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 팡세총서 1
카를 마르크스 외 지음, 김대웅 옮김 / 두레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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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9



한국 사회를 이끌 ‘한국 철학’은 있을까?

― 독일 이데올로기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김대웅 옮김

 두레 펴냄, 2015.8.15. 15000원



  한국에도 ‘한국 철학’이나 ‘한국 사상’이 있을 텐데, 한국 철학이나 한국 사상이 무엇인지 알기는 퍽 어렵습니다. 한국 철학이나 사상을 살피는 학자는 드물고, 한국에서 스스로 제 철학이나 사상을 세우려는 학자도 드물며, 한국 철학이나 사상으로 사회나 삶이나 사람을 읽으려고 하는 학자도 드뭅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따로 있지만, 이른바 한국은 독립한 나라이지만, 서양 철학이나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나 삶이나 사람을 읽기 마련이고, 문화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과학도 한국 철학이나 사상이 아닌 서양 철학이나 사상으로 읽거나 헤아리는 흐름이 짙습니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즉 그의 사유의 현실성과 위력 및 현세성을 증명해야만 한다. 사유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은 순전히 공리공론적인 것에 불과하다. (36쪽)


개인들은 각각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생산과, 다시 말해서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54쪽)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두 사람이 함께 빚은 《독일 이데올로기》(두레,2015)를 읽습니다. 두 사람은 이 책을 쓴 까닭을 “꿈속을 헤매다 정신이 혼미해진 독일 민중들에게 이들이 확언하고 있는 현실의 그림자에 맞선 철학적 투쟁을 조롱하고 모욕하려”는 뜻이라고 머리말에서 밝힙니다. 꿈속에서 헤매기만 하는 수많은 독일사람이 그림자를 보기만 할 뿐 삶을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을 나무라거나 샅샅이 따지려는 뜻에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다니, 여러모로 재미있구나 싶으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한국에서도 누군가 쓸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참말 한국에서도 ‘한국 이데올로기’이든 ‘한국 철학’이든 ‘한국 사상’이든 이름을 붙이면서 한국사람 바보스러운 굴레에 스스로 갇힌 채 스스로 헤매는 모습을 나무라면서 참다운 길을 밝힐 만한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싶습니다. 몇몇 이름난 학자가 쓴 책을 좇아서 풀이하는 ‘한국 철학’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사람 스스로 나아갈 길을 찾는 ‘한국 철학’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머잖아 나올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실제로 진정한 공산주의자에게는 기존 사물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급선무이다. (86쪽)


도시는 이미 인구, 생산 도구, 자본, 향락, 욕구 들이 집중된 곳이었으나, 농촌은 이와 정반대의 현상, 즉 고립화와 개별화를 보이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 간의 대립은 사적 소유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을 분업, 즉 규정된 강제적 활동으로 포섭시킨다는 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 준다. 이러한 포섭은 한쪽의 사람을 꽉 막힌 도시동물로, 다른쪽 사람을 꽉 막힌 농촌동물로 만들어, 양쪽의 이해관계가 날마다 새롭게 대립하게 만든다. (99쪽)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두 사람은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실마리를 밝히고, 독일이라는 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하는 대목을 밝힙니다. 두 사람은 독일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길”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마다 고립화와 개별화로 치닫는 문명”을 깨뜨리면서 독일 사회가 참답게 슬기로운 길로 새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앞으로도 끝없는 경제개발과 경제성장으로 가야 할까요, 아니면 평등하면서 평화로운 사회와 경제로 가야 할까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앞으로도 ‘노동 유연화’라는 이름을 붙인 ‘기업 하기 좋은 나라’로 가야 할까요,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면서 살기에 좋은 나라’로 가야 할까요?


  어느 쪽으로 가든 ‘좋은 나라’입니다. 다만, 어느 길은 ‘기업을 하는 사람한테만 좋은 나라’이고, 어느 길은 ‘이 나라에서 사는 사람 모두한테 좋은 나라’가 됩니다.


  기업을 꾸리는 사람한테는 기업 이익이 가장 크다고 여길 테지만, 이 나라에서 사는 사람한테는 ‘이 나라에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즐겁고 넉넉하게 살 수 있어야 기업을 꾸리는 사람도 ‘더 큰 이익이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이익이 되는’ 사회와 경제가 됩니다.



각 개인들은 참되고 현실적인 공동체 속에서, 지배계급에 맞선 결사 속에서 그리고 그 결사를 통해 자유를 획득한다. (136쪽)


관념 속에서는 부르주아지의 지배 아래 있는 개인이 전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의 생활 조건이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더 커다란 물적 강제력 아래 포섭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유롭지 못하다. (139쪽)



