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미지의 빨간약 - 단편소설로 시작하는 열여덟 살의 인문학
김병섭.박창현 지음 / 양철북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푸른책과 함께 살기 124



네 아픈 마음에 ‘빨간약’을 발라 줄게

―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

 김병섭·박창현 글

 양철북 펴냄, 2015.7.31. 11000원



  국어교사로 일하는 김병섭, 박창현 두 분이 함께 빚은 이야기책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은 “단편소설로 시작하는 열여덟 살의 인문학”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국어교사는 단편소설 여덟 가지를 여고생하고 함께 읽습니다. 여고생은 저마다 단편소설을 읽은 뒤에 모둠을 꾸려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러고 나서 단편소설마다 글쓴이가 들려주려고 하는 생각이 무엇인가를 밝히려 하고, 이 단편소설을 오늘 이곳에서 여고생으로서 읽는 아이들이 마음에 어떤 꿈을 품을 만한가 하는 대목을 돌아봅니다.



“대신 우린 공부를 하잖아. 내가 알바 하고 싶다고 하면 울 엄마 항상 하는 얘기가 그거야. ‘내가 언제 돈 벌어 오라고 그랬니?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랬지.’ 공부라는 것도 결국엔 그거 아냐? 나중에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가능성.” (20쪽)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머리부터 잘라야지.”라는 말을 들으면 없던 반항심까지 생겨나는 느낌이다. 머리 길이와 성적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81쪽)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에서 국어교사 ‘리쌍’은 여고생들이 읽을 단편소설을 골라서 책을 건넵니다.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인문학을 배우기로 한 여고생은 모두 다섯이고, ‘체육복 바지 단비’, ‘정리왕 수정’, ‘얼음공주 지원’, ‘빨간약 미지’, ‘반대쟁이 혜민’입니다.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다 다른 이름을 스스로 붙이거나 동무가 불러 주거나, 아무튼 ‘다른 어버이한테서 태어나’서 ‘다른 보금자리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단편소설 하나를 놓고서 다섯 아이는 ‘다섯 가지 삶’으로 들여다봅니다.


  다섯 가지 삶으로 바라보는 한 가지 단편소설은 어떠한 이야기가 될까요? 똑같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다섯 가지 눈길로 읽을 수밖에 없을 테지요. 그리고, 다섯 가지 눈길로 읽은 단편소설은 ‘다섯 가지 새로운 이야기’로 뻗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이제껏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헬렌이 로봇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헬렌의 사랑을 부정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다. 로봇이지만 사랑은 진짜라는 것, 그것이 데이브를 다시 헬렌에게 돌아오게 한 이유가 아닐까? (46쪽)


나를 개새끼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니까. 이런 낙서를 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72쪽)



  여고생 다섯 아이는 왜 단편소설로 인문학을 배우려고 할까요? 이 아이들은 왜 학교 수업을 다 마친 뒤에 따로 모여서 단편소설을 더 읽으면서 ‘교과서 바깥 세계’를 배우려 할까요?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를 배우려 합니다.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동무들을 저마다 사랑하기 때문에 ‘동무가 어떤 마음인가를 헤아리면서 한결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 단편소설로 인문학을 배우려 합니다.


  다섯 아이는 독후감 쓰기를 하려고 단편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게다가 ‘더 많은 책’을 읽지 않고, ‘더 많은 작품을 찾아서 읽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이 다섯 아이는 ‘문학소녀’가 되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을 스스로 똑똑히 바라보면서 씩씩하게 일어서서 즐겁게 노래하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미지가 나쁜 애가 아닌 건 안다. 아주 명랑하고, 착하고, 뭐든 열심히 하려고 하고……. 하지만, 아니 그래서 나는 미지의 웃음이, 미지의 대답이 좀…… 재수 없었다. 자존심도 상했다. 미지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보다는 못했다. 나보다 공부를 못하는 미지가 같은 소설을 읽고도 무언가 더 많이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109쪽)



  열여덟 해를 살아온 여고생 나이는 ‘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리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열여섯 해를 살아온 남중생이나, 학교를 안 다니고 열세 해를 살아온 어린이한테는 ‘나이가 많’아요. 다섯 살 아이한테도 나이가 한참 많으며, 갓 태어난 아기한테도 나이가 많을 테지요.


