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코와 반제티 - 세계를 뒤흔든 20세기 미국의 마녀재판
브루스 왓슨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0



자유·정의·평화를 마녀재판으로 죽인 미국

― 사코와 반제티

 브루스 왓슨 글

 이수영 옮김

 삼천리 펴냄, 2009.9.23. 26000원



  브루스 왓슨 님이 쓴 《사코와 반제티》(삼천리)를 읽습니다.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재판’을 다루는 책입니다. 2009년에 한국말로 나온 《사코와 반제티》는 592쪽에 이릅니다.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고향 이탈리아를 떠나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노동자’이고, 두 이주노동자는 미국에서 ‘아름다운 꿈’이 아닌 ‘슬픈 모습’만 지켜보면서 이 끔찍한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거나 마주해야 하는가를 걱정하거나 아파합니다.


  그런데 두 이탈리아 이주노동자는 어느 날 갑자기 경찰한테 붙잡힙니다. 이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붙잡히지 않습니다. 이 두 이주노동자는 정부 조직이 ‘가난한 노동자’한테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 없다고 느껴서, ‘무정부주의’를 생각하고 ‘징집기피’를 합니다. 바보스러운 정부는 없어져야 한다고 여긴 두 이주노동자요, 바보스러운 정부가 벌이는 바보스러운 전쟁에 끌려가서 ‘착한 이웃’을 총으로 쏴죽이는 그야말로 바보스러운 짓은 할 수 없다고 여겨서 ‘징집기피’를 합니다. 두 이주노동자는 미국에서 일용노동자로 일하며 두 가지 길을 걷는데, 다른 범죄 사건에 휘말리면서 미국 경찰에 붙잡혔고, 이 두 사람은 미국 정치와 사회에 ‘희생양’으로 다루어지고 맙니다.



1908년 6월 19일,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재판 사건의 주인공이 될 감상적이고도 지적인 이탈리아인(반제티)이 맨해튼의 거리에 섰다. 그는 여행가방을 든 채 새로운 나라를 살펴보았다. 미국은 그가 기대했던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본 광경은 놀랍고도 역겨웠다. 사람들은 골목길에서 잠을 잤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썩은 상추와 상한 과일을 주워먹었다. 맨해튼은 깡패, 창녀, 그밖에 미국의 거침없는 산업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들로 넘쳐났다. 거물 기업인들은 격식 있는 예복 차림으로 대로를 누비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뉴포트 메인 버크셔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평범한 노동자들은 헝겊 모자를 쓰고, 집에서 만든 보잘것없는 음식을 싸 가지고 가서, 무더운 여름날 오후를 코니아일랜드에서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39쪽)


대중의 인식과는 다르게 다수의 무정부주의 문헌은 폭력을 옹호하지 않았다. (48쪽)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이 ‘돈을 훔쳤다’거나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증거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두 가지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뒤집어썼고, 무척 오래 옥살이를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두 사람 스스로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뒤집어쓰고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전기의자에 앉혀졌으며, 그대로 목숨을 빼앗깁니다.


  미국 정치와 사회는 왜 두 이주노동자를 죽여야 했을까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유’와 ‘정의’를 한쪽에서 말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자유와 정의를 끔찍하게 짓밟은 셈인데, 어떻게 이 두 가지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을까요?


  가만히 보면, 한국 정치와 사회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밝힙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자유와 정의를 외치거나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무척 많이 짓밟혔고 괴로웠으며 죽음으로 내몰리기까지 했습니다. 한국은 틀림없이 민주 사회라고 하지만, 민주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무척 많습니다.


  한국에 있는 숱한 미군기지는 자유도 정의도 아닙니다. 세월호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도, 송전탑과 대형 발전소와 원자력 발전소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도, 제주 해군기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도, 어느 한 가지도 자유나 정의라고 할 수 없으며, 민주나 평화도 평등하고도 동떨어집니다.