  한국 정치와 사회는 ‘자유민주주의’라고 합니다. 자유와 민주가 바탕이라고 합니다. 틀림없이 선거 제도가 있고, 남자도 여자도 투표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노동권을 제대로 누린 일이 드물고, 아직도 이러한 노동권은 제대로 펼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여성은 여성 노동자로서 성차별을 아직도 받을 뿐 아니라,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한테는 노동자로서 누릴 권리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사회와 경제를 떠받치는 밑틀이 되는 수많은 사람들(노동자)이지만, 정작 이들 수많은 노동자가 받는 권리란 ‘쉽게 해고될 권리’일 뿐이요 ‘걱정하지 않고 한곳에서 일자리를 얻’는 권리는 없으며, ‘최저생계비나 생계비’ 아닌 ‘삶을 가꿀 만한 살림돈’을 일삯으로 못 받기 일쑤입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수많은 사람은 ‘나라에서 밝히는 최저임금’에 맞추어 최저생계비를 살짝 웃돌 만한 일삯을 겨우 받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사회나 정치는 ‘자유’라는 허울이지만 막상 자유라고 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정치나 경제에서 ‘민주’가 있다고 하지만 정작 민주라고 할 만한 대목은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사회주의로 변장한 독일 철학은 물론 ‘조야한 현실’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그것은 언제나 그로부터 상당한 정도의 거리를 두고 신경질적인 분노를 표시하면서 다음처럼 외친다. 나를 건드리지 마시오! (203쪽)


각각 저술활동을 하는 분파가, 특히 자신을 ‘가장 발전된’ 것으로 생각하는 분파가 자신을 단순히 ‘주요한 당파들 중 하나’가 아니라 실제로 이 시대의 ‘주요 당파’라고 선언하는 것이 독일의 이데올로그들에게는 상당 기간 동안 하나의 유행이 되어 버렸다. (214쪽)



  독일 사회를 슬기롭게 이끌 수 있는 생각(철학, 사상, 이데올로기)을 가슴으로 품으면서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이 독일에서 나왔습니다. 백예순 해가 훨씬 넘은 일입니다. 그러면, 한국 사회를 슬기롭게 이끌 만한 생각(한국 철학이나 한국 사상)은 있을까요? 먼먼 옛날부터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은 이 나라를 아름답거나 슬기롭거나 사랑스럽거나 훌륭하게 가꿀 만한 생각을 이 나라에서 어느 만큼 길어올리거나 나누거나 펼치려고 했을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서양 철학이나 서양 사상이 아닌 한국 철학이나 한국 사상으로 이웃(한국사람)을 헤아리면서 참다운 삶길을 밝히는 이야기는 어느 만큼 나온다고 할 만할까요?


  그림 한 점이나 시 한 줄을 비평하면서도 서양 이론이나 철학을 붙이는 한국 사회 비평가와 지식인입니다. 몸은 이 나라에 있다지만 정작 이 나라 어느 곳에 몸이 있는지 모르기 일쑤입니다. 독일에서 ‘주요 당파’가 되어 독일 사회 정책을 바보스레 밀어붙이거나 이끈 지식 집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독일 사회가 참다운 민주나 자유나 평화나 평등이나 통일로 가는 길하고 엇갈렸습니다. 1900년대 첫무렵에 독일 사회와 정치가 보여준 모습으로 잘 알 만합니다. 2000년대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지식 집단이 어떤 철학이나 사상으로 정책을 꾀할까요? 이른바 ‘서민’이라는 자리에서 살면서 정책을 내놓는 지식 집단은 있을까요? 스스로 ‘여느 시민’으로서 수수한 살림을 꾸리면서 철학이나 사상을 펼치는 지식인은 얼마나 있을까요?


  전철삯이나 버스삯조차 모르는 지식인이나 정치꾼은 어떤 정책을 펼칠까요. 시골 농사꾼이 쌀 한 가마를 농협에 팔아서 돈을 얼마나 받는지, 이런 값으로 시골에서 살림을 꾸릴 만한지를 제대로 아는 지식인이나 정치꾼이 있기나 있을까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255쪽)



  세계는 바뀔 노릇입니다. 다만, 바보스레 바뀌지 말고 아름답게 바뀔 노릇입니다. 세계뿐 아니라 우리도 스스로 바뀔 노릇입니다. 엉성하거나 어리석게 바뀌지 말고 사랑스러우면서 슬기롭게 바뀔 노릇입니다.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도 말하지만,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고 해서 세계가 바뀌지 않습니다. 논쟁이나 토론을 아무리 벌여도 세계는 안 바뀝니다. 세계를 바꾸려면 ‘해석·논쟁·토론’이 아니라 몸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삶을 바꾸는 길로 가야 합니다. 실천을 하지 않는 이론은 언제나 수많은 다른 이론으로 이어지기만 합니다.


  입시지옥을 비판하면서 제 아이는 똑같이 입시지옥에서 ‘서울권 대학교’에 잘 뽑히도록 이끈다면 이 세계는 바뀌지 않습니다. 평화를 바란다고 외치면서도 전쟁무기와 군부대에 눈을 감는다면 이 세계는 바뀌지 않습니다. 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집에서 즐겁게 살림을 맡고 아이를 돌보는 하루를 짓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바뀌지 않습니다. 도시 소비자는 틀에 박힌 소비를 스스로 깨야 하고, 시골 농사꾼은 농약과 화학비료와 비닐에 기대는 굴레를 스스로 박차야 합니다.


  스스로 좁은 틀을 깨야 합니다. 스스로 낡은 굴레를 부수어야 합니다. 스스로 새로운 삶을 지어야 합니다. 스스로 아름다운 사랑과 꿈이 되도록 한 걸음씩 새롭게 내딛어야 합니다. 아직 한국에 ‘한국 철학’이 없다면 이제부터 하나씩 슬기롭게 갈고닦으면 됩니다. 몇몇 배부른 사람만 더 배부르는 길로 가는 한국 철학이 아니라, 온누리 모든 사람이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두레와 품앗이 같은 한국 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4348.9.17.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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