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문학동네 동시집 7
김륭 지음, 홍성지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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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9



‘아름다운 사랑’을 아이들하고 나누려는 동시

―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김륭 글

 홍성지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09.7.24. 8500원



  언제부터인가 퍽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겨레나 이웃 겨레도 고양이를 퍽 사랑하기는 했으나, 오늘날처럼 ‘고양이 사랑’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고 느껴요. 그래서 예전에는 개는 그냥 ‘개’라 하고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라 했습니다. 다만, 집에서 밥을 주면서 키우는 짐승이라면 ‘집개·집고양이’라 했고, 사람이 밥을 따로 주지 않는 짐승이라면 ‘들개·들고양이’라 했어요. 그리고, 개나 고양이를 썩 좋아하지 않으면 ‘도둑개·도둑고양이’ 같은 이름을 썼어요.



엄마 아빠 싸우는 날 / 화난 아빠 눈 속에 떠 있는 나는 미운 오리 새끼 (미운 오리 새끼)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고양이가 많이 늘었습니다. 고양이 모습은 예나 이제나 그대로이지만 사람살이가 사뭇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골목고양이’라든지 ‘길고양이’가 있고, ‘마을고양이’도 있습니다. 아마 ‘아파트고양이’도 있을 테며 ‘동네고양이’라든지 ‘달동네고양이’ 같은 이름도 따로 붙일 만하리라 봅니다.


  김륭 님이 빚은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문학동네,2009)를 읽습니다. 동시집에 붙은 이름이 ‘도둑고양이’입니다. 아이들이 읽을 동시를 쓴 어른 김륭 님은 왜 ‘도둑고양이’라는 이름을 골랐을까요? 그냥 ‘고양이’라고만 해도 되었을 텐데요? “쓰레기통에 버려진 고양이”라면 더더구나 ‘고양이’라고만 해야 알맞지 않을까요?


  아이는 어른하고 다릅니다. 아이는 사물을 바라보거나 사람을 바라보거나 풀이나 짐승을 바라볼 적에 ‘굳은 생각(편견)’을 ‘치우치게’ 품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죽은 고양이’가 지짐판(프라이팬)을 타고 먼먼 우주로 날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고양이, 구멍가게 꼬부랑 할머니랑 내가 헌 프라이팬에 담았어요 죽어서는 배고프지 말라고, 프라이팬을 비행접시처럼 타고 가라고 토닥토닥 이팝나무 밑에 묻어 주고 왔어요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내가 만일 과일이 된다면 / 수박이 될 거야 / 과일들 중에 대통령을 뽑는다면 / 덩치 크고 힘센 수박이 당선될 테니깐 (수박 대통령)



  아이들은 ‘대통령’을 알까요? 아이들도 텔레비전을 본다면 대통령을 알고,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둘레 어른들이 얘기하면 대통령을 압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안다고 해도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해요. 왜냐하면, 대통령이 ‘으뜸’이라거나 ‘가장 크고 힘센 무엇’이라고 여긴다면 그야말로 대통령을 잘못 아는 셈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대통령은 으뜸이나 가장 크거나 힘센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어떤 사람일까요? 네, 대통령은 ‘심부름꾼’이거나 ‘머슴’입니다. 대통령은 바지런히 일을 할 사람이요,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꿈을 이루도록 도와야 하는 심부름꾼이지요.


  크고 센 힘으로 뭔가를 한다면, 이때에는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우두머리’라고 해서 힘으로 윽박지를 수 없습니다. 슬기롭고 똑똑하며 훌륭할 때에 비로소 우두머리(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수박 대통령〉 같은 동시는 어린이 마음을 잘못 짚는다거나 얄궂게 건드린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스스로 좋아하는 과일을 좋아할 뿐, 으뜸 과일이라든지 가장 크고 멋진 과일을 좋아하지 않아요.