  나이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수로운 대목이란, 스스로 배우려 하느냐 아니냐입니다. 스스로 배우려고 할 때에 국어교사인 리쌍 님은 아이들한테 수수께끼를 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국어교사가 들려주는 수수께끼를 듣고는 ‘정답 찾기’나 ‘해답 찾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저마다 ‘실마리 생각하기’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다섯 여고생은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을 합니다. 단편소설을 쓴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생각하고, 단편소설에 나오는 사람들 마음을 생각하며, 이 단편소설을 읽는 내(여고생) 마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이 단편소설을 읽는 동무들 마음을 생각해요.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한다, 스포츠 정신이다, 말들은 많아도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아.” (193쪽)



  인문학은 지식학이 아닙니다. 인문학은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학이 아닙니다. 인문학은 삶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나누는 길입니다. 단편소설로 열여덟 살 푸름이가 인문학 첫걸음을 뗀다고 할 적에는, 앞으로 스스로 두 다리로 서서 씩씩하게 나아갈 삶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삶이 아닌, 내가 스스로 길을 찾으려 한다는 뜻입니다. 남이 차려 놓은 밥상대로 먹는 밥이 아닌, 내가 손수 흙을 일구어 밥을 장만한다는 뜻입니다. 무턱대고 돈만 많이 벌려고 하는 일자리가 아닌, 내 가슴속에 품을 꿈을 찾아서 사랑을 노래하려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떠올리다 문득 든 생각 하나가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건재하다면? 사춘기 시절에 저지른 철없던 장난쯤으로 여기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간다면?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의 무용담 속에서 그들의 더러운 입에 내 이름이 올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러므로 나는 절대 죽을 수 없었다. (210쪽)



  뛰어난 아이가 없습니다. 모자란 아이가 없습니다. 훌륭한 아이가 없습니다. 어수룩한 아이가 없습니다. 대단한 아이가 없습니다. 바보스러운 아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아이가 있느냐 하면, 오직 한 아이만 있습니다. 바로 사랑스러운 아이만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서 태어나려 하던 아이가,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픈 아이로 자라고, 앞으로 사랑을 새로운 아이한테 물려주는 어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웁니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인문학은 시작한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래, 나는 나다. 내가 그 친구들, 그 아픈 마음들, 다 알거나 제대로 치료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작은 상처는 감싸 줄 수 있지. 빨간약을 바르고 후후 불어 줄 수는 있지. 곁에 있어 줄 수는 있지. 안아 줄 수는 있지. 엎어진 김에 누워도 된다고, 다시 일어날 거면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해 줄 수는 있지.’ (240∼242쪽)




  그나저나 다섯 여고생 가운데 왜 “빨간약 미지”라는 아이 이름으로 책을 엮었을까요? ‘체육복 바지 단비’나 ‘정리왕 수정’이나 ‘얼음공주 지원’이나 ‘반대쟁이 혜민’은 왜 책이름에 오르지 않을까요?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을 읽으면, 다섯 아이 삶 가운데 ‘빨간약 미지’라는 아이 삶이 ‘가장 수수하다(?)’고 볼 만합니다. ‘빨간약 미지’라는 아이는 다른 동무들처럼 어릴 적부터 여러모로 ‘마음이 다친(상처를 받은)’ 일이 드물다고 떠올립니다. 미지네 어버이가 놀라운 부자도 아니고 엄청난 사랑을 베풀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웃음이 흐르는 삶을 즐겁게 누렸다는 대목을 헤아리니, 다른 아이들은 이런 ‘수수한 사랑’조차 못 느끼거나 멀리 떨어진 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고 악을 썼구나 싶어서 어쩐지 혼자 외톨이가 된 듯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빨간약 미지’는 제 가방에 늘 있는 ‘빨간약’처럼, 아주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빨간약’으로 동무들을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딱히 도움말을 들려주지 못해도, 동무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힘들어 하는 동무가 부르면 천천히 다가가서 손을 맞잡고 일어서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나는 무심코 단비의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반으로 접혀 있던 단비의 낙서 종이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란 나는 단비에게 참 미안하고 많이 부끄럽고 그러다가, 그냥 단비가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153쪽)



  네 여고생은 저마다 가슴에 새겨진 슬픔과 아픔이 있어서 ‘체육복 바지’가 되고 ‘정리왕’이 되고 ‘얼음공주’가 되고 ‘반대쟁이’가 되었습니다. 이 네 아이한테 ‘빨간약’을 발라 주면서 빙그레 웃을 수 있는 미지라는 아이인 터라, 이 이야기를 담은 책은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이 됩니다.


  사랑은 늘 가장 수수한 데에 있습니다. 바로 내 가슴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네 가슴에 있습니다. 내 가슴에서 흐르는 사랑이 네 가슴으로 날아가고, 네 가슴에서 자라는 사랑이 내 가슴으로 달려옵니다. 서로 아름답게 만나서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가 되면서, 다섯 아이들은 새로운 삶에 눈을 뜨는 인문학을 단편소설로 국어교사하고 함께 배웁니다. 4348.8.2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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