산업은 메사추세츠의 돈줄이었고 산업에 돈을 댄 이들이 주 정부에 권력을 행사했다. (68쪽)


법원에서는 예심이 끝나고 기소가 한 주 연기되었다. 기소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사코와 반제티를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어난 브리지워터 강도 사건과 연계시키고, ‘마이크 보다’를 추적하고, 이탈리아에 타전하여 코아치의 수하물에서 도난당한 급료를 회수할 시간이 필요했다. (99쪽)


무정부주의에 대한 신념을 밝히고 나서 사코는 평생 일해 온 과정을 들려주었고, 자신의 손은 테두리 절단사의 손이지 살인자의 손이 아니라고 했다. “돈을 훔치고, 돈 때문에 불쌍한 사람을 죽이다니! 이건 나에 대한 모욕입니다! 나는 결백해요! 나 이런 짓 안 합니다! 곧 태어날 아기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요.”라고 그는 항변했다. (127쪽)



  20세기 미국에서는 마녀재판으로 두 이주노동자를 오랫동안 감옥에 가둔 뒤 전기의자로 괴롭히며 죽였습니다. 21세기 미국은 어떤 일을 할까요? 미국은 20세기나 21세기나 수없이 많은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이 전쟁무기를 지구별 여러 나라에 팝니다. 한국은 미국 전쟁무기를 무척 많이 사들입니다. 미국은 엄청나게 많이 쌓은 전쟁무기를 이끌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미국 군부대는 한국을 비롯해서 아시아 여러 나라에 있고, 미국에서 만드는 전쟁무기는 앞으로도 엄청날 테지요.


  곰곰이 헤아릴 노릇입니다. 전쟁무기와 자유는 한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요? 전쟁무기와 민주는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요? 전쟁무기와 평화나 평등이나 정의는 나란히 있을 수 있을까요?


  전쟁무기를 잔뜩 쌓은 나라치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도 독일도 프랑스도 이탈리아도 스페인도 모두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전쟁을 일으켜서 지구별 숱한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괴롭혔습니다. 한국하고 이웃한 일본도 전쟁무기를 잔뜩 쌓은 뒤 한국으로 쳐들어와서 퍽 오랫동안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전쟁무기로는 언제나 전쟁을 합니다. 전쟁무기이니까요. 전쟁무기를 많이 갖춘 나라는 ‘겉으로 민주’를 말해도 민주를 지키거나 가꾸지 않기 마련입니다. 전쟁무기를 내세우는 나라는 ‘겉으로 자유와 평화’를 말해도 막상 자유와 평화를 잔뜩 억누를 뿐 아니라, 권력자와 부자한테만 도움이 될 자유와 평화로 나아갑니다.




반제티의 감방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129쪽)


다섯 주 동안 사코와 반제티는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려 왔다. 두 사람이 화를 냈을 때 빼고, 배심원들은 그때까지 두 사람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211쪽)


카츠만은 진술 대목마다 이의를 제기했지만 속으로는 행운이 찾아온 걸 기뻐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12만 6천 명의 미국인이 사망한 사실은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져 있었다. 1919년의 폭탄 테러들은 무정부주의의 악의에 찬 활동이라고 인식되었다. 이런 마당에 두 피고인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무정부주의자이자 징집기피자로 낙인찍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검사가 이보다 더 좋은 과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216쪽)



  이주노동자는 고향나라에서 살 길이 까마득하다고 느끼기에 고향나라를 등집니다. 한국도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사람이 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가기도 했지만, 이 땅에서 살 길이 아득해서 만주로도 떠나고 일본으로도 떠났습니다. 오늘날에는 한국으로 찾아오는 이주노동자가 많습니다. 이주노동자로서는 제 고향나라 정치와 사회가 아름다웠다면 고향나라를 떠나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향나라도 안 아름다웠는데, 새로 뿌리내려서 살려고 하는 먼먼 나라도 안 아름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한국으로 찾아오는 이주노동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찾아오는 수십만에 이르는 이주노동자는 한국에서 ‘노동자 대접’을 제대로 받을까요? 한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는 ‘사람 대접’을 어느 만큼 받을까요?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땀흘려야 했던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한국으로 찾아오는 이웃나라 이주노동자도 노동자 대접과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모두 사람 대접을 받으면서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구별 모든 정부 조직은 ‘전쟁무기 만드는 데에 돈을 쓰지 말’고,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가꾸고 살찌우는 데에 돈을 쓰고 마음을 쓰며 슬기를 그러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상이란 누구에게나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기회를 줍니다. 최고의 사상이 아니고, 특정한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2천 년 전의 스페인과는 다릅니다. 출판, 교육, 저술, 자유언론의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압니다. 미국을 보니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 한 주에 21달러에서 30달러를 버는 이들에게는 하버드 대학에 갈 기회가 없습니다. 한 주에 80달러를 번다 해도 아이들 다섯 명을 기른다면 먹고살면서 아이들을 하버드 대학에 보낼 수 없습니다.” (228쪽)


