자물리학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지구별 밖에 있는 수많은 별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수수께끼를 품기에 수수께끼를 풉니다. 사랑을 꿈꾸기에 사랑을 이룹니다. 삶을 노래하기에 삶이 즐겁습니다. 시 한 줄은 바로 ‘시라고 하는 수수께끼’를 가슴에 품는 사람이 씁니다.



아빠 구름은 어떻게 울어? / 나는 구름처럼 우르릉, 우르릉 꽝! 얼굴을 붉히며, // 오리는? / 나는 오리처럼 꽥꽥, 냄새나고, // 돼지는? / 나는 돼지처럼 꿀꿀, 배가 고파. (구름의 산책)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을 읽는 내내 ‘회사원’ 모습이 떠오릅니다.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더라도 얼마든지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시를 못 쓴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은 회사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이녁 삶을 시로 씁니다. 어느 한 사람은 회사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시로 못 씁니다.


  시골에서 살아야 숲이나 나무나 바람이나 하늘이나 논밭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아야 고요하거나 착한 마음이 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든, 또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일하든, 또 도시에서 딱히 일자리 없이 집에서 지내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가정주부’이든 ‘살림꾼’이든 대수롭지 않아요. 공돌이나 공순이라 하든,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라 하든, 참말 대수롭지 않습니다.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 시를 쓰고, 시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이 시를 읽습니다. “삶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시를 쓰고, 시를 읽습니다. 삶을 생각하기에 시를 생각하면서 노래합니다. 삶을 생각하는 마음이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산 사람’이 살아서 시를 씁니다. 삶을 노래하는 마음이어야 시인이 되지 않고, 그저 살면 되고, 그예 하루하루 즐겁게 맞이하면서 밥 한 그릇 맛나게 차려서 먹으면 어느새 시 한 줄이 노래가 되어 조용히 태어납니다. 손에 연필을 쥘 수 있으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씩씩하게 연필을 쥐어 보셔요. 우리는 누구나 시를 노래하는 ‘글님’이 될 수 있습니다. 4348.10.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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