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을 앞두고 나올 책에 들어가는 글을 손질하다가

'시작'하고 '애로' 이야기를 새로 써 보았다.

곧 나올 책에 실리는 글이지만

이렇게 함께 걸어 놓는다.


'시작'이나 '애로'라는 말을 그냥저냥 쓰고 싶다면 쓰면 되지만,

이러한 말이 언제부터 왜 쓰여서 어떻게 퍼졌는가를

조금이라도 살피면서 생각하고 헤아리는

한국사람이 늘어날 수 있기를 빈다.


..


시작: ‘처음’으로 읊을 말 ‘시작’


논두렁길을 걷기 시작했다 → 논두렁길을 걸었다

회의가 시작되다 → 회의를 하다

곧 학기가 시작하면 → 곧 새 학기가 되면

날이 어둡기 시작했다 → 날이 어두워진다


  한국사람은 ‘시작(始作)’이라는 한자말을 안 쓰며 살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 한자말이 널리 퍼졌기에 오늘날처럼 씁니다. 한국사람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을 뿐,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한다”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다가 그치면 아니 함만 못 하다”라 했을 뿐, “중간에 포기하면 아니 시작함만 못 하다”라 하지 않았어요. 일본에서는 ‘始め’나 ‘始まり’처럼 쓰고 한국에서는 ‘始作’으로 쓰는데, “시작이 반이다”, “시작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다”, “시작이 좋으면 끝이 좋다”, “또 시작이군”,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사업을 시작하다”, “새로 시작하다”, “걷기 시작하다”, “꽃이 피기 시작하다” 같은 말마디는 모두 일본말을 번역하면서 퍼졌어요. 한국말로는 “처음이 반이다”, “처음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다시 하다”, “처음이 좋으면 끝이 좋다”, “또 하는군/또 저러는군”, “무엇부터 할까요”, “아직 맛보기이다/아직 맛보기일 뿐이다”, “일을 하다”, “새로 하다”, “걷다”, “꽃이 피다/꽃이 피려 한다/꽃이 막 핀다”처럼 적어야 옳아요.


  “준비(準備), 시작!”도 일본 말투입니다. “요이, 땅!”을 “준비, 시작!”으로 바꾸었을 뿐이고, “준비, 출발!”도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말로는 “자, 가자!”나 “자, 달려!”나 “자, 하자!”처럼 써야 올바릅니다.


  “시작과 끝”이란 “처음과 끝”을 가리킵니다. “공연이 시작되었어”는 “공연을 해”를 가리킵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나 “시작도 끝도 없다”는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나 “처음도 끝도 없다”처럼 손질하면 됩니다. 4348.9.20.해.ㅅㄴㄹ


+


애로 사항: ‘애로(隘路)’는 ‘걸림돌’이나 ‘어려운 일’로 적어요


그 도로의 남쪽 끝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애로가 되어

 → 그 길 남쪽 끝은 바윗돌로 이루어져 좁고 거칠어

애로가 많다

 → 많이 어렵다 / 많이 힘들다

덕유산까지 들어가기엔 적잖은 애로가 있었다

 → 덕유산까지 들어가기엔 적잖이 어려웠다


  한자말 ‘애로(隘路)’는 “1. 좁고 험한 길 2. 어떤 일을 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좁고 거친 길”을 가리켜 ‘애로’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좁고 거친 길”은 그저 “좁고 거친 길”입니다. 그러면 한국말사전에 왜 이런 말풀이가 나올까요? 바로 일본말사전을 그대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널리 쓰는 한자말 ‘애로’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퍼졌습니다. 일본말사전에 나오는 “販賣上の隘路”를 “판매상의 애로”처럼 적는다고 해서 한국말이 될 수 없습니다. “판매상의 애로가 있다”는 “팔기 어렵다”나 “팔기 힘들다”로 바로잡아야 옳습니다.


  한국말로는 어떤 일을 할 적에 걸림돌(장애)이 된다면 ‘걸림돌’이라 말합니다. 걸림돌이 있다면 어렵거나 힘들다는 뜻이니 ‘어렵다’나 ‘힘들다’라 말하기도 합니다. 어렵거나 힘들다면, 이러한 대목을 바로잡거나 고치기를 바라는 만큼 ‘고쳤으면 하는’ 일이나 ‘바로잡기를 바라는’ 일이라고도 말합니다.


  ‘힘들다’와 ‘어렵다’를 쓰면 되고, 때와 곳에 따라서는 ‘고단하다’나 ‘고되다’를 쓸 수 있습니다. ‘고칠 대목’이나 ‘바꿀 곳’처럼 쓸 수 있습니다. 윗자리에 있는 분들은 으레 “애로 사항이 있으면 건의하라”고 말합니다만, 이때에는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라”로 고치거나 “일하며 어려운 대목은 말하라”로 고쳐서 말해야지 싶어요. 4348.9.2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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