포동포동 살찐 배추벌레 한 마리 입에 물고 / 날아간다 꽁지 빠지도록 / 새끼들 찾아간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


나무들도 자전거가 있어요 / 쥐도 새도 모르게 자전거를 타고 놀아요 / 두 팔 쭉 뻗어 올려 훔친 해와 달을 바퀴로 굴려요 (자전거 타는 나무들)



  동시는 언제나 ‘생각하는 힘(상상력)’입니다. 생각을 마음껏 펼치기에 동시를 씁니다. 생각을 한껏 드날리기에 동시를 읽습니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라든지 〈자전거 타는 나무들〉 같은 작품처럼, 생각을 넓히고 펼칠 적에 비로소 동시가 태어납니다.


  다만, 〈자전거 타는 나무들〉 같은 작품을 보면 “훔친 해와 달”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때에도 어딘가 아리송해요. 나무가 왜 해와 달을 훔칠까요? 참말 나무가 이러한 마음일까요? 그냥 골목고양이나 마을고양이를 ‘도둑고양이’로 굳이 쓰고야 마는 시인 마음이 ‘나무가 해와 달을 훔친다’고 하는 동시를 쓰도록 나아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밥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 질경이나 패랭이, 원추리 씀바귀 노루귀 같은 / 예쁜 풀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해 줄래요 (밥풀의 상상력)



  곰곰이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나무는 사람한테 무엇이든 다 내어줍니다. 나무는 그늘도 내어주고, 줄기도 내어주며 꽃과 열매도 내어줍니다. 가지도 내어주지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그야말로 나무는 맨 나중에 그루터기까지 내어주지요.


  다만, 나무가 아무리 아낌없이 주는 숨결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동시를 쓰면서 ‘창작’이나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해와 달을 훔치는 나무” 이야기를 그려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동시도 여러모로 재미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생각해 본다면, 나무한테 ‘얘, 나무야, 너 해와 달을 훔치고 싶니?’ 하고 물어 보고서 이러한 동시를 썼는지 궁금해요. 나무로서는 멀쩡히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마음인데, 동시를 쓰는 어른이 나무가 ‘도둑처럼 훔치려는 마음이나 몸짓’인 듯 엉뚱하게 그린 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와 엄마 손을 잡고 / 그네처럼 매달려 가던 동생이 / 장난감 가게 앞에서 앙앙 떼를 쓴다 (무당벌레)


뿌지직뿌지직 신기해 / 엄마, 똥꼬에서 새가 나오려나 봐 // 자꾸 날개 펴는 소리가 들려 / 콕콕 부리로 똥꼬를 찔러 (변기 위의 아기 펭귄)



  아이들은 어른이 쓴 동시를 고스란히 읽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여느 때에 읊는 말을 고스란히 듣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씁니다. 그래서, 어른이 ‘도둑고양이’라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도둑고양이’라고 말해요. 어른이 ‘골목고양이’라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골목고양이’라고 말해요. 어른이 ‘널 사랑해’ 하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널 사랑해’ 하고 말할 뿐 아니라, 어른이 ‘너 미워’ 하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너 미워’ 하고 말하지요.


  동시는 재미나거나 남다른 이야기를 꾸미는 문학이 아닙니다. 동시는 어린이가 제 삶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북돋우도록 돕는 이야기를 펼치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담는 동시이기 때문에, 어른끼리 읽고 나누는 ‘어른 시’하고 사뭇 다르게, 말 한 마디까지 더욱 꼼꼼히 살피고 더욱 낱낱이 헤아리기 마련입니다.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한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인데, 재미난 이야기 못지않게 ‘아름다운 사랑’이 드리우는 말로도 더 마음을 기울일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들은 재미만 읽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은 말도 읽고 사랑도 읽고 느낌도 모두 읽습니다. 어린이문학을 쓰는 어른은 동시 한 줄을 쓸 적에 아주 깊고 너르면서 슬기로운 숨결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4348.9.2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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