미국인들은 1920년대 이전에도 향락을 즐겼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렇게 공공연하게 땡땡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금전등록기에 들어가는 그 많은 돈을 쓰며 즐긴 적은 없었다. 20세기를 지배하게 되는 거의 모든 오락(라디오, TV, 스포츠, 통속심리학, 가전제품, 청년문화, 유행의 광풍, 유성영화, 매디슨 애비뉴, 미키 마우스)이 이 광란의 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도 일부 여흥은 부자들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 날 문득 ‘모든 사람’이 몰고 다니는 포드 자동차처럼, 야구 경기나 무도 음악을 ‘모든’ 집의 거실로 들어온 RCA처럼, 술과 섹스에 대한 솔직한 토로처럼, 오락은 모두의 것이 되었다. (282쪽)



  인문책 《사코와 반제티》는 사코와 반제티를 둘러싼 1920년대 미국 사회가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줍니다. 1920년에 감옥에 갇힌 뒤 1927년에 목숨을 빼앗겨야 한 이탈리아 이주노동자 두 사람이 미국에서 보낸 1920년대는 ‘모든 사람이 모든 향락을 누리던 때’라고 합니다.


  문득 돌아보면 한국 사회도 1920년대 미국 사회와 엇비슷합니다. 2010년대 한국 사회를 보면, 한쪽에서는 차별과 푸대접과 따돌림이 판을 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스포츠와 영화와 섹스와 연속극과 유행과 상업문화가 판을 칩니다. 한쪽에서는 가난해서 굶는 사람이 있는 한국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매우 값비싼 사치품이 엄청나게 팔리는 한국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세값을 낼 돈이 없어서 달삯으로 살지만, 어떤 사람은 아파트 전세값을 1억 원이나 2억 원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파트 전세값을 1억 원이나 2억 원을 내는 사람이 ‘부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전세 보증금 천만 원이 없는 사람보다 전세 보증금 1억 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돈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더라도, 이쪽도 저쪽도 부자가 아닙니다. 이쪽도 저쪽도 삶이 아슬아슬하기는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와 정치와 사회인 한국에서 미국 스포츠와 유럽 스포츠 이야기는 실시간으로 퍼지고, 월세살이인 사람도 전세살이인 사람도 똑같이 스마트폰으로 이웃나라 스포츠 이야기에 푹 빠져듭니다.




세이어의 기각이 두 사람의 희망을 갉아먹고 있을 때, 판사는 자신의 공정성을 영원히 훼손하게 되는 말을 내뱉었다. 기각 결정을 내린 직후, 세이어는 다트머스 풋볼 경기에서 전직 매사추세츠 변호사인 교수 한 명을 우연히 만났다. 곧장 사코와 반제티 얘기를 꺼낸 세이어가 공격적으로 말했다. “내가 저번에 그 무정부주의 놈들한테 무슨 일을 했는지 모았는가? 아마 당분간 꼼짝 못할걸! 이제 그들을 대법원으로 보낼 테니 거기서 어떻게 되는지 보게!” (356쪽)


“내가 오늘 여기 이 판사석 앞에 서 있는 이유는 내가 억압받는 계급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압제자지요. 세이어 판사, 당신은 그걸 알 겁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압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압니다. 당신은 나와 가엾은 내 아내를 일곱 해나 박해하고서 오늘도 우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겠지요!” (406쪽)



