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란 ‘눈으로 보는 마음’
말은 입에서 나온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귀로 들을 뿐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말을 손을 놀려서 종이에 옮겨적거나 받아쓰면, 눈으로 볼 수 있다.
눈으로 말을 본다면, 눈은 ‘종이에 적힌 글씨’만 살피지 않는다. ‘말을 보는 눈’은 ‘글씨에 어린 숨결’을 함께 헤아린다. 아무 마음이 없이 쓴 글이 아니라, 온마음을 실어서 흐르던 말을 담은 글일 때에는, 이 글을 쓴 사람이 어떤 목소리로 말을 했고, 어떤 느낌으로 말을 했으며, 어떤 마음과 뜻과 사랑으로 말을 했는가 하는 대목을 모두 헤아린다.
‘읽기’란 ‘글씨 알아보기’가 아니다. ‘읽는다’고 할 적에는 ‘글씨에 서린 마음’을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내 마음에 네 마음을 담으려고 하는 몸짓이 아니라면 ‘읽기’가 아니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이 ‘책읽기’나 ‘글읽기’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제대로 책읽기나 글읽기를 못 하기 일쑤이다. 겉으로 드러난 줄거리에만 매달린 채, 글에 실린 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살피지 못하며 헤아리지 못할 적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하며 알아내지 못한다.
책읽기는 “줄거리 훑기”가 아니다. 줄거리를 아무리 잘 훑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줄거리 훑기”를 책읽기라고 하지 않는다. 줄거리만 훑어서 쓰는 글은 ‘느낌글(독후감)’이 아니다. 줄거리만 적었으니, 이런 ‘줄거리 간추림’은 ‘보도자료’라고는 여길 수 있겠지.
‘주례사 비평’이라든지 ‘서평단 서평’이 따분할 뿐 아니라 아무런 뜻도 없는 까닭은, 주례사 비평이나 서평단 서평에는 ‘책을 읽은 몸짓’이 없고 ‘책을 읽어서 북돋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주례사 비평이나 서평단 서평에는 “줄거리 훑기”가 아닌 “네 생각을 읽어서 내 생각을 살찌운 숨결”이 드러나지 않으니, 아무런 값어치조차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마음을 풀어놓은 ‘글’인 줄 알아야 한다. 내 마음으로 네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빚은 ‘책’인 줄 알아야 한다. 마음으로 읽을 때에 비로소 ‘읽기’이다. 내 사랑을 담아서 네 사랑을 기쁘게 읽는 몸짓이 바로 ‘책읽기’이다. 그냥 닥치는 대로 손에 쥐어서 종이를 넘기다가 끝 쪽까지 나아가서 덮는 몸짓으로는 어떠한 책읽기도 안 한 셈이다. 신문이나 잡지 같은 매체에 실리는 거의 모든 ‘서평’이 그리 읽을 만하지 못한 까닭은, 거의 모든 ‘서평’에는 ‘이러한 글(서평)을 쓰는 사람 마음’은 찾아볼 길이 없이 “줄거리 훑기”만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이 책을 살펴서 마음이 없이 글을 쓰는데, 이러한 ‘글씨 꾸러미’를 어떻게 ‘글’로 여겨서 읽을 수 있겠는가. 4348.8.3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