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사 비평’을 바란다면
앞으로 누군가 나한테 주례를 서 달라고 여쭐 사람이 있을까? 앞날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한테 주례를 서 달라고 여쭐 사람이 나올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면 나는 주례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할까? 두 사람이 듣기에 달콤한 말을 늘어놓을까, 아니면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 사랑을 북돋울 말을 새롭게 펼칠까.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주례사 비평’을 할 수 없다. ‘주례사 비평’을 할 마음이란 터럭만큼조차 없다.
내가 읽은 책을 놓고 나는 어떤 느낌글을 쓸까? 책마을에는 내 이웃님이 꾸리는 출판사도 많고, 편집장이라든지 편집자로 일하는 출판사도 많다. 그러면, 나는 내 알음알이에 맞추어 ‘주례사 비평’을 하면 될까? 아니다. 아무리 가까이 사귀거나 아는 출판사라고 하더라도,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주례사 비평’을 할 수 없다. 오탈자가 나오면 낱낱이 짚어서 알려주고, 잘된 대목과 아쉬운 대목을 나란히 짚으면서 말해 줄 수밖에 없다. 내가 보고 느끼며 알아차린 이야기를 들려주는 몫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하는 일이다.
글을 쓰든 책을 내든 책을 마주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맨 먼저 ‘읽는이(독자)’이다. 스스로 읽는이인 줄 생각하면서 책을 엮는 사람하고 스스로 읽는이인 줄 잊으면서 책을 엮는 사람은 사뭇 다른 길을 걷는다. 스스로 읽는이라면 주례사 비평을 할 수도 없으며 바라지도 않는다. 스스로 읽는이인 줄 잊는다면 주례사 비평을 하거나 바라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한국 사회에 왜 주례사 비평이 넘칠까? 독자도 출판사도 비평가도 작가도 스스로 읽는이인 줄 잊으면서 서로 ‘동업자’가 되기 때문이다. 동업자는 무엇을 할까? 서로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쥐면서 지켜 준다. 4348.9.2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과 삶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