  누군가 권력을 쥐면 누군가 억눌립니다. 누군가 돈을 거머쥐거나 혼자 차지하려고 들면 누군가 빈털털이가 됩니다. 누군가 권력을 휘두르면 누군가 짓밟히면서 괴롭습니다. 누군가 돈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면 누군가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합니다.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이주노동자였기 때문에, 고향나라에서 아무런 꿈을 키울 수 없어서 고향을 등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미국에서도 푸른 꿈을 볼 수 없이 슬픔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리하여 정부를 못 믿고 정부란 아무 도움이 안 되는구나 하고 느낀 사람이었기 때문에, 1927년 봄날, 그만 이슬처럼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이 미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지 않고 제 고향나라에서 꿈을 키울 수 있었으면, 미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죽을 일이 없습니다. 사코와 반제티가 두 사람이 제 고향나라인 이탈리아에서 ‘믿을 만하고 아름다운 정부’가 보여주는 멋진 정책을 지켜보면서 삶을 가꾸고 살림을 지을 수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사뭇 달랐으리라 느낍니다.




“판사님은 내가 판사님 앞에서 떨지 않는다는 걸 보고 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수치스러워하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고 나는 판사님을 똑바로 보고 있습니다.” (407쪽)


저녁 9시에 사코와 반제티는 사형 집행인이 옆방에서 전기의자를 실험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 뒤, 그들은 옥에서 불려 나왔다. 머리를 박박 깎고, 전극 집게를 연결할 수 있도록 바지에 긴 틈을 냈다. (463쪽)



  사코와 반제티는 왜 무정부주의를 밝혔을까요? 정부가 제구실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코와 반제트는 왜 군대에 가지 않으려 했을까요? 제구실을 못하는 정부가 일으키는 전쟁은 ‘가난한 노동자 이웃’ 모두를 더욱 괴롭히는 끔찍한 짓인 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무정부주의와 징집기피를 밝힌 두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못 미더운 정부’가 ‘미더운 정부’로 바뀌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군대가 갈 만한 곳’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정부가 할 일은 두 이주노동자한테 ‘사형선고 하기’가 아니라 ‘이주노동자도 제 나라 노동자도 걱정없이 삶을 가꿀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선보이는 일입니다. 1920년대 미국 정부뿐 아니라 2010년대 한국 정부도 슬기롭고 올바른 정책을 선보여서 ‘미더운 정부’로 거듭나야 하고, 전쟁무기로 이루는 ‘거짓 평화’가 아닌 전쟁무기와 군부대를 모두 내려놓고, 이 돈과 품으로 ‘아름다운 나라’를 이루는 참다운 길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반제티는 의자에 앉았다. 끈으로 조여지고 전극이 연결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죄라고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끔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겠지만 나는 결코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내게 베풀어 준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 범죄뿐 아니라 어떤 범죄도 말입니다. 나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교도관들이 일을 마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내게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머리에 복면이 씌워졌다. 몇 분 뒤, 그는 방에서 실려 나갔다. (483쪽)



  바보스러운 먼 나라 정부가 목숨을 빼앗는 자리에서 반제티는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깁니다. 일곱 해 남짓 옥살이를 하면서 햇볕 한 줌 쬐기 힘들었던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이탈리아도 미국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죽음길로 갑니다. 사형선고 판결을 내린 사람도, 전기의자에 전기를 넣은 사람도, 두 사람 머리에 복면을 씌운 사람도, 모두 너그러이 보아줍니다.


  무정부주의는 무장폭동을 일으키려는 사상이 아닙니다. 삶을 바로세우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사상이기에 ‘바보스러운 정부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밝히는 무정부주의입니다. 징집기피나 병역기피는 의무를 안 지려고 하는 몸짓이 아닙니다. 전쟁이 꾀하는 일이란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고 깨달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삶과 사회와 평화를 바라면서 보여주는 몸짓입니다.


  오직 평화가 평화를 이루고, 오직 민주가 민주를 이루며, 오직 정의가 정의를 이룹니다. 슬기로운 자유가 슬기로운 자유가 되고, 아름다운 평등이 아름다운 평등이 되며, 사랑스러운 꿈이 사랑스러운 꿈이 됩니다. 2010년대 한국 정부가 아름다운 평화와 슬기로운 정의와 사랑스러운 민주와 자유와 평등이 흘러넘치는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9.2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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